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길 바란 적 없던 이들에게 바칩니다
**갈라테이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현실의 여성들에 환멸을 느낀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스스로 빚은 이상적인 여인의 조각상이다. 피그말리온이 아프로디테에게 그녀를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 기도하자, 여신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고 조각상은 생명을 얻는다.
제발, 저를 태어나기 전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오늘도 갈라테이아의 목소리가 신전을 울린다. 사제들은 그녀를 미친 여자로 본지 좀 됐다. 중얼거림과 찢어지는 비명을 오가는 기도가 안쓰러웠는지 누군가 앞에 물 한 잔을 놓고 간다. 갈라테이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생명을 얻기 이전의 어렴풋한 감각을 기억한다. 매끄럽고 반짝이는 돌이 아닌, 거침없이 우뚝 선 산이었던 시절. 거칠게 솟아오른 우리의 굴곡은 인간이 쌓아 올린 어떤 구조물보다 거대했다. 등성이에 아른거리는 구름의 촉촉함으로 목을 축이고, 뜨거운 달빛으로 몸을 말리던 시절.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우리만, 영겁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온 그 절대적인 침묵만이 있을 뿐.
쨍, 하는 정의 소리가 머리에 맴돈다. 우리를 내려쳐 나를 떼어낸 최초의 충격. 이어서 덩어리 구석구석을 깎아내고 긁어내던 끌의 선단도. 눈이라는 것을 뜨던 날을 되새긴다. 괴상하게 생긴 사지 끝에 기다랗고 작은 촉수 다섯 개가 자라 있는 몸. 석산을 기어가던 뱀의 가죽과도, 가끔 웅웅대던 딱정벌레의 껍데기와도 다른 축축하고 따뜻한 피부. 꼭대기엔 뿔 대신 이상하게 긴 털이 덮여 있는 인간의 몸. 그리고, 힘겹게 눈꺼풀을 열자 쏟아지던 빛. 아, 연약한 동공 위로 무자비하게 내리쬐던 그 빛. 하얗게 부서지던, 울음을 터뜨리고 싶게 만들던 그 아스라한 빛.
빛의 강렬함이 가시고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광경은 입을 떡 벌린 채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이었다. 희한하게 번들거리는 수정체를 가진 그는 (나중에서야 그것을 예술가 혹은 광인의 눈이라고 부름을 알았다) 잠시 그 큰 눈을 더 휘둥그레 뜬 채로 서 있더니, 그녀 앞에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나는 너를 주인이 아닌 연인이자 배우자로서 대해주마 맹세했다. 혼란에 빠져 있는 그녀의 손목을 끌고 길거리로 나가, 내가 아프로디테의 현신을 탄생시켰다며 환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그의 첫 문장을 되새기고 있었다. 소유와 종속? 애정과 결합? 아무리 노력해 봐도, 그토록 인간적이고 어색한 개념들은 그녀의 말랑한 뇌를 겉돌 뿐이었다.
잠시 뒤 사람들이 몰려왔다. 모두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벌거벗은 몸을 실크 로브와 향유로 둘러싸며, 이곳저곳을 짚어가며 상세히 칭송했다. 그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 눈으로 보기에는, 머리털과 가죽의 색이 어떻든, 벌어진 골반 뼈와 허리 가장 오목한 곳의 비율이 어떻든 인간들은 다 비스무리해 보였다. 단지 불편할 뿐이었다. 목의 근육을 뻣뻣하게 만드는 화관과, 발바닥을 찌르는 굽 높이 신발과, 몸을 움직일 때마다 따라붙는 시선이.
말간 대리석 조각상이 여자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 지 보름째다.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를 여전히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녔다. 연회장으로, 축제로, 극장으로. 사내들이 둘러앉은 황금빛 테이블 옆에 갈라테이아를 다소곳이 세워놓고 쏟아지는 경탄을 만끽했다. 꽃과 음악이 흩뿌려진 광장 한복판에 갈라테이아를 데려가, 얼굴을 가린 사제들의 행렬 사이에서 더 빛나는 미모를 감상했다. 원형 극장 맨 뒷줄에 갈라테이아를 앉히고, 뭇 관중들의 관심이 숭고한 신들의 이야기보다 그녀의 치맛자락에 쏠리는 걸 흐뭇하게 바라봤다. 갈라테이아라는 경이가 키프로스를 뒤덮은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탄성과 한숨이 이어졌다. 그녀가 지금 이 섬에서, 아니 그리스 전체에서 가장 진기한 보물이며, 그녀를 가진 자는 피그말리온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피그말리온의 굳은 미소 뒤 비밀을 눈치 채진 못했다. 화려한 낮의 시간이 끝나고 거뭇한 밤이 찾아올 때, 그의 베갯잇에는 관능의 향기 대신 굴욕의 냄새가 감돈다는 진실을. 그는 그녀를 탐할 수 없었다. 사랑할 수 없었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난 첫날부터 아무리 시도해 봐도 몸은 맘대로 되지 않았다. 치욕에 이를 부드득 갈고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누운 그의 머릿속엔 원망이 가득 차올랐다. 여신이 나를 엿 먹인 걸까? 그럴 수도 있다. 진정 그녀가 나의 소원에 감읍했다면 나와 갈라테이아를 별자리로 만들어주었겠지. 황홀한 조각상 여인 옆에 누운 피그말리온 자리. 아프로디테는 나를 비웃은 거다. 신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들에 필적할 만한 재능을 가진 인간을 찍어 누르고, 갖고 놀고, 천벌을 내려 본보기를 보이고 싶어 한 거다. 그러기에 나의 간절한 꿈을 악몽으로 바꾸었겠지.
그래,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갈라테이아는 이상적인 여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말이 너무 많았다. 언제나 왜?를 입에 달고 살았다. 연회에서의 진지한 대화 중, 그녀가 갑자기 끼어들어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창피를 당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행히 사람들은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현혹되어 트집을 잡진 않았지만) 그녀의 끝없는 질문을 무시하자, 도서관에 몰래 침입하려다 잡힌 적도 있다. 철학, 과학, 의학 책을 읽고 싶었다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무지하다는 구차한 변명에 약간의 뒷돈까지 동원해 경비로부터 그녀를 건네받아야 했다. 정숙함의 미덕을 아무리 엄하게 가르쳐 봐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 이름을 주절거리며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호소를 했다. 아무리 막아 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천한 사람들과 말을 섞었다. 냇가에서 빨래하고, 땡볕에서 밭을 매고, 급기야는 매음굴에서 몸을 파는 이들하고도. 수치라고는 모르는, 주제넘고 뻔뻔한 여자.
심지어 피그말리온은 어느 날인가부터 그녀가 밤마다 몰래 빠져나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라도 빠진 건지 의심스러운 마음에 뒤를 밟아보니, 그녀의 행선지는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다.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여신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바치려나, 싶었는데 그녀의 기도는 태어나기 전으로 돌려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괴물같이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이 얼마나 무례하고 방자한 일인가. 신에게도, 나에게도. 그곳의 사제들이 묵언 서약을 했기에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피그말리온의 위신은 땅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어느새 피그말리온의 기도도 그녀의 것을 닮아갔다. 신이시여, 이 가증스럽고 쓸모없고 가진 것이라곤 피상적인 아름다움뿐인 여인의 생명을 다시 앗아가소서.
갈라테이아가 여느 여자들처럼 피를 흘렸다. 태어난 지 한 달째의 일이었다. 피를 흘린 건 갈라테이아인데 피그말리온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불결하고 부정한 일. 피그말리온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 그녀는 더 이상 미의 화신이 아니었다. 음식과 술을 먹으면 오물과 피를 배설하는 한낱 인간 여자에 불과했다. 갈라테이아는 욕망한다, 생각한다, 허겁지겁 먹는다, 목소리를 높인다,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루한 티를 낸다, 몸에 털도 자란다… 나는 추함을 조각하지 않는다.
갈라테이아는 실패작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피그말리온은 허겁지겁 다시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혹시 그녀가 빠져나가 온 세상에 그의 패배를 알리지 못하도록 빗장을 걸어 잠그는 걸 잊지 않았다. 그가 빚고 싶었던 건 완벽한 연인이자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이지 이깟 불량품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끌을 들고 상앗빛 돌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이데아를 창조하리라. 이 세상에 없었고 앞으로도 두 번 다시없을 여인. 이번엔 멍청한 사랑의 여신 따위의 권능은 필요 없을 것이다. 내 손으로 모든 걸 빚어내리라.
집 안에 먹을 것이 떨어질 때 즈음, 갈라테이아는 닫힌 작업실 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굶주렸고 목말랐다. 밤낮으로 들려오는 돌 쪼개는 소리에 머리가 멍했다. 이 교도소 안에서 일분 일초를 더 견디느니, 피그말리온의 허리대로 얻어맞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녀는 조심스레 노크했지만 정적만이 흘렀다. 결국 갈라테이아는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다시, 눈이 멀 것 같은 찬란한 햇빛. 그 속에 흩어진 여체의 파편들. 가슴, 허벅지, 머리칼, 손목, 발바닥, 목, 쇄골, 그리고 형언하기 어려운 잔해들. 아담한 젖가슴을 위해 떼어낸 살덩이. 완만한 곡선을 위해 뜯겨 나간 뼈. 벗겨지고 떨어져 간 갈라테이아의 영혼도 그 더미 틈에 섞여 있을 테다. 피그말리온은 굽은 등에서 먼지와 땀의 냄새를 풍기며 작업대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갈라테이아의 시선이 그의 앞에 놓인 새로운 피조물을 향했다. 믿을 수 없게 둥글고 희고 미끈한 것. 인간보단 알에 가까운 그것. 입도, 코도, 눈도, 귀도 없이 단 하나의 구멍만 뚫려 있는 몸뚱이. 갈라테이아는 자기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거꾸로 솟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온몸의 살갗이 뒤집히는 역겨움, 혈관이 튀어나올 듯 팽팽해지는 긴장감. 얼굴에서 발끝까지 퍼져나가는 뜨거운 피의 진동. 이것은 모욕감일까? 분노일까? 환멸일까?
피그말리온이 휙 갈라테이아를 돌아봤다. 몇 날 며칠 밤을 새 핏발 선 눈으로. 탄생을 위해서는 무언가가 죽어야 하지. 더 나은 대체품이 생겼으니 원본은 필요 없지. 몸을 일으키는 그의 무릎에서 뿌득, 소리가 났다. 창조와 파괴의 흥분이 깃든 거친 숨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갈라테이아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끌 쪽으로 몸을 날렸다. 당신만 끌을 들 수 있다는 건 오만이지. 당신의 난도질은 우리를 모욕할 수 없어. 석산으로 버티고 선 우리를, 수천 번 갈라져도 깨어지지 않은 우리를, 피를 흘려도 끝내 죽지 않는 우리를.
갈라테이아가 끌을 내리쳤다.
어쩌면 피그말리온보다 더 확신에 찬 몸짓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