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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태훈 Jun 04. 2019

영화 기생충 리뷰

정직함과 불평등의 비용, 살인의 의미


 본 글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주의 바랍니다.



무거운데 카르시스조차 허용하지 않는 영화

 묵직하게 한 영화가 내 삶으로 들어왔다. 이 영화를 소개할 때 가난과 불평등에 대한 영화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하지만 사실 가난은 인물들을 드라이브하는 소재일 뿐이며 감독이 주목한 현실인 거지. 영화가 성공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스릴러로서의 완벽한 구성과 기존의 선악 내러티브에 구속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생생한 묘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기우가 사기를 치는 순간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긴장의 탑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도 해소가 되지도 않고 계속된다. 여전히 김기택은 저택의 지하에 숨어있다. 김기우가 돈을 벌어서 그 집을 살 확률은 합법적이고 정직한 방법으로는 없다. 잔인하리 만큼 긴장과 우수의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크레딧이 내려올 때 묵직한 무게가 보는 이의 기억으로 쑥 들어온다. 탑이 무너지기를 바라면서도 방법을 모른 채.


정직한 가족 

 봉준호 감독은 선악을 상정하지 않고 영화를 그렸다고 인터뷰했다. 실로 그러하다. 작중에 누구 하나 악한 인물이 없다. 대개 부자가 나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게 통상의 권선징악 내러티브가 지배했던 한국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이야기였겠지만 이 영화에서 부자가 나쁘게 묘사되는 지점은 영화 극후반에 인디언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박사장이 김기택에게 고용관계를 은밀히 강조하는 부분이 유일할 것이다. 김기택이 돈을 받는 날이었으니 폭언도 아니다. 무슨 일인지 뚱하게 눈을 깔고 있는 사람에게 정신 차리라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통상의 상황에선 사람을 살해할 동기가 될만한 사건도 아닌데 그날은 좋은 날이 아니었다. 침수된 집, 살인죄, 냄새에 대한 자기혐오 가난이 아니었으면 없었을 것들이 자구 김기택을 몰아간다. 마침 그때 돈만 주면 '감정노동'도 정당하다고 믿는 박사장과 만나면서 박사장을 살해하는 트리거가 당겨진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박사장과 아내는 타인을 지배하려는 속성을 잘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보고된 사람들에 대해 조용히 해고하고 김기택에게 나는 냄새에 대해서도 그들 앞에서 직접 경멸하는 단서로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정직하게 살 수 있는 건 그들이 덕성을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위협들을 돈으로 회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직한 가족

  김기택 가족들은 그럼 나쁘게 그려진 점이 있을까. 김기택 가족들은 모두 부정직한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국사회는 정직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건 무능한 사람이다. 요령이 없는 거고 해맑은 웃음에 거짓말이라도 하면 속아 넘어가 주는 문화까지도 있다. 김기택 가족은 그런 문화에 적응한 사람들이다.  거짓말에 능수능란하다. 그리 오랜 시간을 저택에서 보낸 것도 아닌데 금세 박사장의 집을 자기 집처럼 이용할 정도로 뻔뻔해진 인간들이다. 회사 자산을 사유화하고 회사원들을 사적으로 부리는 한국 가족기업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악에 대함에 묘사는 초반에 가난에 대한 묘사와 함께 뭉그러뜨려진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관철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심리적 비용이 있다. 바로 정직에 크게 가치를 두지 않아도 괜찮다는 유혹이다. 정직이란 가치는 본래 상호협력을 가정한 진화적 이익의 결과다. 허나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은 손에 들어오는 기회를 잡기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허접하게 접은 박스에 기여한 자신의 노동가치를 자기주장을 통해 관철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뻔뻔함은 그런 맥락에서 피어난 것이라 초반에 깔아 두었기에 김기택 가족들과 또 다른 기생충 가족들의 갈등은 그들을 악성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란 메시지로 치환되어 전달된다.


아쉬운 점

 약간 이 영화에 약간 부자연스런 점이 있다면 아마 이런 부정직의 탑을 자연스레 쌓기 위해서 작중 인물들을 굉장히 유능하게 묘사하는 과정일것이다. 군대 가기 전 2년 군대 다녀오고 2년 수능만 공부했을 사람이 제대로 공부를 했을 리는 없고 평생을 공부하는 척만 했을 병적인 상태에 있는 김기우. 그는 그동안 고급 과외를 받아왔을 고2에게 영어를 가르칠 정도의 인간으로 묘사된다. 고2는 꼬맹이라 괜찮지만 학부모 앞에서 인상적인 쇼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김기우에게 과외를 맡긴 민혁은 김기우를 자신의 애인을 채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만만하고 무해한 인물로 평가하였고 그래서 과외를 맡겼다. 자신의 집에 오줌을 싸는 사람에게 정당한 항의도 하지 못하고 갈등회피적 태도로 살아가는 김기우가 신체적 접촉까지 동원한 설득쇼로 일자리를 쟁취하고 자기 가족들을 기생충으로 편입시키는 전개는 어불성설이다.

 

 이런 극의 구멍은 계속 이어진다. 무기력하게 화장실에서 와이파이를 기다리는 김기정은 과잉행동을 하는 아이를 순식간에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로의 행동 치료술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래도 그나마 김기정은 그녀가 원래는 정직하다는 인물로 묘사된 점은 없으니까 김기우보다는 나은 편이다. 김기택은? 그는 기사로서 일도 꾸준히 하지도 못한 채 박스접기와 같은 단기 알바에 연명하는 데다 그것마저 잘 수행하지도 못했다. 거기다가 무기력에 굴복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그는 극 중에서 깐깐하게 매사를 분석하는 박사장을 만족시킬 만큼 운전을 잘하고 가사수행도 한다. 마지막으로 짜파구리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음식에 무심하고 집안을 엉망으로 관리하는 기택의 아내 충숙은 대저택을 관리하고 높은 수준의 데코레이션을 요구하는 요리를 불만 안 나오게 잘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 모든 게 성공적인 기생충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사실 그 정도로 showing이라도 가능한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피자박스 접기를 잘 못해서 10%를 때이는 페널티에 죽을 각오로 덤벼야 하는 사람으로는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생충의 삶

 영화의 스릴러 구조는 부정직함이 부정직함을 만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른다. 지하에 숨어서 사는 부부의 서재를 보면 인텔리 계층의 부부였음을 알게 한다. 작중에 자꾸 영어를 쓰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제는 기생충으로만 가능한 그 삶이 애처롭다. 하지만 사업으로 몰락한 지하실 부부들과 새로운 삶의 기회를 잡은 김기택 가족들이 부딪치면서 부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럼블 배틀은 처절하고 보기 싫을 정도로 추악하다. 그리고 무섭게도 자연스럽다. 인간 몸에서 사는 대다수의 기생충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인간이 너무나 크고 기생충들이 인식 가능한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들도 병원에 가서 무해한 기생충을 일부러 죽이는 일도 없다. 그렇게 현실의 기생충은 작동한다. 하지만 영화의 기생충은 그런 자연의 타협을 용서하지 않는다. 충숙이 지하실 부부의 상납금을 받고 서로의 공존을 인정하는 선에서 그쳤으면 좋았겠지만 충숙은 그리 친화성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 상황을 근거로 지하실 부부를 좀 더 지배하려는 부정직한 성격을 드러내다가 자신도 기생충이란 사실을 발각당한다. 협상은 결렬되고 서로의 존재가 불법이라는 사실 때문에 경찰에 고발하기만 하면 다른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단순하고 강력한 사실 때문에 서로 죽여야만 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생존 뒤에 숨겨놨던 인간적 욕망

 지금까지 정직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양심적인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던 두 기생충 집답은 충숙이 문광을 발로 차는 사건을 계기로 최후의 양심까지 버리는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양심을 버리는 것은 지금까지 처럼 일자리를 얻거나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살인죄로 몰락할 위기에 빠진 집안을 구하기 위해, 어느 결단도 못하고 멘탈붕괴가 된 아버지의 고민을 덜기 위해, 뇌진탕으로 죽은 배우자의 복수를 위해서다. 김기우는 친구가 주고 간 돈을 부르는 수석을 박 사장 집에 들고 가고 지하실 남편은 올가미를 준비한다. 김기우는 죽고 뒤이어 김기정도 죽는다. 그 난리판에 박사장은 김기택에게 차키를 달라고 한다. 그는 김기택에 대한 자신의 경멸과 무시하는 감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그 난리판 속에 그의 우아한 인내심도 바닥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박사장은 정원에 쓰러진 과외교사의 아버지가 김기택인 것도 모르고 있었던 상황이다. 알았더라도 그는 피고용인을 내심 경멸하고 도구로서 대하는 것에 익숙해진 인간이었기에 그런 몰상식한 요청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박사장의 그런 요청은 그를 폭발시켜 그를 살인범으로 만들고 만다. 정직하지 못한 삶은 그 이익보다 더 큰 파멸을 부른다. 또한 험블하지 못한 (공감능력이 떨어진) 박사장의 태도 또한 불평등이란 현실 속에서 엄청난 트리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메시지는 영화에서 계속 반복된다.


김기택의 사정

 영화의 갈등은 지하실 부부와 김기택 가족에서 최종적 단계에 진입하는데 여기서 약간 엉뚱한 건 박사장의 죽음이다. 김기택이 박사장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을지 정리해보자. 김기택은 나름 덕담이라고 박사장한테 부부관계를 물을 정도로 그를 멀리하진 않았는데 박사장은 그가 냄새난다고 경멸하는걸 실시간으로 듣고 만다. 그리고 자신을 경멸하는 인간의 성생활을 나무가 된것마냥 관찰하고 있어야 했다. 지하실 부부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기생충 생활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게 고위직 공무원처럼 합적인 특권도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불법인데 그것마저도 불안하다. 집이 침수되고, 이재민을 수용한 체육관에선 지하실 부부를 어떻게 처리할지 답이 없다. 생각조차 하기 싫다. 그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계속 실패했다. 파티를 하는 사실에 들뜬상태로 쇼핑을 하는 연교의 공감도 안 되는 호들갑을 받아주는 게 자신의 운명인 게 비참하다. 자신을 경멸하는 박사장이 그 사실을 숨긴 채 고용관계를 강조하면서 제대로 하라고 핀치를 까는 게 역겹다. 부자들이 모여서 자신들만의 리그를 벌리는데 자신은 그곳의 기생충이라는 현실이 자꾸 아프다. 그럼에도 잘 살아가기 위해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죽은척하고 박사장에게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불평등의 숨겨진 비용

 극이 끝날 무렵 소위 말하는 '묻지마 범죄'에 대한 아나운스을 들려준다. 아마 봉준호 감독은 그런 사건들의 맥락엔 영화 기생충과 같은 사정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박사장은 젠틀한 사람이다. 김기택도 정신증 환자가 아니다. 그 사건의 맥락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았던 작은 트리거들과 사건의 동기들을 영화에서 하나하나 풀어 나갔던 것이다. 그 맥락, 트리거들을 쉽게 표현하면 어떤 단어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게 불평등의 숨겨진 비용이라 생각한다.

 

 주류 경제학자들이나 일부 낙관적인 과학자들은 현대 자본주의가 빈곤을 퇴치하는 완벽한 솔루션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허나 뒤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텔레마케팅을 필두로 시작되었던 아웃 소싱된 감정노동(AS센터로 대표되는)의 균형은 외적으론 완벽하다. 인도인들은 일자리를 얻고 기업의 영업익은 폭증한다. 선진국에서 영어로 제품 응대를 할 완벽한 메뉴얼을 만들고 인도 법인에 넘기면 인도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싼 영어가 가능한 감정노동자로서 열심히 일한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때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속에서 닳는다. 하지만 닳는 것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무관심하다. 그리고 더 큰 자유와 분업화에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고 그들의 경제성장 도그마를 다시 읊는다. 그런 자유시장에서 감정 노동하는 기생충의 비애가 시작된다. 이 영화는 그런 자유경제활동의 현실이 경제학의 그래프 마냥 아름답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게 숨겨진 비용이다. 환경비용만 비용이 아니다. 사람의 비참함도 비용이다.


엑셀 or 브레이크 기점에서

 왕도 아닌 것이 돈으로 왕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누군가 그것에 돈을 지불할 의사만 있으면 우리들이 믿는 자유경제활동은 성립된다. 돈에 허덕이는 사람은 아주 많이 있으므로 시스템은 원활하다. 그 속에 어떤 negative 효과가 있던지 주류 경제시스템은 그걸 측정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경제는 Geek경제, 공유경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를 볼 때는 이전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닳아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걸 어쩔 수 없는 경제발전의 과정이라 납득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눅눅하지 않다.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돈을 미끼로 타인을 지배하는 것을 '감정노동'이라 부르며 합리화하는 한 김기택은 자꾸 생겨날 것이다. 당신이 그 현실에 대해 유감을 표현하지 않는 한. 당신도 어느 날 박사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봐야 한다. 드러나지 않은 불평등의 비용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 한 주류 경제학적 관점이 채찍질하는 자기 파멸적인 노동으로의 편입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경제성장 도그마를 꼭 안고 제 2, 제 3의 김기택을 향해 달려가느냐 제동을 거느냐. 그 기점이다.


살인의 의미, 기생충의 의미

 폭력을 동원한 반란은 영장류들의 주요한 드라마다. 인간을 제외한 존재들의 저급한 이야기가 아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치솟는 경쟁에 따른 폭력 살해 비율이 높아지는 건 충분히 증명된 사실이다. 한때는 이런 폭력들이 유의미 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사각턱 정도나 두개골의 단단함만큼) 그런데 폭력을 지양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지지하는 우리에겐 이런 폭력은 평등을 위해서도, 생존을 위해서도, 돈을 위해서도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데 실패한 인간이 타인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정정하는 행위다. 기억되지 못하는 비참한 자들이 폭력으로 타인의 가슴에 자신의 존재를 세기는 행위다. 그런데 이건 삽질이다. 김기택의 존재가치를 다시 정정한 박사장은 그 순간에 죽었고 김기택은 지하실에 셀프 감금된다. 누구 하나 좋은 게 없다. 실행자의 자해행위다. 그것이 묻지 마 살인의 의미이자 우리가 맞이한 불평등의 주소다. 어떻게 할 것인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에게 불평등의 의미를 환기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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