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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Dec 23. 2022

리아의 오븐

<식은 연애> 스물네 번째 이야기



딸랑!


“소정아 나 왔어.”

 

8월 오후 3시에 가까운 시간, 몹시 더웠다. 합정역 7번 출구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 걸리는 시간 5분 남짓. 높은 습도에 물속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체감 불쾌지수 300%.


“와 이제 좀 살겠네.”

“왜? 밖에 많이 더워?”


소정이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있다. 주방의 오븐 뚜껑이 열려 있었고 소정이는 막 구워진 스콘을 꺼낸 참이었다. 달콤한 버터향 가득한 뜨거운 냄새가 ‘리아의 오븐’ 카페에 번졌다.


“어… 너만큼 더운 것 같다.”

 

호준이가 저 스콘을 정말 좋아하는데. 디저트 카페 ‘리아의 오븐’이 처음 오픈했던 3년 전, 태어난 지 18개월 된 호준이는 당시 최연소 단골이었다. 호준이는 여기 올 때마다 저 스콘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오물오물 먹었고 그 순간만큼은 테이블에 얌전히 앉아있기까지 했다. 18개월 아들이 얌전히 앉아 있어 주다니! 그때 나는 여기 리아의 오븐에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언니, 오늘이 아니라 지난주가 호준이 아빠 만나는 날 아니었어?”

“뭐… 그렇지. 그런데 딱 준비하고 지하철역 가려고 택시를 타니까 이번 주에 보자고 톡을 보내더라고. 걔, 호준이 아빠가.”

“아니, 왜?”

“몰라… 이유를 알아 뭐 해.”

 

그와는 이제 이유 따윈 물어볼 필요도 궁금해할 필요도 없는 사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항상 마시는 거 대자로?”

“응. 거기다 당근 케이크랑 자몽 타르트랑. 또…”

“또는 뭐가 또야. 일단 먼저 먹고 생각해 봐. 시간 많잖아.”

 

앞으로 3시간, 꽤 여유 있는 시간이긴 하다. 리아의 오븐은 테이블이 3개만 있는 작은 카페로 나는 항상 앉는 책장 옆, 3개 중 가장 작은 테이블 2인석에 앉아 들고 온 짐을 정리했다. 평균 한 달에 두 번,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산본역에서 합정역까지 5살 아들을 데리고 이 여행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건 지금 테이블 건너편 의자에 한 자리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캠핑용 의자다. 세상은 5살 미취학 아동에게 지하철 자리를 쉽게 내줄 만큼 말랑말랑하지 않다.


“호준이 많이 컸지?”

 

소정이가 주문한 메뉴를 가져왔다. 소정이의 대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얼음이 꽉꽉 담긴 500cc 맥주잔에 나온다. 바로 반샷을 들이켰다. 탁.

 

“많이 컸지... 배에 머리가 또 있어. 배가 엄청 커.”

“하하, 호준이는 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뭐든 잘 먹었잖아. 다 키로 갈 거야.”

“그래, 다들 키로 갈 거라는데 도대체 언제 가는 건지 너무 궁금하다.”

“귀엽기만 하겠고만, 아들한테 왜 그러냐? 크크, 한 번 데리고 오지, 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합정에서 군포로 이사 간 이후 한 번도 데리고 오질 못 했구나.


“다음번엔 데리고 올게. 너 각오해야 돼. 진짜 잘 먹어, 크크.”

“무슨, 그러면 각오는 계산하는 언니가 해야지.”


딸랑! 새로운 손님들이 방문했다. 남은 두 테이블이 손님들로 꽉 찼고 소정이는 앉을 틈도 없이 바빠졌다. 나는 소리가 안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옆 책꽂이에서 <피아노의 숲> 3권을 꺼내 들었다. 작은 책꽂이에는 소정이 취향 가득한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베이커리 레시피에 관한 책들은 펼쳐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니 오늘도 <피아노의 숲>이다. 이번에 끝까지 읽으면 5번째 완독인데 이상하게 이 재밌는 책들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봐도 봐도 새롭다.


“언니, 점심은 먹었어?”

 

당근 케이크를 두 입 정도 떼먹고 남겨둔 후, 자몽타르트를 포크로 쪼갰다. 반으로 쪼개지면서 파이지가 ‘바삭’하더니 사방에 터졌다. 수습하느라 정신없을 때 소정이가 점심을 챙겨 먹었냐고 물어봤다. 마침 꽉 차 있던 두 테이블이 비고 다시 둘 뿐이었다.


“아니, 타르트는 도대체 어떻게 먹어야 예쁘게 먹을 수 있는 거야?”

“언니, 점심은 먹었냐고.”

 

테이블과 펼쳐져 있던 <피아노의 숲>3권 페이지 위에 떨어진 파이지 부스러기를 손으로 하나하나 집어먹으며 대답했다.


“호준이는 카레 먹였어. 어제도 먹은 건데 맵다고 물 마시면서 잘 먹더라고.”

“언니는? 언니는 또 안 먹었지?”

“나? 나야 모… 이상하게 아침에 입맛이 없더라. 지금 먹는 게 첫 끼야.”

“아, 그게 어떻게 첫 끼야?”


소정이는 당근 케이크도 자몽 타르트도 부서져만 있을 뿐 제대로 먹지 않은 나에게 방금 구워져 나온 버터 쿠키를 주었다. 단골에게 주는 특혜였다. 부연설명으로 꺼내다 귀퉁이가 조금 부서졌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어디가 부서진 건지 모르겠다. 버터쿠키를 손에 들고 한 입 깨물었다. 타르트 부스러기에 이어 버터쿠키 부스러기도 테이블 사방에 떨어졌다.


“아, 고만 주서 먹어! 괜찮으니까 그냥 먹어.”

“아이고 야, 네가 애 키워 봐라.”


버터쿠키 부스러기까지 손가락 끝으로 열심히 찍어대며 먹으니 소정이가 한 소리 했고 나도 지지 않고 두 세 소리 했다. 애를 키우다 보면 쫓아다니며 애가 흘린 음식만 주워 먹어도 배가 찰 때가 있다. 애초에 밥을 줄 때 애에게 주는 할당량에 흘리는 것까지 포함해 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소정이는 입맛 없다는 건 뻥이었냐며 헛웃음을 날렸다.


“나는 카이보다 슈우헤이가 더 좋더라.”

 

<피아노의 숲> 5권을 꺼내며 말했다.

 

“언니도? 나도 그래. 돈 많은 집 애라고 다 나쁜 건 아니란 말이지.”

“그렇지! 하… 정말 안심이야. 내가 부자가 되더라도 우리 호준이 착한 어른이 될 수 있잖아.”

“아니! 그건 많이 벌고 나서 생각하시고요.”

 

간만에 아이가 곁에 없으니 별 쓰잘데기 없는 상상을 다 하게 된다. 굳이 특이점을 하나 꼽자면 쓰잘데기 없는 상상 속에도 호준이는 꼭 있다는 거다. 현실이던 상상이던 쓰잘데기가 있던 없던 호준이는 꼭 있다. 항상 있다.


“언니 조금 더 있다가 가. 아직 30분도 더 남았어.”

 

6시에 합정역으로 다시 호준이를 만나러 간다.

 

“알아. 짐만 미리 챙겨 놓는 거지. 설마 이렇게 더운데 일찍 나가겠니, 내가.”

 

서비스로 받은 버터쿠키는 어찌어찌 거의 먹었는데 당근 케이크와 자몽타르트는 아직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소정, 미안한데 이거 다 싸주라. 미안미안해.”

 

소정이가 만든 건 다 맛있다. 오늘 같은 날, 내 뱃고래가 이상해지는 것뿐이다. 소정이가 포장할 동안 창 밖을 내다봤다. 6시가 다 돼 가는데도 처음 들어왔던 3시처럼 밝다.


“언니 여기.”

 

소정이가 희고 작은 상자가 담긴 포장백을 건넸다. 그런데… 어라, 안에 상자 말고 다른 게 더 있다.


“언니, 스콘 좀 넣었어. 호준이 주라고. 그거 호준이 거야.”

“어, 고마워 소정아.”

“응, 그거 호준이 거야.”

“그러게… 호준이가 너무 좋아하겠다. 진짜 너무 고마워.”

“언니! 분명히 말했다. 호준이 주라고 주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인증샷 보내줄게. 오바는.”

 

계산을 하고 캠핑 의자와 호준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이 담긴 묵직한 백팩을 짊어진 채 5시 50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딸랑!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나는 그 열린 문을 붙잡고 밖으로 나섰다.


“소정아, 그럼 다음 주에 봐. 아니, 다음다음 주인가. 에잉 모르겠다.”

“크크, 그래, 언니 조심해서 가. 언제든 다음에 봐.”

 

합정역 7번 출구로 내려가니 1번 출구 쪽에서 아빠 손을 잡고 오는 호준이가 보였다.


“호준아~”

 

그다지 큰 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이가 뛰어온다. 안기기 전, 속도를 조금만 줄여주면 좋겠는데 호준이는 그런 거 모른다. 적당히 다리를 벌린 안정적인 기마자세로 전력 질주해 오는 아이를 힘껏 안았다. 아이가 나한테 안기는 걸 확인한 아이 아빠가 그대로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게 보였다. 호준이는 아빠를 만날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아빠에게 가 안기는데 다시 내 품에 올 때는 마찬가지로 뒤도 안 돌아보고 내 품에 안긴다.


“아빠랑 재밌었어?”

“응.”


오기 전 짜장면을 먹었는지 입가에 미쳐 닦아내지 못 한 짜장이 남아있다. 닦아내려고 볼에 손가락을 문지르니 장난치는 줄 알고 고개를 요리조리 피하며 웃는다. 귀엽다. 귀여워 죽겠다.


“요! 요! 요 녀석!! 자 이제 가자.”

 

돌아가는 지하철 안, 노약자석 가까이에 펴 놓은 캠핑 의자에 앉은 호준이는 고개가 거의 90도가 꺾인 채 곯아떨어졌다. 몇몇 할머니가 왕자님 불편하겠다고 자리를 양보해 주시려 했지만 호준이가 거절했다. 자기는 자기 의자가 있어서 자기 의자에 앉으면 되는데 왜 그러냐고 따박따박 말대답까지 하면서 말이다. 잠시 ‘아… 내 자식 많이 컸구나.’ 했지만 저렇게 곯아떨어진 걸 보면 그건 아닌 게 확실하다.


‘저거 저거 도착해서도 안 깰 거 같은데…’


호준이는 또래보다 잘 먹는 아이라 또래보다 무겁다. 잠든 호준이를 집까지 안고 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손까지 부들부들 떨려 왔다. 내가 왜 당근 케이크며 자몽 타르트를 야무지게 못 먹은 거지. 사무치는 후회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배고파, 배고파. 너무 배고파.’


호준이 머리 위로 하나 둘 스콘 부스러기를 떨어트렸다. 현 상황에 아무래도 케이크나 타르트보다 스콘이 먹기 편하니 어쩔 수 없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소정이가 챙겨준 스콘 세 개중 세 개째를 먹고 있었다. 내가 다 먹은 거다. 역시 소정이가 만든 건 다 맛있다.


‘인증샷은… 오늘도 물 건너갔네. 미안하다, 소정아.’


보드라운 호준이 머리카락 사이 스콘 부스러기를 조심스레 털어내며 나 홀로 소정이가 듣지 못할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그러고 나서 머릿속이 더 바빠졌다. 스콘 세 개로는 이 허기를 달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캠핑의자는 전용가방에 담아 어깨에 두르고 백팩을 등에 메었으니 호준이를 단단히 안고 편의점엘 들러야겠다. 손이 자유롭지 못하니 포장 벗기기 어려운 삼각김밥은 패스하고 한 입에 구겨 넣기 편한 크림빵을 사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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