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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태훈 Aug 29. 2022

멈추고 느끼고 다시 출발하기

인지 시스템과 일상의 프레임, 그리고 더 나은 수행을 위해

1. 편견의 탑


어린이의 시선

어린이의 짧은 편견

 어린아이와 어른이 보는 세상에 차이가 있다면 세상에 대한 편견의 정도일 것이다. 아이는 단순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린아이는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눈에 비치는 순수한 현실의 표면만을 바라보는 선택지 밖에 없다. 물론 인간의 조상들이 내려준 아주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편견들에선 자유롭지는 않다. 예를 들어 남자아이는 기계적인 것을 선호, 여자아이는 인간의 얼굴을 선호, 대칭적 물건을 선호하고 더 나아가 뱀의 형상에서 공포를 느끼고, 잘생긴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은 과학으로 증명된 현상이다. 따라서 말 그대로 순수하진 않지만, 어린아이가 장난감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편견이란 것은 기껏해야 '이건 좋고 저건 무섭다' 정도에 불과하다.


어른의 시선


어른의 깊고 넓은 편견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며 학습은 즉 편견을 뇌에 세긴 다는 뜻과 동일하다. 여기서 말하는 편견이라는 것은 악덕을 묘사할 때 일상적으로 쓰는 편견보단 학술적 관점에서 중립적인 호칭인 '편향'을 나타내는 bias로 해석하기를 바란다. 학습으로 새겨진 편견은 어린아이 때부터 가진 심층적인 편견보다 유연하고 주관적이며 더 추상적인 편견이다. 여기 에는 사물에 관련된 긍정적/부정적 경험, 추상적 정보체계, 사회적 맥락에서 합의된 상징,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에 대한 이해가 포함된다.


 예를 들면 아이랑 같이 마트에 가서 장난감을 볼 때 각 개체의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생각해보자. 아이가 장난감의 표면과 그 사용이란 본질적 용도에 주목할 때 이 어른은 가격에 주목한다. 숫자로 표기된 가격 뒤에는 문자시스템, 화폐시스템이 숨어 있으며 화폐 시스템은 교환이 벌어지는 시장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고, 시장 시스템은 경제활동의 단위로서 가계와 연결되고, 여기서 어른은 자신에게 축적된 부, 가용한 부를 떠올 릴 수 있고 나아가 불안까지도 느낄 수 있다. `장난감 → 화폐 → 시장→ 가계→ 가용한 경제적 여유→ 심리적 위축`이 긴 체인링크에도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조상님들의 편견이 끼어들 여지가 있지만 (인간들만 심적인 회계를 하는 게 아니다. 원숭이도 회계를 한다.) 이 체인링크는 후천적으로 회득한 믿음(편견)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화의 가치도 믿음으로 지탱되고 통장 잔액을 보고 위축될지 기분이 좋을지도 각자의 믿음 따라 결정된다. 믿음은 추상적 약속이며 증명되지 않았으며 잠재적인 기대다. 믿음은 유가증권 시장만큼이나 불안하고 유동적이다. 당신이 가진 주식의 액면액 500원은 확실하지만 시장에선 500원보다 더 비싸게 거래된다. 더군다나 그 가치는 오늘도 이해할 수 없는 원인으로 바뀌지 않는가. 믿음도 그렇게 바뀐다.


편견의 탑에 오른 어른

 그렇게 어린아이가 마트에서 자유롭게 세상의 표면을 관찰할 동안 어른은 쌓아 올린 편견의 탑에 올라 점차 물질적 표면 대신 편견의 탑에선 내려다본 일정한 프레임 속에서 세상을 관찰하게 된다. (객관적 성찰 끝에 인간적인 것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는 주관적 세계에 살고 -주의자는 -주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 탑에 오르면 멀리 보이지만 땅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게 어른이다. 어른이 땅을 떠나 탑에 오르는 이유는 다양하다. 물건을 사용하지는 않을 어른에겐 장난감이란 물질에서 얻을 수 있는 유흥보단 가격을 지불하는 과정과 그 아이를 돌보는 역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근본적으론 어른은 어린아이의 장난감보다 더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도파민의 분비 비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웬만한 자극으론 도파민이 분비가 되지 않는 어른에게 장난감은 생명력을 잃은 하찮은 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건 무의식으로 가라앉는다


2. 루틴의 탄생과 과잉

모든 것이 잠드는 공간, 루틴

 탑에 오른다는 표현은 일상적인 용어로 '루틴'이란 말로 고쳐쓸 수 있다. 관찰하고 연산하고 수행하는 과정을 단순하게 만들고 더 이상 심적 에너지를 쏟지 않음으로써 에너지를 절약하고 불안을 잠재우는 면에서 탑에 오르는 것과 루틴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루틴은 에너지를 줄이는 것은 효율적인 삶을 가능케 한다. 매번 막대한 결심을 해야만 행동할 수 있다면 인간은 어떤 일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습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만약 인간이 에너지를 절약을 할 수 없이 언제나 100% Alert 된 마음으로만 살아야 한다면 어젯밤에 뉴스에서 본 연쇄살인에 자신이 연루될 가능성을, 하루가 다르게 0원을 향해가는 통장의 잔액을, 사회의 부조리를 숨 쉬는 매 순간마다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런 좁아진 마음엔 위험을 감수할 선택이 드러설 자리는 전혀 없을 것이다. 생존할 수도 없고 머지않아 미쳐버릴 것이다. 


무엇을 위해 루틴은 울리는가? 바로 절약

 탑에 오른다는 것은 벌레가 기어 다니고 수많은 박테리아가 번식하는 복잡계인 흙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며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이고, 루틴 또한 사용하는 것도 복잡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의 페이스에 포커스를 맞추는 행위다 있다. 야구선수들의 습관적 행동을 일컫는데 쓰기도 하는 루틴은 심리학 용어인 휴리스틱과도 비슷하다. 휴리스틱은 지나치게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고 유효 타율을 올리는데 최적화된 인간의 행동전략을 말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탑이든 루틴이든 휴리스틱은 이런 압축적 행동(인지) 양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바로 에너지 절약이다. 에너지 절약은 생물에게 큰 이익인데, 우리가 그 이익을 말로써(과학적으로) 확실하게 다루기 위해선 물화(materialization)된 지표들이 필요한데 내가 찾은 그 이익의 이름은 도파민이다.


도파민과 루틴의 관계

 현생 생명체들이 가진 도파민 분비 시스템의 본질적 목적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게 이 시스템의 목적은 더 많은 도파민 회득 그 자체이다. 절약한 에너지는 우리에게 여유공간을 만들고 그 여유공간을 활용해 인간은 또 다른 도파민을 얻을 기회에 투자한다. 유명한 투자가 피터 린치라면 대형마트에서 카트를 끌면서 아이들이 열광하는 장난감에서 투자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고 그로 얻은 경력과 사회관계는 그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그때 도파민 시스템은 그가 카트를 내려놓고 어린아이와 같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보다 그 흥분을 루틴 속에 묻어두고 금융시장에서의 투자기회를 포착하도록 그를 견인했다.

 모두가 피터 린치처럼 그렇게 살아가진 않는다. 그보단 평범한 사람이라면 스마트폰을 열어 자신의 의견을 동조해주는 유튜브나 인터넷 뉴스를 보며 그 속에서 적대시할 인간군상(친동성애든 반성 동애든 친윤석열이든 반윤석열이든)을 찾아내 폭언을 쏟아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그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굳건히 굳힐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느냐는 도파민 시스템의 관심사가 아니다. 도파민을 주느냐 안 주느냐에 인간 행동의 방점이 찍혀있다. 생각을 하는 동물인 인간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지만 이런 도파민으로 인한 생각의 굴레 속에 수많은 실질적 가치들이 잠들게 된다.

 

인간화된 개와 달리 의식이 땅바닥에 붙어있는 고양이


과잉의 탄생

 어른들이 향유하는 믿음의 세계, '탑'에 동참하지 않고 땅바닥에 붙어 있는 사람들을 임상적으로는 유아 퇴행적 증상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반사회적인 인간, 또는 철이 없는 인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케이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일이기도 하니 생략하고 좀 더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행동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과도하게 머릿속에서 인지된 현실이 현실의 가치와 너무 괴리되어 가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거나 역으로 인지활동이 자신을 해치는 현상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이것을 '과잉'이라고 부른다. 심리학계에선 '역기능적 신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과잉은 루틴을 습득하는 행위, 탑에 오르는 행위가 건강한 피드백을 주지 못하는 모든 현상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폭식과 절식을 반복하는 사람에게 음식은 어린아이가 느끼는 풍부한 맛이란 맥락의 활용이 생략되어  있다. 이들에게 음식은 부호화(encoding)된 도파민이다. 도파민의 상징화된 아이콘이다. (피시방에서 스타크래프트 바로가기 아이콘을 복사해서 집에 있는 PC에 붙여 넣기 하면 스타크래프트를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초3 시절의 경험이 떠오른다.) 폭식을 하는 사람은 그 순간 도파민을 얻지만 섭식 활동의 현실적 가치인 건강유지에는 실패한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마약을 주사하기 위해 주사기를 소독할 때 쓴 락스 세제통을 보고서 금단현상을 느낀다. 이들에게는 락스 세제통이 부호화된 도파민이다. 그리고 이런 도파민은 얻어봤자 별 도움이 안 된다. 모두 과잉이다. 


그래도 나는 배고프다 - 과잉

일상적 과잉의 시대

이런 누가 봐도 병적인 과잉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겪는 과잉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야식, 번아웃, 전 세계에서 높은 자영업 밀도를 가진 서울에서 일하는데도 점심때마다 먹을 게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놓지 못해 현실의 과제를 하지 못하는 사람.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현실.  '너무 관념적인 사람'이라는 표현 또한 과잉적 사고 양식에 대한 평가다. 이 모든 게 과잉이다.


과잉 발생의 원인, 과잉에 대처할 의무

 기본적으로 과잉은 객관적인 성찰을 하지 못하고 병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미숙한 뇌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 뇌에 그 정도의 성찰 능력이 있었다면 온갖 종류의 탐닉 증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터. 하지만 현생 우리는 마약을 인생의 해방구라 믿었던 68 혁명의 세대처럼 무지하지 않다. 인간욕구를 견인하는 도파민의 존재까지 규명하고 수치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약으로 도파민을 보충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해를 넘어 적극적으로 이익으로 실천하는데 인간의 과잉을 활용하는 기업집단들도 있다. 기업 속에서는 Mind hacking(현대의 심리 연구 결과를 활용, 인간의 인지적 약점을 파고들어 기업의 경영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론)이라 불리는 인위적인 과잉 유도는 덕목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미덕이며 과잉의 발생은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 수는 없지만 휩쓸리는 속에서도 객관적 성찰이 가능한 게 인간의 유일무이한 장점 아니겠는가. 그런 능력이 있기에 책임도 있는 법이다. 과잉을 스스로 진단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과 인지를 수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되는 과제다. 도덕적인 명령은 차치하더라도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병적인 삶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원하기 때문에 과잉을 없애는 것은 절박한 미션이다.


3. 과잉 극복하기

만능 방망이 3원칙

나는 과잉이란 현상을 여러 사회적 바운더리를 초월하여 정의했다. 먹을 게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부터, 스마트폰 사용 중독, 섭식 장애, 도시인들의 자살까지도 과잉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모든 과잉에는 동일한 원리(이치)가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비록 범용적으로 통하는 세상의 이치가 있다 하더라도 세상엔 문제의 수만큼 여러 전문가가 많고 각자의 언어에 맞게 고치다 보니 각각의 도메인마다 명사만 바꿔가며 설루션이 제시된다. 하지만 나는 범용적인 세상의 이치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들의 설루션을 관찰해보면 공통적인 방법들이 발견된다. 1) '완전한 단절' 2) '자신의 위치를 관찰' 3) '다르게 만들기'가 대표적인 방법인데 나는 이걸 만능 방망이라고 부른다.


이게 만능이지


현대사회의 과잉의 대명사는 비만이니 비만의 해결에 이 원칙을 적용해보자. 비만의 해결 중 가장 큰 주목받는 간헐적 단식은 오직 먹는 시간을 컨트롤하는데만 주목하는 식이요법이다. 공복시간이 인간의 몸에 만들어 내는 변화들은 아주 다이내믹하다. 그 변화에 대한 설명은 주제가 아니니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하루 3끼의 생활(혹은 4끼 5끼)의 과잉으로부터 '완전한 단절'은 호르몬적 이익뿐만 아니라 무너진 일반적인 패턴 속에서 자신이 일상적으로 하던 행위를 객관적으로 성찰('자신의 위치를 관찰')하게 만들어 먹는 기쁨을 다시 되찾게 해 준다. 간헐적 단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약간 수동적인 전략이다 보니 '다르게 만들기'라는 요소는 찾기 힘들지만 다이어트에 필수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의 분야에선 '다르게 만들기'는 기본 중에 기본인 전략이다. 웨이트 트레이닝 분야에선 효율적인 훈련을 위해서 똑같은 볼륨(드는 무게의 총량)이라도 세트별로 무게를 배치하는 전략을 다르게 하고 쉬는 시간도 바꾸고 운동순서 부위도 바꾼다. 


근육이나 신체 대사만 이런 전략이 통할까? 뇌도 마찬가지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가장 효과적 공부 방법은 기억을 인출하는 시험을 치는 것이다. 학생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학생은 언제나 교과서를 볼 수 있는 상태에서 살다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인출 활동을 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자신의 위치'(앎의 수준)을 가혹하게 드러낸다. 또한 좋은 시험은 '매번 다르다'. 예측할 수 없어야 하며 패턴에 너무 익숙해지지 않도록 다양 방법과 난이도로 기억을 인출하게 설계되어야 함은 상식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시험을 예측할 수 있었던 한 초능력적 고등학생 자매는 9시 뉴스에 나와야 했다)


과잉의 제거 = 좋은 실행

앞서 언급한 만능 방망이는 모두 좋은 실행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잉의 제거 = 좋은 실행"의 등식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으며 좋은 실행의 조건은 과도하지 않은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완전한 단절도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도 다르게 하는 것도 모두 적절한 스트레스를 위한 장치다.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에서도 이런 조건을 제시한다) 좋은 실행에 대한 책들은 너무나도 많으니 그런 책들을 보면 금방 활용할 수 있는 전략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다른 책, 각자의 도메인에서 서로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4. 나의 과잉 제거 사례

 그럼 개인적으로 격고 있는 과잉에 대해 설명하고 어떻게 좋은 실천으로 옮겼는지 정리를 하고 그 효과에 대해 나의 사례를 공유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지난 몇 개월 동안 철저하게 지켜온 원칙들이 있었다. 철저한 식단 조절과 매일 블로그에 일기를 쓰는 것, 그리고 오로지 나의 만족을 위한 유흥은 삶에서 배제하기. 삶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조금씩이라도 하루를 쪼개서 하기. 주말이나 휴일에도 예외 없이 지켜왔었다. 처음은 계획대로 하는 것에 대한 만족이 컸고 변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의 희열에 가득 차 스스로를 가혹하게 내몰았었다. 그런데 처음의 열정적 희열이 사그라들고 외부에서 제공되는 긴장감이 줄어들면서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일요일부터 어제까지 이런 규칙을 나는 깨트리고 일주일을 완전히 쉬었다. 블로깅도 중단하고 근손실이라도 날까 봐 빈틈없이 3끼 챙겨 먹던 것도 한 끼로 줄였다. 그동안 습관이 된 공부도 그 분야도 칼질을 가했다. (구체적으로 너무 많은 분야에 대해 조금씩 진행하는 방법은 성취감을 얻기 힘들었다.) 장소도 옮겼다. 깔끔한 동네를 벗어나 일부러 지저분하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동네를 찾아가 지금의 내 위치가 무엇인지를 피부로 느꼈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질없게 느껴지던 것에도 다시 생명력이 돌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이상하게 찾아온 과잉은 이상하게 사라졌다. (보통 사람들은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여행을 간다고 하지만 나는 이런 리셋의 과정이 내 마음에 감명을 주고 에너지를 다시 채워준다)


지식보단 느끼는 게 더 크다

 인간은 향유하는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대가가 필요한 것이라는 걸 알 때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된다. 감사는 지식으로 이성으로 도덕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 이번 내 일주일 동안의 리셋에서 내린 결론이다. 당연한 식사, 당연한 주거, 당연한 건강, 당연한 목표, 당연한 성취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선 부재를 피부로 느껴야 한다. '네가 부모가 되면 안다'라는 말엔 이런 진실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시간, 장소,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엔 지식이 없다. 생각이 아닌 피부로 느낄 때 과잉에 파묻혀 있던 감각이 깨어나고 땅, 흙에서 너무 멀어진 과잉의 탑은 무너진다. 이때 삶과 향유할 수 있는 가치는 다시 반석에 오르고 과잉이 되기 전 처음에 세운 목표는 다시 생명력을 가지고 부활한다. (이런 흐름은 자산의 가격 변동 사이클과 닮아있다.)


가치 변동 사이클


 감사일기는 우울증에 대한 수많은 심리적 세러피 중에 들어가는 돈에 비해 (종이랑 연필만 있으면 된다) 눈에 띄게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감사 또한 루틴 속에 과잉 속에 파묻힌 가치를 되찾는 일이다. 감사일기를 쓰라는 건 아니고 굳이 절식이라든가 일주일을 완전히 삶에서 지워버리는 방식 아니라도 얼마든 우리가 느끼고 판단하는 걸 바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방법이 무엇이든 이 글을 보는 사람들도 현재의 흐름에 문제를 느낀다면 한번 과잉 상태를 인위적으로 무너트리고 새로운 균형을 찾는 과정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하고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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