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돈걱정

같이 먹은 밥 n분의 1하기

# 더치페이

by 에브리데이미

‘다들 잘 들어갔어? 오늘 즐거웠어~. 여기로 보내면 됨. xx은행 302xxx-xx-xxxxxx. 34,510원.’


샤워를 하고 나오는 길에 카톡이 울려 보니 동생 A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계좌로 돈을 입금한 뒤 ‘고마워~ 수고 많았어~ 피곤한데 잘 쉬어’라고 답장했다. 아는 동생 A와 B와 나는 주기적으로 모여 요새 핫하다는 맛집에 가서 베스트 메뉴를 시켜 먹고 인스타용으로 쓸 사진을 엄지손 품 팔아가며 찍어 주는 사이다.


사진을 찍어줄 때의 우리는 이심전심이라 꽤 섬세하게 공을 들인다. 괜찮은 배경이 있으면 놓치지 않고 “거기 서 봐!”하며 자리를 깔아주고 얼굴이 작아 보이는 각도를 조율해 여러 장 찍는다. 자연스럽게 뽀샵이 되는 앱을 공유해 각자 보정하고, 고양이 얼굴을 만들어주는 앱으로 찍으며 놀기도 한다. 그렇게 세 명이서 돌아가며 찍고 나면 만남의 삼분의 일은 사진 찍는 일로 소요되지만 인스타 자아와 카스 자아를 먹여 살리려면 현실의 일부는 어느 정도 디지털 세계를 위한 밑밥이 되어주어야 하는 법이었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삼각형 구도’를 염두하면 좋다는 걸 듣고 따라 해 보기도 했다. 화면을 차지하는 피사체가 삼각형 모양으로 잡히면 안정적으로 보여 이상적인 구도가 된다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블로그에서 예시로 올린 삼각형 구도의 사진들은 하나같이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멋이 있었다. 그러나 이론을 현실에 대입하기는 쉽지 않아서 우리가 찍으면 어쩐지 한 귀퉁이가 모자라 전체적으로 어설픈 느낌이 들었다. 삼각형 구도는 사진에서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관계에서도 균형 잡기가 어려운 구도였다. 여자 세 명이 안정적인 정삼각형이 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꼭짓점 사이의 길이가 같아야 했는데, 변화무쌍한 관계의 역학에서 그 길이가 늘 같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늘 신경 써야 했다. 누군가 한 명이 너무 멀리 떨어져, 점과 점 사이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져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홀수 모임은 짝수 모임에 비해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러려던 게 아닌데. 필연적으로 누군가 한 명을 소외시켜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놀이기구를 타거나 식당 의자에 앉을 때, 누군가 한 명은 혼자 앉아야 한다. 테이블 양쪽 의자에 한 명씩 착석한 상황에서 둘 중 하나의 자리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적지 않은 심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쪽으로 앉든 나머지 한 사람은 택하지 않은 선택이 되어 버리니까. 한 명이 계속 혼자 앉게 된다면 그 한 명은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고 이탈해 버리고 말 테니 돌아가면서 ‘혼자 앉은 한 명’이 계속 혼자 앉지 않도록 배려를 해줘야 한다. A와 B 그리고 나, 나와 B 그리고 A, B와 A 그리고 나. 이런 식으로 홀로 남는 한 명이 자기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그 시점에 이르기 전에 교환 작업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 교환 룰은 차마 말로 설명하기에는 끔찍하리만치 유치해서 그냥 말하지 않고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바꿔주는 센스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돈 계산은 적당히, 센스로, 눈치로가 안 된다. 숫자는 마지막 자리까지 정확히 배치할 수 있는 영역이고, 누가 얼마를 더 냈는지가 한눈에 그대로 명시된다. 그래서 나는 숫자는 숫자로 계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이’를 떠올렸다. 내가 서른다섯, 쟤들은 서른 넷이니 한 살이라도 많은 내가 계산 하자. 이런 마인드로 계산대로 향했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두꺼운 인조가죽 받침을 댄 영수증과 함께 카드를 내미는 순간을 살짝 즐기고 있었다. 싫은 사람에게는 만 원 한 장도 아깝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을 잘 먹이고 “고맙다”는 소리를 듣는 것, 나 스스로 꽤 ‘너그럽고 쿨한 언니’가 된 듯한 착각에 흐뭇해하는 것, ‘이 정도는 쓸 수 있는 여자’라는 자기만족에 취해 있었다.


여기까지는 동생들도 잘 먹었다며 고마워했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밥을 먹고 나면 카페에 가는데 이번에는 누가 살 건지를 놓고 동생 둘이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미 내가 밥값을 혼자 지불한 상황에서 남은 커피값을 둘이 나눠 내기도 좀 그랬다. 이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동생 둘이 제안을 했다.

언니. 우리 그냥 더치페이 하자.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계산하지 못한 채 남은 한 사람의 부채의식’을 깨달았다. 내가 돈 몇만 원 더 쓰고 허세를 부리는 동안, 남은 한 사람은 차라리 돈을 쓰고 말지 지기 싫은 부담감을 짊어진 채 불편해했던 거다.


만나서 쓰는 돈은 한 사람이 결제하고, 그걸 ‘n분의 1’로 나누어 그 사람 계좌로 입금하는 룰을 다시 짰다. 조금 전 받은 카톡은 오늘의 총무가 영수증 사진과 함께 올린 회비 내역이었다. 십원 한 장까지 똑 떨어진 숫자를 보니 어딘가 씁쓸하기도 했지만, 육만 원씩 쓰다가 앞자리가 삼자로 시작하는 계산서를 받아 들자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고 그런 내가 가소로워 웃음이 나왔다.


풉. 쿨하고 멋진 언니 어디로 갔니?



구태의연한 체면치레에서 벗어나자 정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더치페이가 꽤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일단 한 사람이 결제하기로 하면, 한창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위로를 건네다가도 테이블에서 일어나 계산대 앞에 서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눈치 보고 머리를 쓰면서 결국 우리 사이는 가족처럼 가깝지 않음을, 엄연한 타인임을 인식해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리지 않아서 좋았다. 총무는 카드 포인트가 쌓여서 좋고, 나머지는 나중에 자기 몫을 보내주면 되니까 부담이 없었다. 여러 명이서 모은 돈으로 주문을 하면 식탁이 풍성하게 가득 차는데 계산은 일 인분과 똑같아서 같은 값으로 더 나은 경험을 누린 만족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더치페이가 상징하는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당당한 뉘앙스가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밥을 얻어먹지 않겠다는 건 누군가가 밥 한 끼 사주면서 그 핑계로 건네는 꼰대 어린 충고를 듣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나에게는 내 밥을 살 정도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 정도의 인생이면 꽤 괜찮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 인생을 ‘바로 잡아야 할 무엇’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저는 제 몫을 하며 살아가는 어엿한 어른이니까요.


이런 식의 당돌한 선언이 내 몫으로 결제한 영수증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손바닥보다 작은 하얀 쪽지가 어른으로서의 인증 빌지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내가 밥을 사는 날에는 애들이 이상하게 내 눈치를 보는 게 미세하게 전달되고는 했다.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대화의 물꼬를 트면, 조금 전 얻어먹은 고마움이 부담으로 변했는지 내가 한 마디라도 더 할 수 있게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기다려주는 게 보였다. 그 마음은 내가 다른 선배에게 밥을 얻어먹을 때도 마찬가지라 잘 알았다. 각자 돈을 낸 이후로는 그런 기색이 없어져서 좋았다. 대화를 하는 데 있어 담 하나가 사라져 완전히 평지가 된 느낌이랄까.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눈치 보아야 할 불편한 대상이 된다는 건 직장에서라면 몰라도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에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만남에서는 완벽하게 깔끔한 더치페이를 제안하지 못하고 있다. 십원 한 장까지 갈라서 내는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서고 나도 실례가 될까 봐 굳이 먼저 제안하지는 않는다. 때론 얻어먹고 신세 지면서 다음에 갚을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기브 앤 테이크 관계도 싫지만은 않다. 그러나 행여 염치없는 애로 보인 게 아닐까, 밥을 밥으로 갚는 게 아니라 다른 걸로 갚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은 누가 사주는 밥 뒤에 따라오는 약간의 부담으로 남아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