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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Apr 19. 2018

오늘도 나는 셀프로 염을 한다.

고가의 안티에이징 화장품을 샀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코덕이 추천한 신박한 물건. 손가락 길이만 한 튜브를 눌러 나온 크림을 눈가와 입가에 바르고 톡톡.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뚱이에 뭔가를 바르는 행위란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셀프로 염하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모르니 멈출 수가 없다. 흙으로 컴백할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관리를 멈출 수가 없다. 아침에 바르고, 저녁에 씻고 바르고 씻고. 무한궤도의 반복. 시시포스의 바위를 들어 올리는 기분.    

화장품을 바르는 일이 산 자의 품위를 위한 대책이라면 시체의 몸을 닦아주는 염은 죽은 자의 품위를 위한 절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온몸을 닦은 장의사가 얼굴에 파우더와 연지를 발라주었다. 고인의 마지막을 곱게 장식하려는 고마운 배려였지만 덕분에 싸늘하게 식은 피부는 하얗게 강조되었고 새빨간 립스틱은 요란하게 두드러졌다. 할머니가 살아 거울을 본다면 화장이 안 먹었다며 지워버렸을 메이크업이었다. 다짐했다. 내 손으로 화장을 지울 수 없는 순간이 오기 전에, 유언장에는 꼭 내 피부 톤에 어울리는 NARS 아쿠아 글로우 쿠션 파운데이션 21호를 써놔야겠다고.     


그토록 세심하게 단장해봤자 며칠 후면 본격적으로 썩기 전, 땅 밑이나 화장로로 아웃. 그대로 소멸될 것이다. 소멸을 자각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소멸되어 최종적인 말살을 체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이러니한 복일 것이다. 살아서 맛본 소멸은 살아 있음을 대가로 해서 뿌리까지 쓰게 흡입해야 했다. 흙탕물 같은 한약을 들이켤 때 코를 막지 못하고 역겨운 냄새를 견뎌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죽음이란 코를 막을 수 있는 마비 상태... 가 아닐까?     


살아있을 때. 젊음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 낱낱이 드러난 거울은 비극적인 무대였다. 형광등 아래 잔인하게 드러나던 기미와 잔주름. 다행히 노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스무 살에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떴더니 환갑이 되는 비약은 영화에서나 구경해 봤다. 노화의 여정은 기나긴 날들 동안 야금야금 진행됐다. 곁에 있는 이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런 면에서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존재는 살짝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서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과밖에 모른다. 그리고 알고 있다. 내가 가장 예뻤던 날을. 그 날에서 뚝 떨어진 오늘을.     


만약 모든 인간들에게 벤자민 버튼처럼 외모와 마음의 나이가 거꾸로 배치된다면 좀 나아지는 게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고생한 대가로 피부가 팽팽해지고 젊어서는 아직 철이 없는 죄로 쭈글거리는 피부를 견뎌야 한다면... 오래 살고 볼 일이겠지. 


아니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늙음의 징표가 외모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서 웬만한 공부로도 풀기 힘든 우주의 비밀 같은 것이라면... 아마 노화현상이 가져다준다고 믿는 여러 가지 인생의 지혜 또한 스스로도 알아차리기 힘든 진짜 ‘비밀’이 되어 마음속 우주 어딘가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늙어간다는 건 예고된 엔딩에 다다르는 일이다. 인생의 끝은 누구도 모르지만 대체로 노인들이 그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여겨지고 통계학적으로도 그렇다. 노인이 죽음의 예고편이라면 시체는 결정적 증거. 산 자들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적나라한 진실이자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물 1호다. 증거물은 재빠른 절차로 밀폐. 길어야 삼일 간 곁에 둔 후, 산 자들의 세계에서 영영 추방되기 때문에 그 깨우침이 오래가지는 못한다.      


언젠가 증거물이 될 몸뚱이에 염을 마치고 크림 뚜껑을 닫았다. 오늘의 염은 촉촉하게 잘 스며들었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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