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5 유로파 보고서
“할, 네가 만들어야 할 보고서에서 몇 가지만 빼 줘.”
미하르를 감금시키고 29시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재시가 보고서 작성 중인 할에게 몇 가지 누락시킬 것을 요구했다. 민수는 침묵으로 재시를 응원했다. 할은 당황했다. 몇 가지 누락이라는 뜻은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에 크게 거슬리는 걸 빼라는 말이다.
“일단 미하르의 그루이트 성접촉 이야기는 꼭 빼!”
할은 재시와 민수가 해준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죽은 스캇이 그렇게까지 미하르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점에도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 음, 글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
재시는 스캇이 떠나고 난 후, 민수를 통해 미하르의 입장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미하르의 작은 아버지 ‘블라디미르 게레로’에게 미하르는 눈에 가시다. 블라디미르 그룹의 입지를 위해 블라디미르 일원의 개체수 유지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기에는 미하르가 자신의 [블라디미르 1st 콜로니]에서 벌이는 짓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통제불능일 경우가 많았다. 이게 블라디미르 그룹 질서 유지에 오히려 독이 되어 궁여지책으로 그를 가끔 탐사팀에 끼워 다른 은하계로 보내는 이유가 됐다. 콜로니의 에이징과 트램을 통한 탐사팀의 에이징은 다르니 그 사이 미하르가 저지른 짓들이 정리되고 잊혀져야 하는데 그러기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
“미하르의 위법 행위가 공식화되면 미하르는 강제 소환될 수밖에 없어. 그러면 더 복잡해진다고. 그러니까 꼭 빼 줘.”
“뭐가? 뭐가 복잡해지는데, 재시?”
“흠, 할 너는 거기까진 알 것 없어. 그냥 빼주기만 하면 돼.”
“하지만 재시, 그루이트가 성교를 통해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방식에 관한 근거를 제시하려면 많은 예시가 필요해. 게다가 이 경우에는…”
“민수도 빼!”
“아, 민수…”
최근 반복된 초록빛 그루이트의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발생한 미하르와 민수, 특히 민수의 증상과 겹치는 발현 시간으로 재시도 할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여성형성기를 가진 대장그루이트가 자신의 노예가 되었음에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 재시는 이걸 인정하고 나니 민수와 미하르를 위한 대처가 한결 수월해졌다. 미하르가 돌봤던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보내오는 정보를 통해 재시는 아파올 시간을 미리 파악해 치료에 들어갔다. 그러고 나니 감금된 미하르는 거의 약에 취해 있거나 진통제와 마취제와 잠들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민수는 재시의 인정 이후 제대로 재시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할, 왜 그래? 그냥 다 빼 달라고. 너한테 거짓말을 해달라는 게 아니잖아. 나와 민수가 겨우 이런 일 한 번으로 [블라디미르 3rd 콜로니]의 아이들을 못 만나야 속이 시원하겠니?”
“그렇지… 아니, 시원하다는 게 아니고.”
하… 겨우 이런 일 한 번이라니…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는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 서문에 1형문명 도약 이전부터 횡행한 휴먼과 휴먼의 정복전쟁에서 보여줬던 비도덕적 성교를 반성해 새로운 우주를 만날 때는 이를 금한다고 밝혔다. 지구에서 발생한 휴먼의 무차별한 자원 획득이 야기시킨 다른 종의 멸종을 반성해 이도 함께 금한다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강제로 한 것도 아니랬어. 민수는 오히려 그 그루이트가 억지로 한 거라고 했다고.”
할이 결정을 쉽게 못 내리자 재시가 재촉했다. 이 보고서는 중요하다. 재시와 민수의 말대로 이 보고서가 인정을 받는다면 할은 ‘블라디미르 그룹’의 일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구 유니언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재시가 작은 고깃덩어리와 감자구이를 가지고 왔다.
“할, 이거 네가 다 먹어.”
“어? 재시, 이거… 우리 마지막 감자 아니야? 나 혼자 이 3개를 다 먹으라고?”
“할이 감자를 잘 먹더라. 우린 자주 먹던 거니까. 이건 할이 다 먹어.”
“지, 진짜? 내가 감자를… 이걸 내가 다 먹어도 된다고? 민수도, 민수도 동의했어?”
“당연하지, 할. 민수도 그러라고 했어. 그러니까 할이 다 먹어.”
할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조심스럽게 반으로 갈랐다. 마치 안에 연기가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들킨 듯 쪼개진 감자 사이로 큰 김이 수욱 올라왔다. 할은 그걸 보는 게 너무 좋았다. 그때, 같이 숨어 있다 달려드는 감자의 냄새도 너무 좋았다. 여기에 재시가 조금씩 준 하얗고 반짝이는 가루를 찍어 먹으면 오줌을 쌀 것같이 저릿하다.
“정말 민수가 스캇을 대신할 인원으로 나를 추천해 주는 거지?”
“응, 그렇다니까. 대신 할이 보고서를 아주 훌륭하게 잘 써줘야 해. 그래야 민수도 할 말이 생기지 않겠어?”
“훌륭하게, 잘.”
“그래, 게다가 너를 추천을 해주는 민수가 곤란해지면 어떻게 되겠니?”
대답을 하려던 할의 입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또 깜빡하고 제대로 식히지 않은 감자를 입 안에 넣은 것이다. 재시가 한껏 웃으며 할에게 아주 차가운 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말한 것들 다 잘 기억하고 있는 거지? 명심해, 할. 훌륭한 보고서가 나오려면 뺄 건 빼야 한다는 거!”
할은 민수와 미하르의 이야기는 누락시켰다. 최대한 할이 본 그루이트 이야기만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성형성기의 큰 그루이트 주인과 남성형성기의 왜소한 그루이트 노예들, 어떻게 그것들의 주인이 왜소한 것들을 자기 노예로 삼는지, 그들의 생식기 안에서 자라나는 새끼들의 모습, 체내 임신과 출산 과정, 여기에 따르는 노예들의 대리 고통. 그것들이 할에게서 돌출 성기를 찾았던 행위. 이후, 할이 그것들로부터 대장 그루이트 대접을 받으며 기지까지 운반되었던 경험. 계속 기지 앞으로 찾아와 뭔가 거래를 하려는 그루이트들. 이것은 휴먼이 다른 여러 은하계 진출 후 처음 발견한 지적 생명체와의 첫 교류다. 지금 할은 탐사유닛을 착장하고 기지 앞에 나와있다.
[키키키, 끄으, 끅, 끄윽끄, 끼으, 끼, 끼이이이이이, 끼으크오]
“그래그래, 네들은 정말 끊임없이 떠드는구나. 도대체 언어 분석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할 옆에는 성기에서 빛이 나지 않는 여성형성기 그루이트가 서 있었다. 최근에 새로 본 대장 그루이트다.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도는 반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근사한 녀석으로 키가 족히 190cm는 돼 보인다. 발아래, 젤 속에는 이 여성형성기 그루이트의 노예 그루이트들이 떠받쳐 주고 있었다. 할도 마찬가지로 이것의 노예들로 보이는 다른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젤 속에서 떠 받쳐 주고 있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근래에 들어 할을 더 높이 올려주고 이것이나 다른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을 더 낮게 내려 할의 눈높이를 맞춰주고 있다. 이것들 배려도 할 줄 안다. 젤이 할의 발목에서 찰랑거리고 이것은 무릎 위에서 찰랑거린다. 젤 속에선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의 카틀레야 꽃잎이 수줍은 듯 봉오리 져 성기를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젤 표면에 초록색 빛이 어른거린다. 배가 볼록 나온 초록빛 여성형성기 그루이트가 한 노예 것의 성기를 감싸 쥐고 젤 위의 할에게 들이밀었다.
“어허, 자꾸 이러면 곤란해. 나는 우리의 대장이 아니라고. 아직은… 아직은 말이야.”
━━━━ “할, 뭐 해? 그만하고 빨리 들어와.”
“재시? 왜?”
━━━━ “왜는 무슨 왜야? 빨리 들어오기나 해.”
“알았어, 알았다고. 들어갈게.”
할이 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려 탐사유닛에 감싸진 풍선 같은 왼발을 들어 올렸다. 노예 그루이트들이 할을 기지 쪽으로 옮겨주기 시작했다. 이대로 젤 위를 미끄러져 가는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할은 프레쉬 룸에서 필터링하는 내내 그 기분을 상기시켰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