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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식은 연애4

비 개인 다음 날

<식은 연애>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by 옥광



비 오는 날에는 무조건 파전에 막걸리란다. 파전 부칠 때 나는 지글지글한 소리가 비 내릴 때 들리는 후드득 소리와 비슷해서 이 소리들의 유사성이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거라고들 하는데 솔직히 공감은 안 된다. 진짜 소리 때문이라면 집에서 부치면서 소리도 들어야지 왜 밖에서 사 먹냐고.


2대 2 미팅을 하기로 한 날에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비는 하루 종일 그칠 기미를 안 보였다. 혜정은 이 약속을 파투 내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주선자인 동호가 차 떼고 포 떼고 비도 오는데 학교 앞 '동래파전'에서 시작하자고 하니 그러자고 했다. 비 오는 소리 때문에 파전을 먹는다는 말은 여전히 이해 가지 않지만 이와 별개로 혜정은 파전을 좋아한다. 같이 곁들이는 막걸리는 더 좋아하고. 그리고 지루한 장마 때문에 심심했고.


4명의 분위기는 좋았다. '동래파전'의 해물파전은 언제나 그렇듯 기름지고 두툼하고 바삭하니 맛있었고 적당히 산미가 느껴지는 달달한 막걸리는 벌컥벌컥 잘도 들어갔다. 굳이 문제라면 혜정과 친구 가연이 동호의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 둘과 죽이 맞아도 너무 잘 맞았다는 거다. 서로 공유하고 있는 술게임의 룰도 비슷했고 관심분야부터 정치적 성향까지 보기 드물게 척척 맞아 들어갔다. 절로 흥이 난 4명은 술판을 키우기로 했다. 비 때문에 2차 3차로 장소를 바꾸기는 귀찮으니 주변에 있을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로 한 것이다. 다시 동호를 소환했다. 예상대로 동호는 근처 다른 포차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같이 있던 미팅에 나온 두 명과 동창인 친구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중에 한 명이 수영이었다.


혜정의 남동생이 키가 크다. 184cm쯤? 수영은 그 동생 놈과 엇비슷하게 커 보였다. 그런데 머리는 더 작고 어깨는 더 넓다. 얼굴은 동생 놈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만큼 하얬고. 그렇다고 혜정이 첫눈에 수영에게 반한 것은 아니고 그나마 눈에 드는 외모가 나타났다 정도. 비도 오는 날 술과 함께 처음 만나 이제는 절친이 된 두 명 중 한 명은 키 작은 남동생 같았고 한 명은 공부만 잘하게 생긴 남동생 같았다. 마침 옷도 대충 입고 나왔는데 수영을 보니 약간 후회가 밀려온다.


"나 화장실 좀."


후회를 할 때 하더라도 오줌은 마려우니 조심조심 '동래파전' 밖으로 나섰다. 화장실이 가게 밖으로 나가 건물 야외주차장 쪽으로 돌아가야 나오기 때문이다. 다행히 낮에 지겹게 내리던 비는 멎었기에 우산은 필요 없었지만 바닥은 온통 물웅덩이 지뢰밭이라 술기운에 휘청이는 다리가 자빠지지 않도록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옮겨 볼일을 봐야만 했다. 막걸리를 그렇게 많이 마셨던가. 소변량이 맥주 마셨을 때보다 더 한 것 같다.


'역시 편한 옷 입고 나오길 잘했어.'


화장실에서 나오며 역시 지퍼 없고 단추 없는 바지를 잘 입고 나왔다며 스스로 칭찬하는데 누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얼굴이 하얀 수영이다.


"너 거기서 뭐 해? 왜 나와 있어?"

"그냥."


별 거 아니라는 듯 '그냥.'이라고 대답하는 수영을 보니 혜정은 이대로 돌아가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나 걱정돼서 나와 본 건 아니고?"

"아니 뭐."

"나 빵빠레 하나만 사주라."

"빵빠레?"

"응. 빵빠레가 먹고 싶은데 지갑이랑 핸드폰이랑 다 두고 왔어. 그러니까 네가 사주라."


'동래파전' 건너편엔 'GS편의점'이 있다. 혜정은 그 편의점을 가리키며 걸었고 수영은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곧 혜정의 손에는 빵빠레 하나가 들렸다.


"맛있다."

"..."

"너는 뭐 안 먹어? 나만 먹기 좀 그런데."

"괜찮아, 나는."

"그래도 좀 그런데. 나만 혼자 먹는 거."


낮에 내렸던 비 때문인지 밤공기는 제법 선선했다. 혜정은 밤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비릿한 물냄새가 난다. 좋다. 입 속에 물고 있는 빵빠레 냄새도 좋고 위에 남아 있는 막걸리 냄새도 좋고 옷에 밴 파전의 기름냄새도 좋았다. 적당히 헤롱거리는 정신상태 때문인지 웬만한 모든 냄새가 좋았다.


"수영."


혜정은 곁에 있으면서도 시선만큼은 허공에 두는 수영의 이름을 불렀다.


"응?"

"나 어렸을 때 지금처럼 장마에 비 진짜 많이 오는데 쓰레빠 신고 나갔다가 쓰레빠가 떠내려간 적이 있었다."

"쓰레빠? 한 짝만? 아니면 두 짝 다?"

"처음엔 한 짝만 떠내려 갔는데 그거 잡으려고 쫓아갔다가 나머지 한 짝까지 떠내려갔지. 쓰고 있던 우산은 다 뒤집어지고. 옷은 다 젖고 완전 난리도 아니었어."

"하하, 그랬겠네."


옅게 웃는 수영에게 혜정이 3분의 1쯤 남은 빵빠레 한 입을 먹고 내밀었다.


"야, 너도 한 입 해."


그때였다. 아슬아슬하게 녹아내린 빵빠레 너머로 쏴아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에 저절로 고개를 돌리려는 혜정의 얼굴 앞으로 수영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혜정이 아까부터 기대하던 순간이었다. 수영의 얼굴은 주먹만큼의 거리 앞에서 멈췄고 그만큼의 거리는 혜정이 채웠다. 키스는 달콤했다. 역시 빵빠레는 배신하지 않는다. 3분의 1쯤 남은 빵빠레는 바닥에 떨어졌지만 떨어지는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지난밤 혜정의 기억이다. 옆에 누군가 누워 있는 기척을 느낀 혜정은 신속하게 얼굴을 확인했다. 가연이다. 수영이 아니다. 수영과 키스를 하면서 근처 모텔 몇 군데를 떠올렸던 터였다. 떠올리기만 한 걸 실행으로 옮겼을 까 봐 술이 확 깰뻔했던 혜정은 다시 밀려드는 숙취를 고스란히 느꼈다.


"뭐야? 너 깼어? 깼으면 일어나. 나 좀 편하게 자자."


가연이 밤새 침대가 비좁았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야, 여기 우리 집이거든!"

"술 취한 너를 데리고 온 게 나거든!"


아무래도 어제 정신줄을 놓았나 보다. 빵빠레 먹기 전 주종을 소주로 바꿨던 게 불찰인 듯싶다. 막걸리만 먹으니 배부르다고 바꾼 것인데 괜찮지 않았던 거다.


"가연아. 나... 뭐 실수 한 건 없었어?"

"너? 기억 안 나?"

"어. 기억이 대충 나긴 하는데 그렇다고 말끔하게 나는 건 아니고. 실수 많이 했어?"

"아니야. 너 별 실수 한 거 없어. 그냥 소주를 물처럼 들이켜는 게 저게 평소처럼 필름이 끊겼구나 싶어서 집으로 온 거야. 애들도 잘 갔고."

"그래? 그게 다야?"

"응. 그게 다야."


혜정은 톡이나 문자가 온 게 없는지 궁금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안 보였고 가방 안에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바지 주머니를 뒤져보니 오른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나왔다. 어제 입고 나간 옷 그대로 입고 잤으니 자연스러운 결과다. 폰에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왜? 동호랑 애들 못 들어갔을 까 봐?"

"응? 응."

"걔네 잘 갔다니까. 걔 누구지? 동호 친구 키 나랑 비슷하고 웃긴 애."

"누구? 민규?"

"어어. 걔 민규. 걔네 집으로 간다고 우르르 갔어. 진짜 재밌는 애들이야."

"그 저기 수영이는?"

"수영이? 그 얼굴 허여멀건 애? 걔 뭐?"

"으응...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드문드문 나는 기억 속에서 혜정은 수영이와 사귀기로 했다. 빗속에서 나눈 빵빠레와 달콤했던 키스를 하고 나서였다. 혜정이 먼저 사귀자고 했고 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끄덕였다. 그러고선 빗속을 뚫고 '동래파전'으로 뛰어 돌아갔다. 적당히 가방을 챙겨 수영과 빠져나오려 했던 것인데 꿍꿍이를 숨기려 들이켜 마신 소주에 발목을 잡혀 주저앉아 더 마시다가 가연과 집으로 왔나 보다.


"야, 비 그쳤다. 완전 개었어."


가연이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창 밖이 눈이 부시게 밝다. 장마가 끝났나 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옆 빌라 건물 너머로 보인다. 태양광 때문인지 어제까지의 장마가 꿈만 같다. 새삼 이 아침을 수영과 함께 하지 않음에 안도했다. 꿈이 깨고 나니 꿈속과 달리 수영도 그냥 얼굴 좀 하얀 남동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느껴진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카톡 프사에 있는 수영의 얼굴을 확인했다. 키는 큰 것도 맞고 얼굴 작은 것도 맞는데 어깨는 넓지 않고 좁았다. 어제는 티셔츠 뽕이었나 보다. SNS를 확인했다. 맛집 다니는 걸 좋아하는지 그럴싸한 음식 사진을 주로 게시했는데 뭔 불평이 그리도 많이 하는지. A맛집에 가서 B맛집이 더 맛있다고 하고 C맛집에 가면 D맛집이 더 낫다는 말 뿐이다. 그때 전화가 왔다는 표시가 수영의 SNS 계정 위로 떴다. 수영이다.


"여, 여보세요."


지난밤 잘 들어갔냐는 수영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바로 옆에 있을 때도 느끼긴 했는데 목소리가 참 작다. 몇몇 질문은 잘 안 들려서 되물어야만 했다. 그때마다 어찌나 심드렁해지던지. 장마에 내린 비 때문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던 혜정의 감수성은 쨍쨍 나온 햇빛에 보송보송 마르기 시작했다. 지난밤 뱉은 젖은 말들을 세탁해야 한다. 세탁... 해야만 하는데 꼭 그래야만 했는데. 왠지 당장은 못 하겠는 걸.


장마가 끝난 후 일주일은 비 핑계로 미뤄뒀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해야만 했기에 수영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이건 팩트다. 학교 수업도 가야 하고 스터디 모임도 있고 과제도 해야 하고 중간중간 친구들이랑 쇼핑도 하고 결정적으로 혼자만의 시간도 즐겨야 하고. 그래도 짬을 내어 통화는 했다. 사실 그다지 하고 싶지도 않은 통화였기에 그 통화는 건조했다. 어쩌다 사귀기로 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감만 가득한 통화였다. 그렇게 7일을 지나 7일째 되던 날이었다.


"여보세요."

"어, 혜정아. 나 수영이야."

"아, 응 알아."

"저기... 내가... 음... 잘 잤어?"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등교 준비를 막 마친 점심에 잘 잤냐고 묻는다. 어제는 혜정이 전화해서 잘 자라고만 말하고 통화를 마쳤더랬다. 첫 하루 이틀은 오늘 뭐 했냐고 물음도 주고받았는데 이젠 궁금하지도 않고 또 뭘 할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건 참, 그냥 키스만 할 걸 무엇하러 사귀자는 속 없는 소리를 해댄 건지 이혜정은 자신의 주둥이를 쥐어짜고 싶었다. 다 비 때문이다. 다 비 때문이야!


"... 소할래?"

"뭐?"

"... 소할까 해서..."

"뭔 소?"

"ㅊ... 소."

"뭐?"


자신의 주둥이에게 후회와 원망을 보내느라 가뜩이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의 수영이가 하는 말이 더 듣기 어려웠다. 그러니 여러 번 되물을 수밖에. 짜증이 나려는 걸 참아가면서. 그런데...


"사귀기로 한 거 취소하자고?"

"... 어..."

"왜?"


수영은 이제 와서 혜정이 자기 타입이 아니라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덧붙였다. 얼떨결에 키스까지 했는데 무조건 안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는 말들도 주렁주렁 덧 붙이고. 혜정은 수영을 향한 자신의 의견과는 별개로 자존심이 상했다. 왜 저런 사족 같은 말들은 아무리 작아도 쏙쏙 잘 들리는지. 혜정이 먼저 하려던 세탁을 수영이 먼저 해버렸다. 세탁의 선수를 빼앗겼다.


"흠. 그래서 취소를 하자고?"

"... 으응."

"뭐 그래. 좀 섭섭하지만 할 수 없지. 그렇게 하자."



혜정은 쿨하게 그러자고 대답했다. 혜정은 진심으로 쿨하게 대답했는데 수영이 쿨한 척하는 거라고 여길까 봐 조바심이 났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쿨하게 보이려고 길게 말하면 더 쿨하지 않게 보일 것이 확실하다. 창밖을 바라봤다. 장마가 사라진 하늘은 7일 내내 햇빛만 쨍쨍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먼저 말했어야 했다. '사귀는 걸 취소하기로 한 걸 다시 취소하고 다시 내가 헤어지자고 말해 볼까?'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다. 애당초 비를 맞을 때는 흙탕물도 튀는 법이다.


옷에 튄 흙탕물은 물이 말라도 흙을 남긴다. 혜정의 흙은 혜정이 일주일 만에 차였다는 소소한 소문이었다. 그나마 진득한 진흙이 아닌 게 어딘가 싶다. 혜정은 변명하지 않는 것으로 흙을 털어냈다.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어서 군더더기 주워 붙일 말도 없었고. 동호 때문에 가끔 만나게 되는 수영이에게 "안녕 나를 차버린 수영아."라고 인사를 건네면 괜히 몸 둘 바 몰라하는 수영이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대신 당분간 빵빠레는 안 먹는 걸로.











비 개인 다음 날. by 옥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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