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인 시간쓰기에 대한 짝사랑 탈출기
30분 단위로 생활하자
교수님의 생활 신조라고 했다. 연구실에 가서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30분의 시간이 있으면 하기로 했고, 그렇게 살았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아졌다고 했다. 학교에 가서 30분 연구를 할 시간이 있으면 가고, 30분 정도 운동을 할 시간이 생기면 한다는 것. 시계에 길들여졌기 때문인지 1시간 단위로 뭔가를 하는 것에 익숙했던 나에게 굉장히 신선한 개념이었다. 뭔가를 하는데 아주 큰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고. 1시간을 해야 뭔가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30분이라도 해낸 나를 칭찬해주자, 뭐 이런 생각으로 '30분 단위의 삶'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왜 내 단위는 바뀌지 않을까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30분 단위로 생활하자고 마음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단위가 바뀌지 않았다. 30분만 해도 돼, 라고 스스로에게 아무리 얘기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자, 출발해볼까, 해도 그냥 주저앉기 일쑤였고, 공부를 한다고 가서 앉으면 30분 동안 부팅만 하다가 후회하며 돌아왔다. 그렇게 30분 운동, 30분 공부를 위한 계획들만 늘어나고, 그게 지켜지지 않아 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시간이 흘렀다. 한창 논문을 쓸 때였으니까, 2013년 겨울과 봄, 그 언저리였을 것이다.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그 30분 단위의 생활을 성공하기만 하면 내가 효율적인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이런 근거 없는 믿음과 함께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짝사랑은 성실함과 끈기, 꼼꼼함 등등 내게 없는 재능들을 탓하는 것으로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궁금해졌다. 왜 내 삶인데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지.
한동안의 짝사랑은 논문이 마무리되고, 취직을 하고, 다시 겨울이 되면서 끝났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짝사랑이 늘 그렇듯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특히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30분 단위의 삶을 생각했다. 다시 해보면 되지 않을까,하고. 하지만 시작되지는 않았다.
절약하느라 시작한 30분 PT가
의외의 깨달음을 주었다
올 여름이 시작되면서 30분 PT를 시작하게 되었다. 늘 지적받는 근육량 부족과 모든 현대인의 병 '일자목'을 해결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운동을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1시간 PT는 가격이 부담되어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상담을 갔을 때 제안받은 30분 PT는 반값이었고, 그 정도는 학원을 다닌다고 생각하고 투자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등록을 하고, 운동이 시작되었다.
30분 PT를 하면서 근육량이 늘었을까? 15회 레슨을 지나가고 있는 지금 아주 조금 늘었다. 일자목은? 만성적으로 아프던 목이 아프지 않게 되었고, 어깨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1대1로 코치를 받기 때문에 내가 근육을 어떻게 쓰는지, 내게 없는 근육이 뭔지를 알게 되면서 운동하는 재미도 붙었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지만 내가 느끼고 설명할 수 있는 변화들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변화는 따로 있다. 운동을 시작할 때 예상하지 못한 것, 바로 30분 단위로 생활하는 것이 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서 30분을 움직이는 것이 그 다음날 얼마나 큰 근육통을 가져다 주는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게 하는지, 30분씩 일주일에 세 번 운동한다는 것이 삶에 어떤 규칙을 가져다 주는지 경험하게 되었다.
이걸 경험하고 나서야 30분을 쓴다는 게 어떤 것인지 감이 왔다. 그리고 누가 시키거나 내가 마음 먹지 않았는데도 30분 단위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30분 단위로 생활한다는 건
하루는 퇴근하고 밤에 하는 책모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앉아있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밖에 나가서 좀 뛰고 싶어졌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샤워할 시간까지 합쳐서 1시간이 좀 안되었는데, ‘집 앞 골목을 2km만 뛰어야지.’ 라는 생각을 했다. 빨리 뛰면 13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이전에는 너무 짧아서, 그 짧은 운동을 위해 앞뒤로 투입해야 하는 시간이 많아서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13분을 달린다는 것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0분 단위로 생활한다는 것은, 칼같이 30분을 쓴다는 것이 아니라 1시간 보다 더 작은 단위의 시간이 가지는 가치를 알고 그걸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어떤 것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면 그걸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나는 운동을 하면서 생활로 조금씩 경험하고 있다. 많은 시간이 확보되어야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을 작은 단위로 조금씩 해나가는 재미가 있다. 30분 밖에 못 볼 걸 뭐하러 만나, 라는 말 대신 30분만 딱 만나고 헤어지자, 라는 말에 담긴 애틋함 같은 것도, 그리고 시간은 많은 경우에 절대적 단위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어버렸달까.
내가 재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데 재능이 없었던 것이라기 보다는(이건 아직 명징하게 증명되지 않았으므로…음?) 30분이 가지는 가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30분 단위로 생활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지금 내가 게으르니까, 나는 이걸 해야만 하니까, 나는 시간을 잘 쓰고 싶으니까, 라는 다짐이나 욕망 보다는 그게 진짜 의미하는 것이 뭔지 아는 게 더 힘이 세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가치를 알기 때문에 움직이기 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피하느라 스스로를 다그치며 하게 되는 움직임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건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가 같이 가지고 있는 경험은 아닐까,하고. 좋은 걸 경험하고, 가치를 알아서 그 동력으로 삶을 꾸려가기 보다는 저렇게 되고 싶지는 않아서, 이건 하면 안돼서, 이렇게 살아가지 말라고 배워서 해야 하는 행동들이 더 많지는 않은지. 모든 경우에 필요한 모든 경험을 하고 나서야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경험이 있어야 내가 해보지 않은 경험들을 상상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 주어지는데 그런 근육을 만들 시간도 없이 그냥 뭐든 시작해야 했던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래서 오지 않는 결과에 대한 몰입이 심해지고, 짝사랑 그 자체에 압도되는 삶이 지속되는 것이다. 짝사랑은 '사랑'이라 지속할 동력이 있지만, '짝'이라는 것이 주는 무기력함이 있지 않나.
30분 운동에 재미를 붙인 거 가지고 이야기가 너무 거국적으로 흘러가지만, 어쨌든 이게 요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30분의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갑자기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고. 아주 작은 변화가 내게 의미하는 것들을 제대로 알고 이걸 동력으로 내 삶을 좀 더 활기있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오늘도
퇴근 후에 한강 달리기를 할 계획이다. 4km를 달리면 30분이 조금 안되는 속도로.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