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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l 06. 2018

누구도 아닌, 지금, 여기의 우리

[외롭지 않은 종강파티] 20대 기획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외롭지 않은 기획자학교 2기의 한 달 늦은 종강파티 2부에서는 기획자들의 일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2부는 20대 기획자들의 대담, '누구도 아닌, 지금, 여기의 우리'로 시작되었습니다. 꼭 매니저가 되어야 하고, 대표기획자가 되어야 하고, 더 능력있는 누구가 되기 위해 준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온전한 자신으로서의 일 이야기, 기획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만 할 수 있어서 더 의미있고 특별한 이야기, 함께 만나보세요.




대담에 참여한 20대 기획자들. 왼쪽부터 김지민(앤더보네르), 권사랑(보슈), 윤채영(페미니스트 정치기획자), 이주하(획기적인 여자들). ©외롭지않은기획자학교


주하 : 안녕하세요? 20대 기획자 대담 ‘누구도 아닌 지금, 여기의 우리' 진행을 맡은 이주하입니다. <외롭지 않은 기획자학교> 1기 기획자이기도 하고, 여성 기획자들의 액팅 커뮤니티 '획기적인 여자들'의 대표를 맡고 있어요. 이 시간을 통해 20대 기획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새로운 일의 판이 어떤 모습인지를 함께 보고, 그 판 안에서 하고 있는 각자의 고민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또 이 고민을 해결해나가기 위한 우리 나름의 방법들에 대해서도 함께 얘기하려고 합니다. 함께 이야기 나눌 20대 기획자들을 모셨습니다. 각자 자기 소개를 부탁드려요.


채영 : 안녕하세요.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최근엔 ‘페미니스트 정치기획자’라는 이름을 붙였고, 앞으로 한국에 페미니스트 정치의 한 획을 그을 채영이라고 합니다. 제가 최근에 한 기획으로는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던 <야, 결국 은하선 온대>와 녹색당 신지예 서울시장후보 캠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가 있습니다.


사랑 저는 대전에서 잡지를 만드는 BOSHU 팀의 대표 권사랑입니다. BOSHU는 2014년에 창간되어 지금까지 총 아홉 권의 잡지를 만들었는데요.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자신과 주변을 위해’ 만드는 잡지입니다. 매 호 다른 멤버가 들어오거나 개인들이 변화, 성장하면서 보슈의 모습도 크게 변화하는데요. 지금까지 저희가 집중해온 주제가 있다면 페미니즘, 지역에서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 성소수자, 기본소득 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귀여운 디자인에 속아 잡지를 펼치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내용이 잔뜩 들어있는 거죠. 


저는 보슈 활동을 사회적인 무브먼트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예민한 문제들을 저희만의 방식으로 잘 전개해나는 중이에요. 와 예쁘다~ 하고 폈더니 뭔가 기분 나쁘고, 근데 그래도 재밌네, 라고 생각하게 되는 잡지요. 정치적인 걸 멋지게 표현하는 것에 대한 멤버들의 욕심과 합의점이 있고, 그걸 위해서 다같이 노력하고 있어요. 잡지를 만들면서 오프라인으로는 여성주의에 집중해서, 여성 축구팀, 여성 주짓수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 글쓰기 강좌를 진행할 예정이기도 해요.


지민 : 저는 ‘앤더보네르’, 그리고 행복이라는 뜻을 가진 스테이셔너리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구요, <획기적인여자들>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주제로 한 잡지를 기획하면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게 된 김지민입니다. 앤더보네르 브랜드를 살짝 맛보기로 보여드리자면, ‘나의 작은행복 다이어리’라는 문구를 필두로 행복을 주제로한 다양한 이야기를 문구에 담으려고 노력중이에요. 디자인을 아는 기획자로 기능하고자하는 사람입니다.


내 욕망과 선호, 깨달음이
내 일을 만든다


주하 : 그럼 본격적으로, 각자가 시도하고 있는 기획이나 만들어 가고 있는 판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요즘 주위에 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 모이신 분들도 그렇고 대담자로 서신 세 분의 기획자들도 각자의 방식과 언어로 판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민님은 앤더보네르를 운영하고 계신데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다이어리의 주제를 왜 행복으로 삼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지민 : 다들 자신의 앞날에 대해 맹렬하게 고민은 하지만, 고민에서 경제적인 이유가 빠지고 남은 자기 자신이 굉장히 허무하다고 하더라구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단순하게 그냥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정말 깊이 생각해야 꺼낼 수 있는 상태. 예전의 저의 상태이기도 했고, 또 제 주변의 사람들이기도 했어요. 그 원인에 대해 생각을 해보다가 '나'에 대해 표현하는 걸 힘들어하는 우리는 스스로 감정에 대해서 굉장히 제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20대는 고민을 하는 시기라지만, 고민하는 당사자인 저는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힘들어하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해서 절대 해결되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고민은 반복되고. 그래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어요. 행복해서 쓰는 게 아니라 이거면 견딜 수 있겠다는 것들을 모으기 위해서.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시작한 프로젝트였어요. 그렇게 내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하다 보니 자기 수용범위가 넓어졌어요. 그래서 제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일을 벌이다보니 일이 커져버렸어요. 저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가치를 쫓아가는데에 있어서는 옆에 계신 두 분보다는 조금 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요, 제가 하고 있는 기획들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하다보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주하 : 사랑님이 보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지금의 보슈팀 모습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사랑 : 저는 2016년 봄부터 보슈에 합류했어요. 그때 당시에 제가 다니던 학교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인터뷰해 전달하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 중이었는데, 그때는 그냥 막연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강했던 때였거든요. 같은 맥락에서 잡지를 만들고 있었던 보슈 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합류 후 6호를 만들 때 강남역 사건이 있었고, 민감한 상황에서 페미니즘 이슈를 대기획으로 다루었어요. 그때 제 욕망이 좀 더 구체화됐던 것 같아요. ‘아, 나는 이렇게 정치적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구나, 설득하고 싶었구나’라는 걸 알게됐어요. 


BOSHU를 하던 중 2017년에 1년 동안 미국에서 인턴을 하고 돌아왔어요. 제가 돌아오니까 이전엔 학교를 다니던 멤버들이 다들 졸업을 하고 꽤 시간이 지난 상태가 되어있는 거예요. 사회적으로는 취업시장에 뛰어들었어야 할 시기였던 거죠. 취업을 해야하긴 하는데...지금까지 보슈로 해왔던 것들, 쌓아온 것들, 앞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리고 저는 어디를 가도 내가 이런 동료들은 만나지 못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활동 내내 해왔기도 했고요. 그 시기에 '내가 원하는 일/직업은 무엇인가'라는 워크샵을 멤버들과 함께 했었는데, 멤버들이 원하는 일/직업의 형태가 서로 조금씩 비슷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아 우리는 앞으로도 지금껏 해온 보슈 활동 같은 일을 하고 싶구나. 그러면 여기서 돈만 벌면 되겠다. 그러면 우리 이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보자.’라고 생각했고, 상황과 뜻이 맞았던 저와 편집장, 디자이너 이 세명이 올해 초부터 보슈를 업으로 삼고 전념하기 시작했어요. 



주하 : 아마 오늘 채영님의 이야기를 통해 ‘페미니스트 정치기획자’라는 단어을 처음 접해보신 분들도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소 생소하기도 한 ‘페미니스트 정치기획자’라는 정체성으로 채영님이 첫 번째로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채영 :  우선, ‘페미니스트 정치’를 뭐라고 정의하느냐 라는 질문을 했어요.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여성 정치인을 서포트하는 것? 페미니즘이 주류화된 의제로 다뤄지는 지방의회를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이 될 수 있겠죠. 그리고 ‘기획자’는 무얼 하느냐는 질문도. 저는 한 인터뷰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아주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갈 수록 더 똑똑해지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앞으로 나아가는 걸 보고있어요. 저는 정말 이 흐름을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는데 이 사회와 정치권은 여기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잖아요. 지금 현실이 이 수준이라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가 그걸 뛰어넘을 서사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라고 답변했는데요, 이것이 기획의 원칙이었습니다. 


이 원칙의 연장선에서 <야, 결국 은하선 온대>를 기획했어요. “세상/여성들이 이미 변했다”는 전복을 어떻게 센스있고 대담하게 알릴까(=딜리버리할까)가 저의 욕망이었고, 같은 지점에서 ‘어떻게 제목만으로 (서강대학교에서 은하선씨 강연 초청을 취소한 사태를) 사태를 뒤집을까?’라는 정치적 질문을 던진 거죠. 


좋아서 한 일,
제대로 하고 있을까?


주하 : 대화를 하다보니,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그동안 우리가 늘상 당연하게 여겨왔던 어떤 직업 (기업에 취직, 공무원 등)과는 좀 다른 형태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앞서서 같은 방식의 일을 해 나간 선배님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고민의 지점도 많을 것 같은데요, 각자 어떤 고민이 있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사랑님이 보슈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일이라는 것이 언제나 즐거울 수만은 없지만, 대부분 의미있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점이나 고민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사랑 : ‘과연 보슈를 업으로 삼기로 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을까’에 대한 저의 답은 '아직 모르겠어요' 예요. 저는 저희가 되게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기획자학교 원칙 중 하나가 겸양 금지라 여자답게 자신감 부려보는 건데요, 지역이라는 제한에도 불구하고 좋은 잡지, 좋은 행사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희는 이 일을 시작할 때와 같은 (푼)돈을 받고 있거든요. 일 하는 양은 점점 많아지고, 인지도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데, 월급은 똑같아요. 월급을 제가 정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편집장이랑 싸우고 있어요. 왜 못 올려주냐고 편집장이 따지면 지금 이것도 많이 주는 거다, 라고 하고 제가 이깁니다. 지금도 객석에서 5만원 올려달라고 소리치고 있는데요, 안 됩니다. 돈이 없어요.


이렇게 좋은 동료, 아이디어와 컨텐츠 제작 능력, 나름대로의 지지 기반이 있는데도 이걸 경제적인 것으로 변환할 수 있는 노하우가 부족하다는 고민에 자주 부딪혀요. 물론 홍보 역량이 부족하다든지, 사람들이 듣기 싫은 얘기를 하기 때문에 흔쾌히 경제적인 지원과 연결될 수 없는 상황이라든지, 뭐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희가 '몰라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는 이 일이 너무 좋고, 지역에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좋은 걸 만들어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제 편집장이랑 그만 싸우고 싶은데…이 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으려면 저희는 어떤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까 궁금하고, 여기 계신 분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주하 : 확실히 좋아하는 일을 동시에 하는 일, 해야하는 일, 그리고 돈 버는 일로까지 연결 짓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저도 정말 매일 같이 느끼고 있지만 사실 아직도 그 답을 잘 모르겠어요. 본인의 브랜드를 만드신 지민님도 비슷한 고민의 지점이 있지 않을까 해요. 어떠세요? 


지민 : 맞아요, 만족스러운 고정 수익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이르는 것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고민의 한 부분이죠. 이 부분에 대한 제 나름의 타협점은 어쨌든 스스로 택한 길이기 때문에 내가 실질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들을 쌓아가는 단계로 활용하자는 거예요. 저의 또 다른 맥락의 고민이 있는데, 고립이 되고싶지 않다는 것이 1번이고,  나의 일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하고 싶다가 2번이에요. 1인 브랜드를 운영하시는 분들은 다들 그렇겠지만 디자인작업의 경우 혼자 굉장한 집중을 통해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고립되려면 한도 끝도 없이 고립될 수 있거든요. 최근 찾은 해결책은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 자극을 주려해요.  나만의 기획 작업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함께 틀 안에서 작업하기도 하고 새로운 배움도 계속해 나가려고 하고요. 근데 그러다 보니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분명 한정되어있는데 나의 시간과 업무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더라구요. 이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면, 혹시 어떤것들이 있을지 찾고싶어요.


레퍼런스가 없지만,
감이 좋은 우리들


주하 : 사실 어떤 레퍼런스가 부족하거나 없던 길을 만들어나간다는 부분에서는 채영님도 굉장히 할 말이 많으실 것 같아요. 사실 사전 연사 미팅에서 채영님께서 “나는 레퍼런스가 없지만 감이 있다"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이야기와 함께 본인의 해결 방법에 대해 말씀을 들어보고 싶어요. 


채영 : 네 저는 감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맥락이 있는 얘기에요, 이게. 제가 정치외교학 학생인데 주위 남자사람 친구들은 인생 계획이 다 있는 거예요. 지금 행시를 준비해서, 몇 년간 무슨 일을 하고, 이 자리까지 오른 다음에는 국회로 자리를 옮기고...너무 분명한 계획들이 있어요. 근데 걔네가 그렇게 인생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건 주위에 그런 남성 롤모델이 있기 때문이에요. 근데 그게 저한텐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그 때 당시에 대학원에 갈 생각이 있었는데, 정외과 교수님 중 누구도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사회문제인 페미니즘에 크게 관심이 없으셨고, 저를 키워줄 의지도 없으셨어요. 그래서 노력해보겠다고 여성단체 활동도 해봤고, 여성 국회의원 사무실에서도 잠깐 인턴을 해봤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롤모델을 찾을 수 없었고 성에 차는 레퍼런스를 찾을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2016년에 고민이 많았어요. 나는 타협할 수 있을까? 나는 페미니즘 주제를 다루지 않고도 정치(기존의 레퍼런스들)를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죠. 오히려 그 점을 분명히 하고 나니 주체적인 기획을 하게 되었고, 좋은 조직도 만날 수 있었어요. 사실 “감이 있다”는 얘기는 녹색당 서울시장캠프를 하면서 많이 긍정적 피드백을 받아서 확신할 수 있었던 거예요. 잘못하고 있을 때는 정확히 또 피드백을 해주고. 적절하고 좋은 피드백이 오가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하 : ‘감이 있다’와 좋은 피드백이 오가는 환경은 어떤 연결점이 있을까요?


채영 : 제가 그런 연구를 기사에서 읽었어요. 미국에서 조사한 것이었는데, 여성 정치인들이 남성 정치인보다 less confident하다는. 그런데 이것이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이나 실제 경쟁에서의 열등함을 감정으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커리어를 이어가는 동안 ‘긍정적’ 피드백을 훨씬 덜 받은 결과라고 하더라구요. 남성들은 끊임없이 더 큰 자리에 도전하라는 응원을 받고,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남성 선배의 길을 따라 걷는데 여성들은 방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고 승진이나 더 도전적인 일을 하도록 격려/피드백 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사실 레퍼런스 대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재밌다고 생각하는 감을 믿고 일을 해야 한다고 할 때, 내 좋은 감을 더욱 믿고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주변의 좋은 피드백인 것 같아요. 그게 무조건적인 칭찬만 얘기하는 건 아니고, 감을 믿고 가는 길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하는 조언도 중요하고요. <지정생존자>라는 드라마에서 스스로를 정치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여성 비서관에게 그를 오래 지켜본 동료가 ‘당신은 대통령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얘기해주는 장면이 나와요. 이런 피드백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 장면 보면서 ‘내가 아는 많은 여성들이 저 얘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데.’라는 생각도 했어요. 요즘 저는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감이 좋다. 더 도전해도 좋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획자,
지금 여기서 최선의 방식으로


주하 : 대화를 들어보니 이런 고민도 떠오르는데요, 새로운 일의 판을 마주하고 있는만큼 각자 경험하는 조직문화 역시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일하고, 단기이든 장기이든 ‘조직문화’를 경험하게 되니까요. 아마 평범한 일들을 하시지 않는 만큼, 조직을 경험하는 방식과 그와 관련된 고민도 다를 것 같아요.

지민님께 먼저 여쭤보자면, 먼저 지민님은 아무래도 혼자서 작업하실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조직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어떤 고민이나 어려움이 있으신 지 여쭤보고 싶어요. 또한 그 부분을 어떻게 채워나가고 있는지도요. 


지민 : 전 운이 좋게도 여태껏 만나왔던 상사 분들 모두 다 일을 정말 잘하는 여성분들이었어요. 저 나름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분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큰 힘이 되었고 지금도 계속 상담 요청을 하면서 귀찮게 하고 있어요. 이러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현재의 저는 조직에서 벗어나 있지만 훗날 조직에서 일을 하는 것 또한 배제하고 있지는 않아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좋은 선배를 만나는 경험이 얼마나 한 사람의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실감해요. 그래서 같은 필드나 다양한 필드에서 일 잘하는 여성들을 만나보고 싶은데, 혼자 일하는 지금은 그 만남이 쉽지 않아서 어떤 루트가 있는지 매번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획기적인 여자들을 만나게 된 것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능력을 가진 친구들이 모여서 새로운 기획을 하고 있고, 나름의 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조직이 주는 장점을 획기적인 여자들을 통해 얻고 있어요. 



주하 : 사랑님의 경우, 아무래도 보슈는 ‘팀’으로 활동하다 보니까 명확한 지지 집단이 있는 분일 것 같아요. 비슷한 부분에 불편함을 느끼고, 또 비슷한 목소리로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니까요.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든든한 일이지만, 분명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조직문화를 만드시면서 새로운 고민거리도 있을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해 혹시 여쭤봐도 될까요?


사랑 : 맞아요. 지금 일곱명의 여자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는데요. 싫어하는 게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일하면서 답답한 부분이  생기면 끝나고 술 한잔 하면서 같이 욕하고. 같이 밥먹고, 같이 놀러 가요. 아무리 힘들어도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게 이 동료들에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조직 내부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저희는 기존의 기업이나 조직들의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문화를 탈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는데요. 상사-부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동료인데 더 참여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좀 더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어요. 더 많이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되고,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되다보니 더 많은 의사결정권을 갖게 되고... 정보 격차에 따라 점점 보이지 않는 형태의 권력이 다시 생긴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에 반해 덜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외된다고 느낄 때도 있고. 하지만 굉장히 많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서류로 기획안을 정리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정보를 다 나누거나 혹은 참여하지 못한 사람의 의견을 전부 물어보기에는 효율성이 떨어지구요. 기존의 기업 같은 형태라면 문제시되지 않을 부분들에서 고민이 되는 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우리만의 조직 문화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와중 충돌하는 지점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주하 : 지민님은 계속 소개해주신 앤더보네르 프로젝트 말고도 현재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앤더보네르에게 요즘 좋은 소식이 있어 스테이셔너리 브랜드로서 성장점을 맞이한 시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굳이 이것만을 공을 들여서 키우지 않고 여러 프로젝트에 에너지를 투자하는 이유는 뭔가요? 


지민 : 감사하게도 다양한 분야에서 컨택이 들어오기도 하고 있어서 브랜드가 성장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고 있어요, 요즘. 그렇지만 이 브랜드에만 목을 메고싶지는 않은게 전 궁극적으로 제 커리어의 끝이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기획은 다양한 수단을 이용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스테이셔너리이기 때문에 이것에 일단 베이스를 두고 있는거구요. 이 작업을 통해서 또 어디론가, 누구와 연결되고 만나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걸 소홀히 하는게 아니라 이걸 바탕으로 또 다른걸 꿈꿔야하는 것 같아요. 배워야하구요. 전 예전에 일했던 문화교류나 행사기획도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에 계속 접점을 만들어 가면서 해나가고 싶어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다양한 기능을 하는 기획자가 제 최종 꿈이에요.인정받는것 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되고 싶어요. 믿고 맡길 수 있는. 


변화한 여성들의 얼굴을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의 힘


주하 : 보슈는 기본적으로 잡지를 만들고 있는 단체기는 하지만, 저는 보슈에서 벌이는 여러 활동을 통해 보슈팀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미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슈가 하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과, 그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사랑 : FC우먼스플레잉 팀원이 나에게는 더 이상 아무 힘도 남아있지 않다- 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봤었어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에 너무 괴롭다고. 어디서 힘을 얻고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개개인만 소진되어 없어지는 건 아닐까, 라고요. 물론 저도 페미니스트로 살기 괴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그래도 느리지만 변할 것이다, 하는 기대를 갖고 살고 있는데. 이 차이는 뭘까. ‘계속 해나갈 수 있는 힘’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했어요. 저는 그게 일상에서 변한 여성들의 얼굴을 얼마나 자주 마주치는지에 달린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보슈 사람들과 보슈를 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변한 사람들이거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친구는 남성 중심적인 학교에서 지내고 있고, 앞으로 일을 하게되더라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 떨어진 점으로 놓여진 이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외롭고 지치는 사람에게 어떻게 용기가 될 수 있을까 고민도 했고요. 여성들은 더 많이 연결되어야 하고, 서로의 존재를 더 자주 확인해야 한다, 라고 생각했어요. 이 점들을 잇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제 숙제인 것 같아요. 학교 안에 페미니즘 동아리를 만드는 일, FC우먼스플레잉과 오버셋 주짓수팀을 운영하는 일, 페미니즘 글쓰기 강좌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페미니즘 글쓰기 소모임을 하는 것, 인터뷰를 하며 만난 고등학생 페미니스트들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 등. 반 박자 늦은 지역에서는 페미니스트로 살기 더 힘들다는 걸 너무 잘 알고 그 고통을 덜기 위해 더 많은 여성들을 연결짓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미래를 상상하려면
동료가 필요하다


주하 : 채영님에게 ‘페미니스트 정치 기획자’로서의 앞으로의 행보는 어떤 것인가요? 그리고 채영님이 정치 기획자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채영 : 사실 요즘은 좀 쉬고 있어요. 선거캠페인이라는 게, 정말 힘든 거더라구요. 다만, 2020년 총선이 다가오는데, (이제 1년 10개월밖에 안 남았거든요? 여러분,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 때 뭘 해볼 수 있을까. 그런 작당을 모의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행보는,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페미니스트 정치기획자로 늙어갈 것이 너무 기대돼요, 사실. “30대에 나는 얼마나 능력있을까”, “40대에 나의 동료가 얼마나 많을까”, “그후엔 원로 여성 정치인이 되어있겠지?” 이런 상상들. 그런 저에게  지금 필요한 건, "너, 나의 동료가 되어라!" 입니다. 같이 할 동료들이 필요해요. 이 주제로 서로 수다라도 떨 수 있는 동료들을 제가 애타게 구하고 있습니다. 뒤에 게시판에 제 기획안 아래에 메일(bethegreen.cy@gmail.com)이 붙어있는데, 거기로 연락을 주셔도 좋고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제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정당무관. 누구든 환영해요. 페미니스트 정치를 함께 할 사람이라면.


주하 : 20대 기획자들이 꼭 어디로 가야하고, 또 완전한 무엇이 되기 위한 과정 중에만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 자기 자리에서 마주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오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시간이 짧아서 고민만 늘어놓고, 수습하지 못하고 끝나는 것 같지만, 저희는 이 자리가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미디어에서 보도하는 20대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자기 삶과 일을 꾸려가려고 노력하는 20대의 이야기를 확산시키고 또 서로 연결되도록 하기 위해 <외롭지 않은 기획자학교>와 <획기적인 여자들>이 머리를 모아보겠습니다. 오늘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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