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건교사 옥쌤 Oct 11. 2021

원래 코숏은 자라면서 털이 짧아져?

나 코리안 롱헤어 키우잖아.


 플래너는 나의 인생.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한다. 백 프로 완수하지 못해도 일단 계획은 세우고 봐야 한다.


 희한하게 고양이 식구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다. 몇 마리까지 키워볼 생각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법한데 그러질 않았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보니 고양이는 한 마리 더 늘어도 손이 가는 게 똑같다고 했다. 그 글을 읽으며 언젠가 첫째의 동생을 들이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다. 언제, 어떻게, 어떤 아이를 데리고 올지에 대해서는 항상 물음표만 떠 있었다. 아마 묘연을 믿어서였기 때문인 거 같다.


 사전에는 없어도 고양이 집사들 사이에는 묘연이라는 말이 있다. 인연에 사람 '인' 대신 고양이 '묘'를 넣은 말. 특정 고양이와의 연. 고양이를 키우기로 결심하고는 거의 1년을 아무도 못 데리고 왔었다. 수많은 고양이를 봐도 내 식구란 느낌이 든 적이 없어서 오랜 기간 주저했는데 첫째를 보자마자 바로 알아봤다.


 첫째는 어땠을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 좁아터진 자취방에 있는 낡은 의자를 마음에 들어 했다. 집에 데리고 온 첫날 캐리어 문을 열어주니 살금살금 밖을 나와서 주변을 살펴보고는 의자를 빤히 쳐다봤다. 옆에서 무릎 꿇고 앉아서 만져보지도 못하고 애꿎은 양 손만 꽉 마주 잡고 있는 나 따위는 이미 없는 존재였다. 그 애는 그대로 의자 위에 휙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드러누워서 천장과 주변을 둘러보며 그르렁거렸다. 첫째가 준비된 것 같아서 손을 뻗어 볼 옆을 쓰다듬었다. 그 애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고양이를 키워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보 수집이 취미라도 되는지 뭘 하기 전에는 꼭 이거 저거 읽고 찾아보는 편이다. 첫째를 맞이하기 전에도 고양이에 대해 엄청나게 공부했다. 고양이는 낯선 장소를 싫어해서 적응하려면 빨라야 3일, 오래 걸리면 몇 개월도 걸린다. '적응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할까?'. '끝끝내 거부하면 어쩌지?'와 같은 걱정으로 눈이 시뻘게질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 첫째는 원래 함께 살았던 것처럼 굴었다. 그 애의 능청스러움이 좋았다.


 첫째가 그랬기에 둘째도 자연스럽게 내게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보자마자 특별한 느낌을 주는 고양이가 있을 거라고.


 특별한 느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첫째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길을 걷고 있었고 첫째가 다니는 동물병원에 새로 인쇄된 종이가 붙어 있는 게 멀리서부터 보였다. 그 병원은 워낙 구조된 고양이들의 사진을 붙여 입양 홍보를 해왔다. 지나가면서 매번 들여다봤지만 항상 시큰둥했다. '귀엽네', '좋은 주인 찾았으면 좋겠다.'


 그날은 달랐다. 종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나? 바람이 불어왔던 것도 같다. 가까이 다가가 봤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새끼 고양이들 사진이었다. 젖소 무늬 2마리, 턱시도 무늬 1마리. 첫째가 갈색 고등어 무늬라서 다른 색, 다른 무늬 고양이들에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그 시기에는 젖소 무늬 고양이에게 매력을 느꼈다. 사진 밑에는 구조된 고양이의 새끼들을 분양한다고 관심 있으면 연락 주라고 적혀 있었다. 아이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가던 길을 급히 다시 갔다. 계속 그 애들의 잔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고양이를 데려오는 문제를 성급히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예쁘다고 무턱대고 데려올 수는 없었기에 곰곰이 생각해보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그 애들 사진을 봤다. 밤이 찾아와 눈을 감을 때도 떠오르는 햇살에 다시 눈을 뜰 때도 그 애들 생각이 났다.


 동물병원 앞을 찾아가 종이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잠시 뒤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 한 여자분이 떴다. 조심스럽게 프로필을 훑어봤다. 혹시나 미친 사람이면 어떡해.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잖아. 한 장 한 장 유심히 보고 나서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고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날렸다.


 "안녕하세요. OO동물병원에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입양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드렸다. 주인분께서는 아이들의 사진과 영상을 보내주시고 상황을 설명해주셨다.


 "보시다시피 젖소 무늬 코숏 애들이에요. 돌봐주던 고양이가 임신을 했길래 이사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 구조했어요."

 "아, 그럼 그 애의 새끼들인가요?"

 "아니요."

  "?"

 "그 새끼 고양이가 6개월이 돼서 중성화 수술을 받으러 갔더니 세상에, 임신을 해버린 거예요. 아빠 고양이도 중성화 수술 전이었거든요."

 "아? 그럼 할머니, 엄마, 아빠가 다 같이 지내는 건가요?"

 "네, 맞아요. 할머니, 엄마는 젖소 무늬고 아빠가 턱시도예요. 다 코숏이고요. 이미 3마리인데 새끼 3마리까지는 못 키우겠네요."


 애들을 보기 위해 방문 날짜와 시간을 약속 잡았다. 한파로 인해 서울이 시베리아보다 추운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희한하게 추운 겨울마다 우리 애들을 데리고 왔다. 왜 난 봄이나 가을처럼 선선할 때에 입양을 결심하지 않는 걸까? 패딩을 꽁꽁 동여 메고 털모자까지 쓰고는 아이들을 보러 갔다.


  부부가 사는 집인데 마당이 있었고 방이 3개였다. 방 하나는 학생에게 하숙식으로 내어 주었고, 하나는 부부 방, 나머지 하나는 고양이들 전용 방이랬다. 방 문을 여니 고양이들이 후다닥 흩어져 가구 아래로 숨었다. 문을 닫고는 그대로 벽에 붙어 쭈그려 앉아 애들이 지내는 방을 둘러봤다. 사람이 쓰는 가구는 별로 없고 고양이들을 위한 용품뿐이었다. 고양이 화장실, 사료그릇, 물그릇, 캣타워..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아! 앙~!"하고 이상하게 울며 꼬리를 치켜든 채 내게 다가왔다. 오늘 안에 얼굴 한번 못 보는 상황도 각오하고 왔는데 이렇게 빨리 다가온다고? 까만 무늬가 왼쪽 눈을 가로질러 뺨을 덮고 있었고 반대쪽은 눈 위에서 끝나 있었다. 꼭 앞머리를 한쪽으로만 늘어뜨린 깻잎 머리 모양 같았다. 그 애가 지금의 둘째다.


 둘째의 뒤로 또 다른 애가 머뭇거리며 나와 우두커니 섰는데 웃음이 나왔다. 그 애의 까만 무늬는 양 눈 위에서 귀 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털까지 이어져서 마치 귀 쪽 부분에만 머리카락이 살짝 남은 대머리처럼 보였다.


 둘째는 내 앞에 서서 재킷, 바지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충분히 탐색할 수 있게 가만히 쭈그려 앉아 있다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애는 내 손끝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고는 혀로 살짝 핥았다. 촉촉하면서도 까슬까슬한 혀 돌기의 느낌이 손끝에 남았다. 그 애는 나를 한번 올려다보더니 그대로 드러누워 제 배를 보여주었다. 고양이가 만나자마자 배를 보여준다고?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첫날부터 마음을 열었던 우리 첫째도 초반 6개월 동안은 제 배를 절대 못 만지게 했다.


 '설마, 설마' 조마조마하며 둘째의 배를 만져봤다. 첫째는 어릴 때 내가 배를 너무 오래 만지면 손목을 무는 시늉을 하고는 했다. 둘째는 머뭇거리는 내 손을 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만지다가 멈추면 고개를 들어 냐앙 울었고 다시 만지기 시작하면 뒤통수를 바닥에 대고는 눈을 감았다.


 ? 그런데 이상하다?   이렇게 털이 길지? 원래 코숏은 자라면서 털이 점점 짧아지는 건가? 가구 밑에 숨어 있는 엄마 고양이를 살펴보니 확연히 털이 짧다. 아빠 고양이는 어디 숨어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전에 받아둔 아빠 고양이 사진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털이 짧았다. 첫째가 장모종이라 새끼일  단모종 털이 어떤 양상으로 자라나는지  수가 없었다. 구석에  있는 대머리 고양이도 털이 길었다. 원래 그런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몸통 쪽은  애매하긴 했지만 꼬리   부분은 확실히 길었다. 꼬리를 위로 올리고 있으면 기다란 털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졌다. 집에 가서 정신 차리고 다시 한번  봐야겠다. 버드나무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꼬리 털을 사진으로 찍었다.


 주인분이 인간용 쿠키와 고양이용 간식을 챙겨 들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가구 밑에서 조그만 하얗고 까만 덩어리가 번개처럼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덩어리는 그대로 부엌으로 뛰어가 냉장고 위로 올라가서는 사라져 버렸다.


 "이.. 이게 뭐죠?"

 "새끼 세 마리 중 하나인데 엄청 낯가리네요."


 냉장고 위에서 요란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애도 털이 긴지 보고 싶었는데 확인할 수가 없었다. 둘째가 상황을 확인해보려고 방 밖으로 나가려 하길래 붙잡았다. 내 손에 잡혀 꼼짝 않고 냉장고 위를 바라보는 그 애를 보고는 주인은 이마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다른 분들이 보러 오셨을 때는 세 마리 전부 숨어서 난리였거든요. 다들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집에 돌려보내서 어찌나 민망하던지..."

 "정말요?"


 묘한 자부심을 느끼며 스윽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억눌렀다.  


 "근데 얘는 왜 이렇게 털이 길죠?"

 "글쎄요. 치와와도 털이 긴 애들이 있는 것처럼 코숏도 그런가 봐요."

 그런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코숏은 코리안 숏헤어의 줄임말이다. 숏헤어라면 단모종만 있단 얘기 아닌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다물었다. 뭐, 나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깐. 어릴 때 털이 좀 길다가 자라면서 점점 짧아지나 보다.


 주인이 들고 온 간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둘째와 대머리를 바라보며 셋 중에 한 마리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 둘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저 뻔뻔함이라니, 처음 보는 내게 배를 만져달라며 집적대는 저 기술. 저 정도 뻔뻔한 태도라면 낯 가리는 우리 첫째와도 잘 지낼 거 같다.






 집에 돌아와 찍어둔 사진을 다시 열어 봤다. 아무래도 희한하단 말이야. 털이 왜 이렇게 길지? 우리 첫째 어릴 때만큼은 아니어도 확실히 길다.


 뒤통수를 긁으며 인터넷을 켜 고양이 카페에 접속했다. '코숏', '코숏 어릴 때', '숏헤어', '털이 긴 단모종’ 등 평범한 단어에서부터 이상한 조합까지 다양하게 검색해봤는데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낯 가리는 사람처럼 글은커녕 댓글도 잘 안 달고 훔쳐보기만 했는데 글을 올려볼 수밖에 없는 걸까? 얼굴이 드러난 사진이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이 익명의 공간에 글 올리는 게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모르겠다.


  찍어둔 느티나무 꼬리털 사진을 첨부하고 제목을 썼다.


 '원래 코숏은 크면서 털이 짧아지나요?'


 뒤통수를 한 번 더 긁고 내용을 써나갔다.


 '입양을 고민 중인데 이상하게 털이 길어서요. 입양해주시는 분이 코숏이 맞다고 하시네요. 엄마, 아빠 고양이는 다 코숏인데요. 남매 고양이도 털이 길더군요. 원래 단모종 고양이들은 어릴 때 털이 좀 길다가 점점 짧아지는 건가요?'


   없는 사람이 말투가 왠지 재수 없다며 신상을 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올리는  무섭다. 조금 기다리니 댓글이 달렸다.


 '명백한 장모종인데요?'

 '조상 중에 장모종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애 사진 안 올리면 불법입니다.'


 마지막에 달린 댓글에는 많은 사람들이 'ㅋㅋㅋㅋㅋㅋ'로 응답해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코리안 롱헤어네요.'




 


 며칠 고민 후 입양 의사를 밝혔고 그 주 토요일에 동물병원에서 만나 건강 상태를 점검한 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역시나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계속됐다. 주인분은 보라색 롱 패딩을 입고 담요를 가득 담은 캐리어에 둘째를 넣어 왔다. 검은색 롱 패딩을 입고 있던 나는 반갑게 달려갔다. 보라 롱패딩이 검정 롱 패딩에게 캐리어를 넘기며 일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된다고 혹시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메시지 남겨달라고 했다. “캐리어 안에 애기가 제일 좋아하던 장난감이랑 인형 넣어뒀어요.” 주인분은 캐리어 안을 자꾸만 들여다보다가 몸을 쭉 펴 한숨을 쉬더니 그대로 뒤돌아서 갔다.


 둘째의 얼굴을 마주 본 수의사는 싱긋 웃었다. "얘 할머니도, 엄마, 아빠도 다 제가 봐왔고 뱃속에 있을 때부터 계속 봐온 애라서요. 건강할 거예요."


 "그런가요?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얘 왜 이렇게 털이 길죠?"

 "증조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장모종이었을 거예요."

 "아. 전 또… 원래 코숏은 자라나면서 털이 짧아지는 줄 알았어요."

 "하하하하. 얼굴 모양새나 털 자란 모양새를 보니깐요. 얘는 아마도.... 어? 첫째랑 종이 같은데요?"

 

 둘째 얼굴을 잡고 보니 정말 그랬다. 첫째랑 닮은 듯 안 닮았다. 그렇게 흔한 종이 아닌데 어쩌다 길거리를 돌아다녔던 걸까?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중성화 수술도 받지 못한 채 길고양이가 됐을까? 아니면 마당 냥이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버둥거리는 둘째를 한번 쓰다듬고 고개를 들어 수의사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얘 이름 정했어요. 코롱이요. 코롱. 이 이름으로 등록할게요."

작가의 이전글 고양이를 키운다면 잘 먹어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