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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Nov 08. 2024

역사 속 섹스와 매춘에 대한 이야기들, 세 번째

#03  고대 그리스의 성(性) 문화


지난번 29금 이야기에 이어 세 번째 이야기를 해봅니다.


고대 그리스의 성(性) 문화

     - 에로스와 헤타이라, 그리스의 사랑과 사회


고대 그리스에서는 성 문화가 육체적 관계와 단순한 개인의 즐거움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교류와 철학적 사유를 반영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고, 이를 통해 그리스 사회는 성과 사랑을 다면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통해 개인의 발전과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려 했다.  성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면서도, 각 계층과 역할에 따라 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복합적인 사회였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사랑과 성(性)을 상징하는 에로스와 아프로디테 같은 신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성과 사랑을 신성한 영역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리스에서 성은 단순한 육체적 관계를 넘어 철학적 대화와 예술의 한 부분으로 다뤄지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통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사회적 규범을 반영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제우스와 그의 연인 가니메데


에로스, 사랑과 성(性)의 철학

고대 그리스에서 사랑은 신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사랑과 성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사회와 철학의 한 주제였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이 단순한 육체적 관계에서 시작해, 정신적 유대와 아름다움의 절대적 개념에 이르는 단계적 발전을 거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대화록 『향연』에서는 사랑을 다루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에로스’는 단순히 성적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고양시키고 진리를 찾는 구도자적인 사랑으로서 묘사된다.


사랑과 욕망을 통해 영원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인류의 탐구를 표현한 것으로 에로스가 단순한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 철학적 사랑으로 승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육체와 정신이 결합하는 성스러운 행위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 철학은 이후 그리스 사회에서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사랑의 개념을 심어 주었으며, 이러한 사상이 고대 그리스의 성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헤타이라(hetaira), 고급 매춘부이자 지적 동반자

고대 그리스에서는 '헤타이라'로 불리는 고급 매춘부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은 단순한 성적 파트너를 넘어선 예술과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성들로 여겨졌다. 이들은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고 상류층의 연회에서 시를 읊고 담론을 즐기며 연회에 참석한 남성들의 동반자 역할을 했는데, 조선의 일패 기생이나 유럽의 코르티잔과 유사한 사회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코린토스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인 경우가 많았는데, 헤타이라는 독립적인 신분을 가지고 예술과 지식을 통해 남성들과 교류했으며, 특히 아테네에서는 헤타이라들이 사회적 행사나 대화의 장에 초대되어 정치와 철학적 논의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는 성이 단순히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와 지적 교류의 한 형태로서 인정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헤타이라 중 한 명인 아스파시아(Ἀσπασία / Aspasia)는 아테네의 유명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동거했으며, 지적인 능력으로 당대 철학자들과 교류한 바 있다. 그녀는 밀레투스 출신으로 악시오코스라는 인물의 딸이었으며, 아테네로 와서 유명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정부가 되었던 것이다.


헨리 홀리데이의 아스파시아 유화


아스파시아는 아름다운 용모와 출중한 언변, 명민함과 지식을 갖춘 재색겸비의 여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에서 교육과 철학적 논의를 주도한 헤타이라였다. 이러한 명민함으로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아테네의 유력 인사들을 사로잡았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 당대의 이름 높은 지성인들과 교류했다. 소크라테스는 아스파시아를 '변증법과 수사학에 있어 최고의 스승'이라고 칭송할 정도였고 심지어 페리클레스의 웅변 원고를 써 주는 등 그의 정치 활동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단순히 페리클레스의 애인, 내연녀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배우자이자 정치적 파트너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Aspasia의 포옹에서 Alcibiades를 끌고있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에게 수사학을 가르친 철학자 아스파시아


또 다른 예로는 프리네(Phryne)가 있다. 그녀는 그리스의 유명한 헤타이라로, 뛰어난 미모와 매력으로 그리스 전역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한편 프리네는 법정에서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재판 중 옷을 벗고 자신의 몸을 드러내어 그리스 신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를 증명했고, 결국 무죄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생명의 근원인 신의 성기와 생명의 자궁인 바다로부터 잉태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인간의 땅에 여신의 품위를 지닌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자신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소식에 질투로 얼굴이 벌게진 아프로디테는 날이 밝자 서둘러 그리스 크니도스 섬으로 향했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신전 한가운데, 이제 막 목욕을 하려고 옷을 벗은 듯 나신의 조각상이 새벽빛을 머금고 유혹하듯 서 있었다.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이 마치 실제 살아있는 자신인 양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이 조각상을 만든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를 찾았다.


“저 것이 누구냐? 너는 어디서 나의 나체를 훔쳐보았는가?”

프락시텔레스는 “저 조각상은 바로 여신님이옵고 아레오파고스에서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여신상에 모델이 된 그리스 여인이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프리네(Phryne) 였다.


배심원 앞에 선 프리네  /. 프리네 조각상


그녀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아테네에 살았던 최고의 헤타이라였다. 프리네는 많은 기부와 뛰어난 지성으로 사회에 참여했으며, 문학적, 음악적 재능 못지않게 아프로디테의 현신이라고 일컬을 정도의 탁월한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저명한 정치가, 철학가, 예술가, 장군들이 다투어 그녀에게 사랑을 구했지만 웅장한 기개와 빛나는 논리, 섬세한 감각을 가진 자만이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저명한 정치인이나 철학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수준 높은 교양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남성 위주의 토론이나 철학적 대화에 거침없이 뛰어들었는데, 주도적인 그녀의 모습은 많은 이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그리스의 고관대작인 에우티아스 역시 애가 닳았는데 보내는 꽃들은 번번이 되돌아왔고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졸렬했던 에우티아스는 그런 그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결국 그녀를 모함하게 된다.


‘엘레우시스 신비의식’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종교행사 중 ‘포세이돈의 축제’가 한창이었다. 프리네는 자신의 풍성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발가벗은 몸으로 아프로디테처럼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행했다. 이 광경을 바라본 에우티아스는 곧 그녀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한다. 신화 속 아름다운 여신을 더러운 창녀와 같은 취급을 받게 했다는 이유였다.  


Semiradski G.l (1843-1902) - 법정앞에선 프리네


당시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이르는 중죄였다.  그리스의 법정인 아레오파고스에서 그녀의 변론자이자 정부(情夫)였던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웅변가 히피리데스(Hypereides)는 어떠한 논리나 이성적인 말로도 배심원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시 신성모독은 너무나 무거운 죄였기에 아무리 유능한 변호사라도 대세를 뒤집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열변을 토하던 히피리데스에게 드디어 최후의 변론 기회가 왔다. 사형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는 마지막 변론에서 그녀에게 천을 씌워 법정에 서게 했다. 그리고 동상의 제막식을 하듯 천을 단숨에 벗겼다.


 “신의 의지가 빚어낸 아름다움을 인간이 파괴할 수 있을까요?”


이슬에 젖은 한 떨기 백합 같은 프리네의 알몸을 본 순간, 경탄과 감탄의 눈길과 신음소리가 법정을 전율케 했다고 한다.  이에 배심원들은 신이 내린 아름다움에 인간의 법은 죄를 물을 수 없다는 판결과 함께 무죄를 선고한다.  측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만 하고, 완벽한 그녀 앞에서 고작 인간이 만들어낸 법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이 순간을 포착한 것이 프랑스의 오리엔탈리즘 화가 장 레옹 제롬(Jean-Leon Gerome 1824~1904)의 ‘아레오파고스 앞의 프리네(Phryne before the Areopagus)’라는 작품이다. ‘아레스 신의 바위’라는 뜻을 가진 아레오파고스는 고대 아테네 정치 기구로 법정처럼 범죄자를 재판하는 기능도 했기에,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배심원 앞에 선 프리네’가 된다.


장 레옹 제롬의 ‘아레오파고스 앞의 프리네(Phryne before the Areopagus)’.함부르크 미술관


이러한 일화들은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헤타이라들이 성적인 역할만을 수행하는 단순한 매춘부가 아닌, 예술적 아름다움과 지적 교류의 중심에 있었으며 정치와 철학의 중요한 동반자로 여겨졌음을 잘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의 성 문화의 사회적 의미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성들이 모여 철학적, 정치적 논의를 나누는 심포지엄(연회, 고대 그리스어: συμπόσιον 심포지온)이 자주 열렸고, 이러한 자리에는 이처럼 헤타이라들이 초대되었다. 심포지엄에서는 정치와 철학적 대화가 오갔으며, 헤타이라는 지적 교류의 동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바로 대화의 촉진자이자 청중으로서 참여했으며 이는 그리스 사회에서 성과 사랑이 지적, 사회적 교류로 확장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스에서는 성과 사랑이 신성한 존재들과 함께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놓여 있었으며, 이를 통해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규정했다. 헤타이라와 같은 독특한 존재는 성을 단순한 욕망의 대상이 아닌, 사회적 위치와 지적 교류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특히 위에 든 아스파시아와 프리네의 사례는 헤타이라가 그리스 사회에서 단순한 매춘부가 아니라, 정치와 예술, 철학에 기여한 인물로 자리매김했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

여자와의 사랑은 번식이라는 본능에서 나오는 불순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번식이 불가능한 미소년과의 사랑이야말로 본능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다. - 플라톤
행복하여라, 나체로 운동을 한 후 집에 가서 아름다운 소년과 온종일 잠을 자는 사람이여
 - 메가라의 테오그니스


고대 그리스만큼 동성애를 대놓고 즐겼던 문명권은 전무후무하다. 중근세 일본이나 중동에서 와카슈도나 높으신 분들이 소년들을 대상으로 남색을 즐기는 경우는 있었지만 고대 그리스처럼 시민 구성원 대부분에게 퍼져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진 않았다. 반면 고대 그리스의 경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동성애가 일반적인 풍습에 가까웠는데, 일부 철학자들은 심지어 동성애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예찬할 정도였다.


히아킨토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폴론


그리스인들이 동성애를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는 증거가 그리스 로마 신화다. 제우스가 사랑한 미소년 가니메데, 아폴론이 사랑한 미소년 히아킨토스 등 신들조차도 동성애를 했을 정도로 당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보편적이었다. 신들 뿐만 아니라 영웅들도 동성 연인들이 많았다. 아킬레우스는 동성 연인 파트로클로스를 두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동성 연인들과 사랑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신화에까지 동성애 요소를 집어넣은 문명권은 그리스 문명이 유일하다.


당시 고대 그리스의 동성연애는 현대의 자유로운 동성연애와는 조금은 결이 다르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여성을 각 사회 분야에서 배제하는 것을 지향할 정도였다. 그래서 완벽한 사랑은 남성들끼리만 할 수 있는 거라 여겼고, 성적 접촉이 존재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육체적 욕망에만 탐닉하는 것은 좋게 보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는 단순한 연애가 아니라 일인전승의 형태였으며, 성인들이 소년들을 교육시키며 사회적 진출을 곁에서 도와주는 스승-제자의 관계이자 후견인의 관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동성 간의 정신적인 사랑을 더 중요시했다.


동성애를 묘사한 도자기 / 이탈리아 식민도시 파에스툼에서 발견된 무덤 벽화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는 이처럼 정신적인 사랑(플라토닉 러브)을 지향했지만, 여기에는 육체적인 사랑이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미소년 가니메데가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서 옷 사이로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자, 제우스가 그 뽀얀 살결을 보고 반해서 그를 납치했다는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와 육욕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다만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육체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도 절제가 중요시되었다. 항문 성교보다는 허벅지 성교가 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항문성교를 행하면 당하는 대상이 '지나치게 여성스러워질까 봐'였다.  간혹 항문 성교를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는데, 이 경우 여성의 역할을 한 사람을  '키나이도스'라고 여성스러운 멸칭으로 부르면서 놀렸다고 한다.


펠라치오 역시 항문성교나 다를 바 없이 지나치게 경망스럽고 음란한 행위로 보았다. 성기가 작은 사람이나 음모가 없는 사람을 이상적으로 여겼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제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야만인으로 여겨졌는데, 남성의 성기가 크거나 음모가 있으면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원숭이 같은 인간일 거라고 여겼다. 또한 음모가 있는 것도 짐승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음모가 없거나 음모를 제모한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동성애는 소년애다. 수염이 나지 않은 뽀송뽀송한 사춘기 소년과 나이 든 성인 남성 사이에서의 동성 관계가 주류였는데, 이 관계를 고대 그리스어로 '페데라스티아(παιδερᾰστίᾱ)'라고 부른다.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페데라스티아를 사회적 덕목으로 여길 정도로 당연한 풍습들 중 하나로 여겼다. 어린 미소년을 '에로메노스(ἐρώμενος)'라고 불렀고 나이 든 성인을 '에라스테스(ἐραστής)'라고 불렀는데, 에라스테스는 에로메노스가 수염이 다 자라 성인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에로메노스를 1:1로 교육하고 후원해 줄 책임이 있었다.


에라스테스는 자신의 사회경험과 인맥, 그리고 필수적인 소양들과 품위를 가르쳐줬고 에로메노스는 그 대가로 에라스테스의 연인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소년애가 단순한 육체적 욕망관계가 아니라 사회진출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에로메노스가 밖에서 사고를 치면 에라스테스가 이를 책임지는 경우도 종종 벌어졌다. 일종의 보호자 역할과 스승 역할을 동시에 했던 셈이다.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 - 그리스의 동성애


이들 간에는 육체적인 성관계 행위도 이루어졌는데, 다만 자발적인 관계가 아니라 돈을 받고 몸을 파는 매춘 행위는 오히려 싫어했다고 한다. 이는 이익을 위해서 제 몸을 판 사람은 나중에 공공의 이익도 얼마든지 팔아넘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이 아무나 관계를 갖는 인간을 크게 경멸했다는 좋은 예시가 고대 아테네 출신의 티마르쿠스다. 티마르쿠스는 상당한 미소년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워낙에 성생활이 문란하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돈을 받고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아에스키네스에게 기소당했다. 차라리 남자 역할을 맡았으면 몰랐겠지만 더 큰 문제는 티마르쿠스가 여성 역할을 맡은 쪽이었다는 것. 아이스키네스는 티마르쿠스를 매춘부라고 힐난했고 결국 티마르쿠스는 민회 연설권과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아무에게나 다리를 벌리는 남성을 보고 '엉덩이가 넓은 자'라는 뜻의 '유로프로크토스(europroktos)'라고 조롱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랑관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게 대접받지 못했고, 따라서 여성과 나누는 사랑은 불완전하고 그저 번식을 위한 행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진짜 사랑은 완벽한 존재인 남성들끼리 이루어진다'라고 믿었기에 동성애는 일반적이었다. 동성애의 목적 자체가 '진정한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으니 당연히 육체적인 쾌락보다는 정신적인 성숙과 만족에 초점이 맞춰졌다. 아예 육체적 접촉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신적인 관계에 더 집중했다는 뜻이다.


도자기에 묘사된 동성애


고대 그리스인들은 동성애를 제 짝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미화했다. 플라톤 <향연>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려 신화가 하나 나오는데, 옛날 인간에겐 3종의 성별이 있었다. 남자와 남자가 붙어 있는 성, 여자와 여자가 붙어 있는 성, 남자와 여자가 붙어 있는 성. 그러나 제우스는 신의 제사에 점점 게을러지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 둘씩 붙어 있었던 것을 절반으로 잘라 현재와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각각 자기의 반쪽을 항상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스스로가 남성에게 끌리는 것을 제 잃어버린 반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욕구라고 믿었다. 결국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사랑이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바른 청년이 될 수 있는가?.... 앉을 때 가랑이가 보이지 않게 앉으며, 앉기 전 모래바닥을 쓸어 깨끗이 한 다음 엉덩이가 드러나지 않게 앉아야 한다. 아름다운 소년은 곧 선한 소년이다. 소년들은 사랑을 통해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본받고 닮으려 노력해야 한다. 경륜 있는 남자들이라면 소년의 미(美)에 이끌려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줄 것이다....
-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중에서.


동성연애가 일어나는 가장 흔한 장소는 목욕탕이나 체육관 '짐나시움(γυμνάσιον)'이었다. 신체의 노출이 많은 장소였으니 당연히 동성애가 많이 일어났다. 당시 고대 그리스에는 팡크라티온이나 레슬링처럼 살을 맞대고 하는 스포츠가 유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충동적으로 성관계를 맺거나 동성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도 체육관에서 이런 일들이 빈번하자 일부 도시에서는 체육관 출입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자유 시민이 체육관에서 노예를 강간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노예는 아예 체육관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였고, 40세 이상이면 어린 소년들이 있는 체육관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고대 스파르타의 짐나시움


군대에서 아예 동성 관계를 공식화해서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써먹기도 했다. 그 주인공이 테베의 신성부대로, 이 신성부대는 게이 커플 150쌍으로 총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인-사제 관계에 있었던 이들로만 편성된 까닭은 전장에서 연인이 죽지 않도록, 그리고 애인으로서 스승은 제자에게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또 제자는 스승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라는 심리를 이용해 엄청난 전투력 상승효과를 발휘하는 병력이었던 것이다. 실제 신성부대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고 단순한 우정이나 전우애를 초월하는 관계였던 덕에 함부로 후퇴하거나 동료를 버리는 일도 훨씬 드물었다고 한다. 신성부대는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대에게 대패하면서 사라진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에 크게 3단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 1단계가 가장 어리고 젊을 때 에로메노스로서의 사랑이고, 2단계가 어느 정도 성숙한 남성이 되었을 때 에라스테스로서의 사랑이며 마지막 3단계가 일반적인 여성과 가정생활을 누리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는 훗날 고대 로마 시대까지 전해져 내려간다. 하지만 정신적인 교류와 동등한 파트너십을 중시하던 고대 그리스와 달리 로마인들은 그저 육체적인 쾌락 그 자체에 더 집중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동성애는 조금 다르다. 로마에서는 동성 관계 자체는 용인되었지만 로마 시민이라면 남성의 역할만을 해야 했다. 로마식 동성애에서 여성의 역할은 비천한 노예들이 맡아야 했다. 오현제들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동성연애를 즐겼지만 별 말이 없었던 것과 달리, 또 다른 황제 엘라가발루스가 지탄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기행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다룹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킬레우스


여성 간의 동성애

고대 그리스에는 레즈비언도 있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특유의 여성 차별적인 문화 때문에 제대로 대접받지는 못했고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고 한다.


유명한 여류 시인 '사포'가 남긴 시에 여성 간 동성애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기는 한데 이마저도 대부분이 소실되어 이를 제외하면 거의 남아있는 사료가 없다. 연구 결과 사포가 소녀들에게 여자 간 동성애를 가르치려고 시도했던 걸로 보이지만, 워낙 남은 자료가 없는 터라 통일된 학설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에선 귀부인들이 미소녀들에게 관심을 표하고 고백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벽화로 고대 그리스 여성시인 사포의 초상화로 추정


사포는 서양 세계 최초의 여류 시인으로 꼽히는 인물로, 플라톤이 그녀를 보고 '열 번째 뮤즈'라고 찬사 했을 정도였다. 기원전 630년 경 레스보스 섬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고 3명의 오빠동생이 있었다. 안드로스 섬의 케르킬라스(Kerkylas)와 결혼했다고는 하는데, 이 이름이 '남자섬의 고추남'이라는 기괴한 뜻인걸 보면 남편이 누구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원전 600년 경 레스보스에서 추방당했고 시칠리아로 망명했고, 이후 잘생긴 젊은 뱃사공 파론을 연모하다가 레프카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불리는 사포


사포는 무려 10,000행이 넘는 시행들을 집필한 대작가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그녀의 작품들을 정리해 놓은 몇 권에 달하는 작품집이 있었고 고대 아테네에서도 그녀의 작품을 출간하는 등 인기도 많았다. 솔론이 그의 조카가 사포의 시를 흥얼거리는 걸 보고 자기도 그 시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하기도 했고, 심지어 레스보스 섬의 두 마을이 서로 사포의 출생지라고 주장하면서 다투기까지 했다고 한다. 여성 인권이 높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에서 이 정도였다는 건 당대 사포의 인기가 정말 엄청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의 시는 로마 시대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지만, 이후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해 잊혀졌다.


기독교 전파 이후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서서히 배척되다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성애를 공식 비난하며 남창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동성애자를 화형에 처할 것을 명하는 등 동성애자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정책들이 연이어 나오면서 종언을 맞았다.


기독교는 동성애 자체를 죄악시했기에 아예 동성연애 자체를 사회에서 매장해 버렸고, 이러한 종교적인 영향으로 근대기까지는 동성애에 대해서 금기시하는 인식 자체가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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