<디퍼>와 이야기하며 생각한 것들
N잡러가 되고 나서 힘든 것들도 있지만, 좋은 점들이 더 많다. 그러니까 계속하고 있는 것이고. 좋은 점들 중 하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지고, 그 사람들에게서 질문을 받을 기회들이 늘어난다는 것. 그게 어떤 질문이든지 간에, 그러니까 "N잡이 뭐예요?"라는 질문에서부터 "일을 할 때 스위치 전환은 어떻게 하시나요?"라는 질문까지,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해야 하고, 그 대답을 생각하면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니까. 잠깐 쉬면서 숨을 고를 수도 있다. 이곳저곳을 넘나들면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늘 점검해야 하는 N잡러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시간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래서, 저는 잘 가고 있는 건가요?
휴가를 다녀와서 다시 일이 시작되고 한창 바쁜 시간을 지나고 있던 중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디퍼>의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인터뷰를 제안했고,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아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물론 중간에 빠띠의 동료인 갱님이 신기하게 일하는 사람이 있다고 <디퍼> 기자에게 제보했기 때문에 연락이 닿은 인터뷰였다). 그냥 평소에 나를 소개하는 것처럼 근 1년 여 간의 일을 얘기하면 되겠지, 생각했지만 웬 걸. 어쩐지 얘기가 재밌어지더니 10년 전 얘기까지 나와버렸고, 2시간 동안 조금의 쉬는 시간도 없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먼저 질문지를 받은 건 아니라서 질문을 받고 생각나는 대로 막 얘기를 내뱉었는데, 그것들이 잘 정리되어 기사가 되었다. 한 번쯤 받았던 질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질문도 있어서 인터뷰가 끝나고도 며칠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질문이 나를 잠깐 멈춰 세운다고 얘기했는데, 이 인터뷰야 말로 내가 잘 가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게 '와, 여기까지 잘 왔어'라거나 '이렇게 가면 되겠군!'이라는 답과 연결된다는 건 아니다. 이 여정 속 내가 어떤 상태인지, 요즘 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점검을 했다고 보면 더 맞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
두 시간 동안 나눈 대화는 아래 기사에 잘 정리되어 있다.
대체할 수 없는 인력이 되는 것,
그게 가능해?
이 날 인터뷰를 가면서, '전문성을 키워서 대체 불가한 인력이 되는 법'이라는 카피를 보게 되었다. 어떤 자기계발 수업에 대한 광고였다. 수업의 내용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업무에서 꼭 필요한 능력들이 뭔지 상담을 통해 알아보고, 그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서 대체 불가한 인력, 독보적인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다. 어떤 수업인지이해가 갔는데, 그래도 여전히 '그렇게 하면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의문이 남았다. 왜 저런 말들로 불안하게 만들고,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할까, 하는 씁쓸한 마음도.
너무 낭만적이라거나 순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모든 사람이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 다르지, 다 귀하지, 이런 당연하고 맞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그동안 나의 경험이 그랬다.
어쩌면 '나'라는 자리가
여러 조직에 발자국을 찍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 그만두고, 새로운 사람이 약간의 낯섦과 수줍음을 가지고 그 자리로 온다. 전임자가 남기고 간 인수인계서를 보고 같은 일을 한다. 하지만 그 일들이 전임자들의 그것과 같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같은 업무를 해도 그 사람이 해 온 일의 모양과 특유의 습관들이 있어서 같은 일이 달라진다. 가끔 이걸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해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렇게 어마어마하지 않아도 모두 고유한 자기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마도 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 자리가 누군가로 대체되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자리가 없어지고, 누군가의 자리가 새로 들어오는 것. 내 자리는 내가 옮기는 어떤 조직이나 프로젝트로 옮겨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아주 숙련된 어떤 기능이 누군가를 대체 불가하게 만든다면, 그 기능을 좀 더 가진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누군가는 대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요한 건 기능의 고도화가 아니라 나만의 근육,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이건 전문 기술이나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게 내 일, 그리고 나의 삶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내 것이 되는지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내가 배우고, 얘기하고, 놀고, 또 일하는 것의 맥락을 내가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그 맥락이 나를 진짜 대체 불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믿어본다.
내가 왜 N잡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인터뷰는 "하지만 저는 엔잡러라는 상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엔잡을 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요."라는 말로 끝나는데, 이게 인터뷰하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 가장 큰 인사이트다.
'일을 하나만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N잡러 끝나는 건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 그런가, 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걸 전에는 '실험을 끝낸다'라거나 '실패하겠지'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개의 조직에서 일해보는 실험을 끝내는 건 맞지만, 낮에 하는 일을 하나만 갖게 된다고 나는 N잡러가 아닌 건가? 요즘 나는 N잡러가 직업의 수를 말한다기보다는 정체성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정체성에는 삶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가 들어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 대표적인 어떤 일이, 대표적인 어떤 자리가 나를 설명하지 못한는다는 생각, 그것으로 나를 설명하지 않겠다는 태도. 이런 생각들은 내가 일을 두 개 하든 세 개 하든 한 개 하든 변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지, 언젠가 변할 수도 있으니까 변하기 전까지는 N잡러로 잘 살아봐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또 새로운 질문을 받을 때까지, 새로운 질문이 내 안에 생길 때까지, 즐겁게 살아보려고 한다.
늘 그랬듯이 '여전히 대체 불가한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