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자의 목소리

Sterben werd'ich, um zu leben

by 송옥돌
R에게.


생일 축하해, R. 네 손녀가 올린 사진을 봤어. 내가 평생 닿을 수 없는 모습으로 고정된 당신을 한참이나 들여다봤지. 나는 여전히 그대로야. 널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단 일 초도 늙지 않은 모습으로.


13일의 금요일마다 우리만의 농담처럼 흡혈귀 영화를 보던 거 기억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렛미인>, 심지어 <트와일라잇>까지… 스크린 속 배우들을 보며, 너는 내게 뱀파이어나 드라큘라처럼 좀 더 무시무시한 호칭으로 불리고 싶진 않냐고 물었지. 그러나 난 어디까지나 흡혈’인’일 뿐이라고 딱 잘라 말하곤 했어. 얼마나 오래 이 땅에 존재해왔는지에 상관없이 난 여전히 인간이야. 내 해마의 당신의 것과 다를 바 없고, 아득한 세월을 지나며 머릿속에 남아있는 편린의 용량 또한 당신과 비슷할테지. 당신이 태어난 이래 몇 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렸듯, 내가 스쳐간 셀 수 없는 나날도 대부분 증발해버렸어.



당신이 날 부러워했다는 걸 알아. 목덜미를 깨무는 건 내 쪽에서 한사코 거절했지만, 네 눈물을 핥고 침을 마시게 두던 이유가 오직 사랑뿐은 아니었다는 걸. 내 파리한 손등을 쓸어내리는 뜨거운 손끝엔 동경과 욕망이 담겨있었다는 걸. 당신은 영생을 살게 되면 인생의 많은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거라 믿었지. 네가 1820년부터 살았는데 지금까지 거지라면 빠르게 마늘 장아찌를 한 통 들이키고 죽어버릴거라고 했어. 그 선연한 웃음이 듣기 좋아서, 우리 중 아직 영원히 산 것으로 알려진 이는 없다는 사실은 혀뿌리에서 삼켜버렸었지. 가장 장수한 흡혈인은 ---살까지 살았다고 전해져 내려오긴 하지만, 불과 3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사냥의 대상이었어. 십자가와 말뚝, 화형대와 성수. 익숙하지? 다행히 영화와 공포 소설이 등장하며 우리의 존재는 농담으로 치부됐고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


넌 미래를 궁금해했어. 당신이 살아 숨쉬는 그 짧은 동안에도 이토록 아찔한 진화가 일어났는데,백 년 뒤 천 년 뒤에는 어떨지 상상조차 안 된다고 몸을 떨었지. 당신이 말한 그 경이에 언젠가 감흥이 없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너의 또래는 AI와 양자 컴퓨터에 열광하지만, 전기와 핵무기와 인터넷과 우주선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도 같은 반응이었다는 걸. 너무 오래 살다 보면, 잔물결 하나 없는 권태의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 모든 걸 받아들이게 돼. 흐르는 물에 몸을 못 담그는 사람이 하기엔 적절치 않은 비유였군.



아무튼 R, 난 죽기로 했어.


생일에 전할 만한 말은 아니네. 미안해.


내 세포에 얽힌 생물학적 미스터리를 풀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 Vampirism을 전문으로 연구해온 스위스의 의료 센터래. 우리의 상태를 질병으로 정의하는 시각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나노 로봇을 활용한 그의 유전자 재배치 수술이 효과가 있다는 건 증명되었대. 맞아, 내 주변에도 이미 그곳을 방문한 친구들이 있어. 알다시피 나는 과감하거나 위험을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 그들이 ‘인간적’인 남은 수명을 건강히 누리고 스러지는 걸 마음 졸이며 지켜봤지. 일부러 어린애를 잡아먹어서 심장에 말뚝이 박히게 하거나, 태양 아래에서 바스러지는 것에 비해서는 나쁘지 않은 최후라고 하더군. 마지막 숨을 내쉴 때의 평화로운 표정이란. 순간 구석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들 얼굴에 드리운 한 줄기 햇빛에 손을 뻗고 싶어지더라고.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걸 느껴본 적 있어? 열 살의 너에게 일 년은 살아온 생의 10분의 1이었지만, 서른 살의 너에게 일 년은 30분의 1이지. 나에게는 매 해가 밀리초처럼 덧없이 지나갔는데, 수술 날짜를 확정짓고 나니 벌써부터 하루가 주욱 늘어난 기분이야. 시간이 모든 걸 치유한다는 말이 나에게는 매번 빗겨가곤 했는데, 이제는 나에게도 적용되려나?



이쯤 읽었으면 너는 아마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궁금해하겠지. 언제나처럼 눈썹을 한껏 올리고.


R, 나는 끝없이 반복되는 터부 사이 경계에서 춤추는 데 지쳤어. 나를 앞질러 늙어버린 연인 곁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도, 잉손(仍孫)보다 어린 나이의 새 사랑을 만나는 것도. 착하게 살기 위해선 동정심에 구걸하며 연명해야 하고, 그렇다고 나쁘게 살자면 매일 관 속에서 내가 앗아간 생명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도. 필멸자가 되면 이 사무치는 외로움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짧든 길든 삶에 붙어있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를 먹이며, 어딘가로 떠나며 끊임없이 걸어가야만 하지. 그건 생의 대가로 치뤄야 하는 필연적인 고독이니까. 다만, 시간의 주름을 벗어난 안전한 알 안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뿐이야. 영원한 건 없다는 걸 깨달으면 어른이 되는 거라던데. 성인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니 스스로 알껍질을 찢을 수밖에.


‘Sterben werd'ich, um zu leben’, 이 구절 기억 나? ‘나는 죽으리라, 그리하여 다시 살리라’ 우리가 함께 맞은 첫 번째 봄, 동네 콘서트홀에서 들은 합창의 가사야. 백여 년 전 비엔나에서 말러가 교향곡 2번을 초연하던 날의 공기는 거의 잊혔지만, 음악이 피날레로 치달을 때 벅찬 눈물을 참으며 가슴을 들썩이던 네 모습은 내가 소멸하는 그 날까지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아. 너에게서 흘러나오던 작은 한숨 같은 감탄이 겹겹이 쌓인 화음보다 더 황홀하게 들렸지. 질투가 나기도 했어. 나도 그 환희를 느끼고 싶어서. 언젠가 끝나기에 더욱 눈부신 절정을, 너처럼 온몸을 울리는 전율로.


나는 살거야, R. 지금껏 내가 거쳐간 나날은 그저 생존에 불과했어. 불멸은 단지 죽지 않는 상태일 뿐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지. 결말이 없는 이야기 속에선 어떤 장면도 의미를 갖지 못하듯이 말이야. 억겁의 세월동안 유일하게 겪지 못한 단 하나의 경험을 위해 몸을 던져보려 해. 고여있지 않은 삶, 그 속으로.


이제야 비로소 피를 먹는 사람이 아닌 피를 흘리는 인간으로서 살아보려 해. 은반지를 주렁주렁 끼고, 흐르는 강에서 수영하고, 선베드에 누워 따스한 햇살로 몸을 데우고, 거울을 보며 늘어가는 흰 머리를 뽑아도 보고, 네가 제일 자신있는 요리라던– 그래서 나에게 먹이지 못하는 걸 못내 아쉬워 했던 - 알리오 올리오를 마구 먹으며.. 그리고 언젠가는 너를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오랜만에 손글씨를 쓰니 마디마디가 배기네. 이만 줄일게. 손편지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이 고백만큼은 꼭 종이에 펜으로 눌러적어야 할 것 같았어. 이 편지지는 곧 바래지고 닳아가겠지. 잉크가 먼저 날아가버릴 지도 몰라. 영원하진 않겠지만 그래서 더 찬란하리라 믿어. 마치 네가 그랬듯이.


곧 만나, R.

사랑해.



죽음을 앞두고,

네가 만났던 가장 오래된 애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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