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난 후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면 영화에 대한 내 마음이 어땠는지가 보인다.
크레딧에 등장하는 이름마저 밉다면 나의 두 시간을 망쳐버린 망작이었다는 소리고 크레딧마저 예쁘고 기특하다면 꽤 즐거웠다는 뜻.
원하는 정보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점에서 영수증이나 전단지를 받을 때의 느낌과 비슷한 감각으로 무시하게 되는 엔딩 크레딧. 그런데 또 영수증이나 전단지처럼 함부로 취급할 수는 없는 게 뮤지컬이나 연극이었다면 모든 배우들이 나와 인사를 하는 커튼콜에 해당하는 게 바로 크레딧이 아닌가 싶어서다. 직접 사람이 서는 무대는 아니지만. 수많은 이들의 작업을 치하하는 현장 같아서 왠지 거기까지 봐줘야 할 듯한 의무감이 옅게나마 드는 것이다. 귀찮게도.
뒤처리가 귀찮겠다 싶으면 영수증을 안 받을 때도 있고, 길거리 전단지도 못본 척 지나치는 날이 더 많은 내가 단지 남의 이름을 봐주기 위해 지루함을 견딜리가. 그들의 이름이 등장할 때까지 봐준 것만으로도 영화를 만든 이들은 이미 충분히 기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출구에 서서 퇴장을 기다리는 직원의 존재며 환하게 켜진 불이며. 다음 상영이 촉박한 영화관도 관객들이 크레딧까지 느긋하게 보기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이제는 별다른 고민 없이 내 시간의 바깥 어딘가로 휙 던져 놓고 가버리는 크레딧.
그런 내게도 크레딧이 필요한 순간은 온다.
영화가 남긴 짙은 여운에 붙들려 스크린 앞을 떠날 수 없을 때. 어둠 속에서 숨죽여 흘린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어 있거나.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마음 어딘가가 푸욱 젖어 버리는 바람에 물 먹은 솜처럼 일어나기 싫을 때. 크레딧은 이 모든 감정을 정리하는 마무리가 되어준다. 시간을 벌어주는 느낌이랄까. 두루마리 휴지가 풀리는 것처럼 돌돌 펼쳐지는 크레딧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휴지를 건네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시끌벅적한 현실 밖으로 밀려나기 전,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음미하는 영화와 나 사이의 사적인 시간.
필름 끝에 크레딧을 붙이기로 한 사람은 예감했을까.
관객들에게 필요한 건 영화만이 아니라는 것을.
코로나로 인해 영화관 출입이 어려워지면서 넷플릭스 같은 집구석 플랫폼에 길들여지고, 터치 하나로 오프닝도 크레딧도 스킵해버릴 수 있는 시스템의 편리에 완전히 익숙해졌지만. 간혹, 짧은 크레딧이 아쉬워지는 영화를 만나면 영화관 시절의 나를 만난 것 같아 반갑고 기쁘다.
넷플릭스에서 그런 류의 반가움을 느낀 건 <봄날은 간다>, <연인>, <어톤먼트>와 같은 영화를 볼 때였다. 이전 시대의 명작이 넷플에 있다는 게 반가워 몇 번씩 시간을 들였던 것들이고, 두 번을 보면 두 번을 본 만큼 세 번을 보면 세 번을 본만큼 좋았던 작품들.
영상에 기록된 대사와 장면은 여전한데 왜 이제와서야 보이는 게 있을까. 첫 번째 관람과 두 번째 관람 사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 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게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하루하루가 모여 이전에 몰랐던 무언가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 걸까.
헤어진 연인과 재회한 카페에서 미처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다 먼저 그가 떠나고. 혼자 남겨졌을 때처럼. 잠시 자리에 머물러 그(영화)의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
눈치 없이 뜨는 추천작은 알고리즘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내 마음의 소리일 것이다.
스킵된 크레딧을 아쉬워하는 마음은 각별하다. 소중한 걸 알아보고 아끼는 순간은 그 시간까지 소중하게 만들어주니까. 앞으로도 종종 짧은 크레딧이 아쉬워지는 영화를 만났으면 좋겠다.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