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6'5피트의 백인 남성이 되어있었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 코랄리 파르자 <서브스턴스>에 대한 오마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조혜윤이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자신의 머리칼 한 줄기가 끔찍한 금발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혜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금색 털을 배배 꼬아본다. 술에 취한 룸메이트의 장난일까? 중간고사 스트레스로 새치가 올라온 건가? 좀 더 어릴 때 재미삼아 머리 전체를 플래티넘 블론드로 탈색해본 적은 있지만, 그때의 거칠거칠한 모질과는 확연히 다르다. 혜윤의 자연모보다 훨씬 얇고, 힘 없고, 부드러운 모발. 마치 크리스의 머리카락 한 뭉치를 똑 떼어 그녀의 두피에 이식한 듯하다.
아, 크리스는 혜윤의 애인도 친구도 아니다. 혜윤 내면의 또다른 자아다. 일 학년 때 조별과제를 같이 했던 선배에게 영감을 받아 탄생한 이중 인격. 크리스는 금발 벽안의 백인이며, 헤테로 시스젠더 남성이고, 파크 슬로프의 중산층 가정에서 고이 자란 도련님이다. 부모님에게서 100% 펀딩 받은 동아시아 여행 중 “하지메마시떼” 정도 배워 놓고 링크드인에 당당히 일본어가 가능하다고 적으며, 강의 중 손을 번쩍 들고 자기 딴엔 예리한 질문을 던지며 흐름을 끊는 걸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크리스를 키우기 시작한 뒤부터 혜윤의 삶은 훨씬 쉬워졌다. “크리스라면 이렇게 했을까?” 되새기는 것 만으로도 동양인 여성의 DNA엔 탑재되어 있지 않은 용기가 솟아올랐으니까. 학과장 면담, 기말 발표, 조교 면접, 데이팅 앱으로 만난 미식축구 선수와의 첫 만남 전. 혜윤은 적재적소에 크리스를 끄집어냈고 매번 통했다. 한 번도 스스로를 의심해본 적 없는 이의 자신감을 장착한 조그만 이국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혜윤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대충 묶고 기숙사를 나선다. ABG들과 코리안 타운의 삼겹살집에 가기로 한 날이므로. 아시안 베이비 걸 Asian Baby Girl이 아닌 화나있고 파산한 여자들 Angry Broke Girl로서의 아시아계 여학생 모임. 혜윤의 새 헤어 스타일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이왕 할 거 동양인 답게 보라색 브릿지로 하지 그랬냐,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유행에 편승해 너도 한국으로 돌아가 아이돌이라도 하려는 거냐. 의과 소속의 대만 친구 메이에게 토로해봤지만 의학적으론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말뿐이었다. 멜라닌 합성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돌연변이나 내분비 교란이 있었다고 해도 하루 아침에 머리 색이 일부만 변할 수는 없어. 탈색이나 외부 손상 아니면 말이 안 돼.
18.95달러짜리 소주병이 테이블 밑에 쌓여갈수록, 혜윤의 금발 미스터리는 고기 굽는 연기와 고성에 섞여 뭉게뭉게 흩어졌다. 분명 이상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한 일도 일어나는 세상인데, 뭘. 얼큰한 얼굴로 찍은 셀피 속, 왼쪽 귀 뒤를 타고 흐르는 몇 가닥의 샛노란 머리카락이 은근히 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검은 염색약을 사야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접은 채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혜윤의 어깨 쪽에서 투두둑 소리가 들렸다. 야심차게 개시한 오프 숄더 블라우스가 튿어진 것이다. 아이씨, 혜윤은 조그맣게 탄식했다. 발이 부었는지 오늘따라 매일 신던 뮬도 꽉 끼는 듯 하다.
이런 씨발! 매일 눈 뜰 때마다 혜윤은 거울 앞에서 입을 틀어막았다. 몸이 조금씩 달라졌다. 어제는 눈 색깔이 푸르딩딩하게 밝아졌고, 오늘은 가슴 대신 갑빠가 생겼고, 내일은 살갗이 파리해졌다. 처음엔 술이 덜 깨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나중엔 누군가 텀블러에 몰래 약이라도 탄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손으로 몇 번을 쓸어봐도 목 정중앙에 불거진 울대의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괴상한 변이가 시작된지 일주일 째, 마침내 그녀의 성기 사이로 (불행 중 다행으로) 꽤나 길다랗고 축 늘어진 해면체가 튀어나왔을 때, 혜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911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911이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제가 6’5피트의 백인 남성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정신병동에 강제 입원이라도 당할 각오가 되어있었지만, 상담원은 지치고 낡은 목소리로 장난 전화는 연방법에 따라 엄격히 처벌받을 수 있다는 안내를 남기고 뚝 끊어버렸다.
그 냉정한 통화 종료음이 혜윤의 현실 감각을 일깨워줬다. 이렇게 평생 방에 갇혀 살 수는 없다. 혜윤은 비장하게 샤워를 했다. 생경한 감촉을 느끼며 팔다리 구석 구석을 문지르고, 겨드랑이용 면도기로 수염을 어설프게 정리하다 턱을 몇 번이고 베일 뻔 했다. 가장 큰 티셔츠와 반바지를 걸치고 옥수수 수염처럼 변해버린 머리는 번으로 묶은 채 기숙사 문을 열고 결의에 찬 발걸음을 디뎠다.
희한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캠퍼스를 서성이는 혜윤을 보고 친구들이 손을 흔들자 그녀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도대체 어떻게 나를 알아본거지? 역시 이 모든 게 착각이었던 걸까?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조잘대는 친구들의 목소리에 울컥해 눈물을 흘리기 직전, 혜윤은 뒷통수를 쾅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며칠 간 왜 잠적한거야, 크리스?”
정정한다. 모든 것이 변했다. 히에이윤 초 Hyeyoon Cho는 크리스 조 Chris Joe가 되어버린 것이다! 삼류 블랙 코미디, 아니 옐로 코미디 같은 상황에 현실을 아무리 부정해봐도 소용없었다. 혜윤이, 아니 크리스가 결국 변해버린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동양 여자의 가죽을 주고 이 사회의 디폴트 값인 서양 남자의 껍데기를 얻는 건 나쁘지 않은 장사잖아? 스스로의 외모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사라진 게 아쉬울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적도 없었다. 어차피 외면은 외면일 뿐이니까. 완전히 달라진 이름과 색깔과 부피와 모양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혜윤을 알던 사람들은 이전과 비슷하게 그를 대해주는 듯했지만, 크리스는 그 속에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마이크로 레이시즘처럼 은밀하지만, 그와의 정반대 방향인 것.
크리스는 더 이상 흥미로울 필요가 없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호감을 가졌다. 혜윤이던 시절, 첫 만남 자리에서 입을 뗄 때마다 흔들리던 동공을 기억한다. 저 여자의 이름을 과연 내가 발음할 수 있을까? 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면 괜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놈으로 몰리는 거 아냐? 경계심으로 굳은 표정은 혜윤이 평생을 노력하며 깎아온 악센트 없는 표준 발음을 들은 후에야 사르르 풀리곤 했다. 크리스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파티에서 <오징어 게임>과 BTS가 아닌 다른 주제로 스몰톡의 포문을 열 수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이름 스펠링을 두 세번씩 또박또박 불러주지 않아도 됐다. 안전하다는 감각은 덤이었다. 어두운 밤에 혼자 러닝을 하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총기 난사범은 무섭지만, 약에 취한 십대 남자애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갈 때도 ‘여차하면 한 주먹 거린데 뭐’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수업에서도 크리스는 거의 날아다녔다. 혜윤에게는 너무 편향되고 감정적이고 과격한 의견에 불과했던 것들이, 크리스의 성대를 거치면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흥미로운 주장이 됐다.
유일한 골칫거리는 Diversity and Representation in Cinema 수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업 자체가 아니라 같이 듣는 량현이 문제였다. 한국인도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꿋꿋이 쓰는, 아시안 디아스포라 및 여성 인권의 선봉장인 량현. 그녀가 특유의 갈라지는 목소리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낼 때면 강의실의 공기가 얼어붙는 게 느껴지곤 했다. 혜윤과 량현은 더할 나위 없이 잘 맞는 강의실 짝꿍이었지만, 크리스가 된 이후 량현은 매 수업마다 그를 혀로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진 알겠지만, 오직 특권층만이 할 수 있는 발언 같아요. 이 논제에 말을 얹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고찰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량현과의 우정을 회복하고 싶어 머리를 싸매던 크리스는 종종 그랬던 것처럼 걸스 나잇을 제안했다. 다운타운 드랙쇼를 보고, 클럽 몇 군데를 전전하다, 량현의 쓰러져가는 아파트에서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세상 만사에 대해 토론하기. 여느 나잇 아웃처럼 즐겁고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대마초와 담배 냄새에 찌든 시트 아래 량현과 알몸으로 부둥켜 안은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만 빼면. 느지막히 일어난 량현은 먼지 낀 햇빛 아래 빛나는 크리스의 푸른 홍채를 지긋이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곤 그를 내쫓았다. 다음 수업부터 량현은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당사자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정체성의 경계를 확장하는 앨라이도 필요하다며 그를 두둔하곤 했다.
모든 게 쉽게 풀렸다. 크리스는 아시아 여성의 지력과 백인 남성의 피지컬을 갖춘 하이브리드 인간이었으니까. 혜윤의 존재조차 몰랐던 교수가 크리스에게는 인턴십 자리를 제안했고, 캠퍼스 내 소수자 영화제에서 다양성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명목으로 장학금까지 받았다. 차별 해소를 위한 교내 위원회의 ‘백인 쿼터’를 당당히 차지하기도 했다. 이윽고 졸업이 가까워졌을 때, 크리스가 교수와 동료 학생들의 압도적 추천으로 졸업식 대표 연설자로 선정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졸업식 날 아침, 크리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의 머리칼 한 줄기가 끔찍한 흑발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필 오늘? 하필 지금? 패닉 상태로 몇 번이고 머리를 다시 감아봐도 까맣게 물든 색깔은 빠질 기미가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심정으로 거울을 보니, 이번엔 왼쪽 동공에 어두운 다갈색의 반점이 번져 있었다. 인공 눈물을 아무리 흘려보내도 닦이지 않는 잉크 자국. 크리스는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른다.
졸업식은 이미 시작했을 시간이다. 크리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강당으로 달려간다. 총장의 개회사가 거의 끝날 무렵 간신히 도착한 그는 숨을 헐떡이며 무대에 뛰어오른다.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비추자, 환호성이 쏟아진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관객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한다.
“Good morning, faculty, families, and my extraordinary peers.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님들, 가족 여러분, 그리고 나의 특별한 동기 여러분.”
덜그럭, 까득. 근골격계가 휘청이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퍼진다. 혜윤-크리스의 한쪽 다리가 훅 짧아진다. 거의 내려앉을 뻔 한 그는 단상을 붙잡고 겨우 일어선다.
"Four years ago, I arrived on this campus not knowing who I would become. 4년 전, 저는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른 채 이 캠퍼스에 도착했습니다.”
웅성웅성, 청중들 사이에 파동이 인다. 모근 사이로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듯한 샤샥, 마찰음이 들린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레몬빛 털 사이로 먹색 실오라기가 자라나고 있다는 걸. 두피를 뚫고 올라오는 수천 가닥의 검고 굵은 심지. 혜윤-크리스의 뒷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I thought I had to be someone. Someone different. Someone interesting. Someone worth being heard. 저는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들과 다른 사람이든, 흥미로운 사람이든, 귀 기울여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든 말입니다.”
직사광선 아래 너무 오래 있었을 때처럼 간질간질하고 따끔하다. 혜윤-크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긁는다. 창백한 우유빛 피부 위로 카페오레가 쏟아진다. 연한 살구색과 베이지색이 섞인 모반이 비선형적으로 마구 뻗어나간다. 잭슨 폴록의 추상화 작품처럼 사지에 얼룩이 흩뿌려진다.
“But the truth is- 그러나 진실은-“
혜윤-크리스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다. 목젖이 위아래로 꿀럭대다 분화를 앞둔 화산처럼 가운데만 푹 파인다. 메조소프라노와 바리톤을 오가는 음색이 불협 화음을 빚는다. 더 이상 못 봐 주겠다, 우우. 내려가라, 우우. 객석에서 야유와 함께 사과가 날아든다. 퍽, 둥그런 홍옥이 혜윤-크리스에게 적중해 서로에게 멍을 남긴다. 썩은 과일에선 와인과 식초 냄새가 진동한다. 혜윤-크리스는 결국 무너진다. 웅크린 몸 위로 온갖 것들이 쏟아진다. 사과, 토마토, 김치, 석류, 핏덩이, 페인트볼, 꽃다발… 파란 학위복이 붉고 찐득하게 덮인다. 더러운 혼종! 주류 사회의 부역자! 커뮤니티의 배신자! 위선자! 바나나!* 인종차별자! 여성혐오자! 정신분열증!
직원들이 달려와 혜윤-크리스를 무대 뒤로 끌어낸다. 혜윤-크리스는 발버둥치지만 균형이 깨진 육체는 말을 듣지 않는다. 총장은 다급하게 맨 앞줄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체 연설자에게 눈짓한다. 인디라 샤르마, ABG 모임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철학과 인도인 여학생이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무대로 올라가 산뜻한 얼굴로 연설을 재개한다. 구겨진 혜윤-크리스의 대본을 손으로 슥슥 밀어 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끊긴 부분부터 정확하게 다시. 스포트라이트는 침착하게 인디라를 비춘다. 안심한 관중들은 비로소 다시 환호한다.
백스테이지의 장막이 시야를 가리기 직전 혜윤-크리스는 보고야 말았다. 인디라의 뒤통수 아래쪽에 뻗어나온 밝은 금발 한 줌을.
*바나나: 바나나의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특성을 비유하여, 백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동양인을 비하하는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