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5 유로파 보고서
재시는 할이 그루이트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한다. 그런 재시는 할이 프레쉬 룸 필터링이 충분하지 않으면 썩은 달걀 냄새가 진동한다며 매번 호들갑을 떨었는데 오늘따라 빨리 나오라고 재촉이다.
━━━━ “할,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재시, 자꾸 왜 그러는데? 민수 때문에 그래? 걱정 마. 초록빛 그루이트는 아직 출산 전이야. 지금부터 준비해도 늦지 않아.”
━━━━ “나도 알아. 그것의 임신 상황은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그보다 보고서에 관한 답신이 왔어. 빨리 와!”
“정말?”
재시는 그루이트들 거래문화 이야기도, 지적 생명체 가능성 이야기도 다 누락시키라고 했었다. 그러나 할은 이것만은 할 수 없었다. 이 그루이트들은 할을 휴먼들의 대장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장차 할이 블라디미르 그룹에 입성해 거래문화를 가진 그루이트들과 유로파의 젤을 거래할 시 그 선봉장에 할이 서게 될 것이다. 이 젤은 앞으로 더 먼 은하계 연결 트램을 위한 동면 겔(gel)로서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이고 할은 블라디미르 그룹의 임원까지 오를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되면 할은 미하르와 민수 건도 다 바로잡을 것이다.
‘재시, 네가 틀렸어. 두고 봐!’
“할! 너는 진짜! 왜 이렇게 늦어? 빨리 확인해봐!”
할은 크게 심호흡하고 할 혈류 안에 돌고 있을 나노칩을 찾아 스캔했다. 곧 확인 허가 승인이 떨어졌다. 재시가 할보다 더 가까이 할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바짝 붙어 섰다. 할은 재시에게 밀리지 않으려 버티면서 답신을 확인했다.
【지구 유니언 소속, 코스모 바이올로지 13팀 파견 연구원 할의 유로파 행성 생명체 그루이트에 관한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따라서 그루이트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점을 다수 가지고 있는 생명체라는 것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에 뿌리를 둔 휴먼으로서 1형문명 이전부터 외형에 따른 인종, 염색체에 따른 성 등 다름에서 오는 차별을 극복하고 모두의 평등을 위해 힘써왔다는 사실을 지난 무구한 역사가 말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한 파견 연구원 할의 편협함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다른 은하계, 다른 행성의 외계 생명체라고 하나 그 생식기 생김새와 쓰임새의 특징을 두고 단순히 지구 휴먼의 것과 비교하여 암컷, 수컷으로 나누어 표현하는 행위는 파견요원 당사자의 편협하고 얕은 사고 수준이 반영된 결정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암컷이 다수의 수컷을 지배하는 무리 사회라는 표현, 그 시발점부터 큰 문제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기의 모양새와 쓰임새, 몇 가지 생식기 외에는 외형적 크기, 완력 면으로 보자면 대장 그루이트는 휴먼 남성과도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이미 1형문명 이전에 멸종한 ‘아마조네스’라는 문구까지 인용해 가며 그루이트를 표현한 파견 연구원 할에게 깊은 실망감을 전하는 바이며 또, 그루이트에게 거래문화가 존재하고 이것을 이유로 그루이트의 지적 생명체 지정 가능성에 관한 파견 연구원 할의 의견을 신뢰할 수 없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현재 블라디미르 그룹은 유로파 젤 개발에 착수하려는 단계이며 이에 따르는…】
“재시… 이게 무슨 소리야? 왜 신뢰를 못 하겠 다고… 여성형성기를 가졌으니 암컷이라 하고 남성형성기를 가졌으니 수컷이라고 한 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
할은 머리가 띵했다.
“할! 내가 그거 넣지 말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분명히 넣지 말라고 했잖아.”
할은 재시가 내지르는 짜증에 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왜 보이는 그대로 기록한 걸 편협하다고 하는 거지? 내가 무슨 얕은 사고를 반영했다는 거야? 그리고 재시! 저 아마조네스가 어쩌고, 암컷이 수컷을 지배하네 어쩌고 하는 부분은 네가 피력한 의견이잖아. 그렇게 해야 설득력이 있다고 네가 말한 거라고!”
“할, 내가 언제 그랬어? 그냥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한 것뿐이지. 그걸 그대로 따라 적은 건, 할 네가 스스로 한 거잖아!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협박이라도 했니? 너 내가 잘해주니까 이제 아주 만만하구나? 내가 우스워?”
“아니, 그건 아니고, 할.”
“그럼 네가 뭔데 말을 안 들은 거야? 지적 생명체 어쩌고 하는 건 진짜 넣지 말았어야지! 처음부터 넣지 말라고 말했었잖아!”
“왜? 왜, 이게 어때서? 이거야말로 정말 위대한 업적이 될 텐데!”
“허… 위대한 업적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진짜!”
씩씩거리며 질러대던 재시는 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여러 번 되묻지 말라며 딱 한 번만 말할 거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그룹은 곧 유로파 행성의 그루이트들을 멸종시킬 거야.”
“왜?
“되묻지 말라고 했잖아! 하긴 넌 할이지… 왜긴 뭐가 왜야, 걸리적거리니까 그렇지.”
할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깥 상황을 보여주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쳐다봤다. 그루이트들이 무리 별로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어떤 무리는 거래 중인지 노예 그루이트들이 위를 향해 누워 성기의 카틀레야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초록빛 그루이트가 자리를 잡고 앉는 게 보였다. 곧 출산을 시작하려나 보다. 초록빛 그루이트 주변의 노예 그루이트들이 픽, 픽 한 마리씩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뭐? 민수 걱정이라도 하고 싶은 거니, 할? 민수는 이미 조치를 취해 놨어. 동면 캡슐에 들어가 있으니 저게 새끼를 낳는 동안 별일 없을 거야.”
말 그대로였다. 민수는 초록빛 그루이트의 출산이 진행될 동안에는 키핑룸의 죽은 그루이트 옆에서 동면을 취했다. 유로파의 젤을 가공한 겔(gel)로 동면을 하니 수면 중에도 고통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긴 시간 동면은 불가능하지만 짧은 동면에는 문제가 없었다. 굳이 문제점을 꼽자면 급하게 가공한 겔(gel)이라 동면 후, 프레쉬 룸에서 꽤 오랜 시간 필터링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재시! 블라디미르가 그루이트들을 멸종시킨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할. 저 그루이트들을 싸그리 다 죽여버릴 거야. 씨를 말려버릴 거라고. 그래야 이 행성의 젤을 마음대로 퍼다 쓸 수 있을 테니까.” 재시는 할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할, 너는 하나부터 열까지 꼭 다 말해줘야 알 수 있는 거구나.”
할을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 그럼 이 행성 자,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어. 아니, 파괴돼.”
할의 우려에 재시는 콧방귀를 뀌었다.
“쳇, 그깟 행성 하나 없어지는 거 알게 뭐야. 할, 블라디미르 그룹이 우주에 트램을 건설하면서 파괴한 행성의 숫자가 몇 개일 거 같니? 그리고 내가 말했지. 정말 그 많은 행성들 중에 기준에 부합된 지능을 가진 지적 생명체가 단 한종도 없었을까? 정말 단 한종도?”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는 재시의 기세에 눌려 할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재시는 홀로그램 모니터로 초록빛 그루이트 다리 사이로 머리를 보이는 새끼 그루이트를 보며 말했다.
“대충 돌고래급이라고 했으면 당장 멸종은 면할 수도 있었을 거야. 하긴 어차피 시간만 버는 거지. 언젠간 전부 멸종시켰을 테지만.”
“누가? 누가 그런 짓을 해?”
“누구긴 누구야, 우리 휴먼이라니까.”
할은 믿을 수 없었다. 이미 가질 만큼 가진, 넘칠 만큼 넘치게 가진 게 휴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먼이 휴먼에게 행했던 비도덕적 행위를 이제 다른 행성 생명체에게 반복하고 있다. 할은 스크린을 바라본 채 망연자실, 넋 나간 꼴로 서 있었다.
작은 새끼 그루이트가 초록빛 그루이트의 품에 안겨 있는 게 보였다. 고통을 호소하던 노예 그루이트들도, 다른 대장 그루이트들도 새끼 그루이트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들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작은 아이 그루이트들도 젤 속에서 나왔다. 노예 그루이트들이 아이 그루이트들 한 마리씩을 소중하게 안아 올리는 게 보였다.
재시는 혀를 차며 마냥 순진한 할을 혼자 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민수와 자신의 콜로니 귀환 계획이 틀어졌으니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행성정리팀’이 도착할 때까지 꼼짝없이 유로파를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 민수를 언제까지 저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아가는 길에 잠시 미하르를 살펴보았다. 포획룸에 감금된 미하르는 재시가 준 약에 취해 고통과 흥분을 동시에 발산하고 있었다. 미하르 건으로 어떻게 잘 흥정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미하르를 감금시킨 지 892시간째다. <2형문명 지구환경 보호법>에 휴먼과 관련된 감금 조항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