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냄새

by 에브리데이미


다른 인종을 알아간다는 건 그동안 정의 내려왔던 사람에 대한 개념을 부수고 개미의 영역으로 내려가 어떤 대상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기어오르며 역으로 탐구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내 나라가 주지 못하는 무언가를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인데 그 무언가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고 절대 예상할 수 없었던, 말로 설명되지 않는 냄새가 코의 언어로 다가와 말을 거는 종류의 색다른 즐거움이 포함되어 있다.


페로몬을 교환하는 개미들처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깨인 감각기관을 달고 이 나라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냄새를 발견하는 탐험가가 된 기분. 배 멀미에 시달리는 육지 사람처럼.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거북스러운 멀미를 느끼면서도 맡아본 적 없는 암호를 해석하려 애쓰는 사람들. 여행자라 불리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린 종종 낯선 나라로 떠나 불시 착륙의 후유증을 견디며 고통과 쾌감을 차례대로 맛보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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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는 그 나라만의 냄새가 있다. 내부자들은 모르는 내부자들의 냄새. 익숙한 냄새는 무향으로 취급해 버리는 코의 권태스러운 성향 덕에 정작 본인들은 알지 못하는 그 땅에 고인 냄새. 마치 고대에 살았던 어느 폐쇄적인 부족이 미신을 믿는 마음으로 뿌렸던 액막이용 액체가 진짜로 효력을 발휘해버린 것처럼. 현지인의 냄새는 외부인과 내부인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되기도 한다.


일종의 검문소라 불러도 좋을 냄새의 벽은 공항에서의 모든 절차를 통과한 후에도 입국을 위한 비공식 절차로 남아 후미진 골목길 식당 어딘가에서 불쑥, 등장하기도 했다. 가방에 든 물건을 탐지해내는 최첨단 장치를 통과했든 어쨌든 자기 알바 아니라는 듯. 이를 테면 똠양꿍에 놓인 고수처럼. 불시에 허를 찌르며 이방인의 비위를 시험하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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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어느 나라의 식당에 앉았을 때의 일이었다. 쑥 비슷해 보이던 고명을 입에 넣고 나서야 그런 행동을 하려면 사전에 이 나라 음식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필요했다는 걸 깨달았다. 고춧가루나 마늘처럼 독하기로 유명한 재료에 단련된, 꽤 하드코어 한 미각의 소유자라는 오만에 대한 응징 비슷한 질책을 받는 느낌이기도 했다. 한쪽 분야의 레벨 높은 강도에 익숙해졌다고 해서 다른 쪽 분야의 센 강도를 견디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고수란 풀은 단순히 매운맛을 견디는 레벨로는 소화하기 힘든 완전히 다른 영역의 식물이라는 걸 일초 전의 젓가락질이 구역질 나게 후회되도록 깨달았다. 시금치나 취나물이 삼삼한 이웃이라면 고수는 이 나라 온갖 잡귀의 사무친 원한으로 코와 목에 저주를 건 듯한, 영적인 차원의 사차원 풀떼기랄까. 외국인이 홍어를 삼킨다면 바로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호기심에 먹어본 생선에게 끔찍한 공격을 당한 여느 외국인의 회복을 바라는 심정으로 휴지를 뽑아 들었다. 품고 있던 독을 쏘고 죽어버린 벌 한 마리를 꺼내듯. 고통스러운 경험을 선사하고 명을 다한 풀을 뱉은 후 물 두 컵을 비우고서야 간신히 잡귀의 저주에서 풀려 날 수 있었다.


죽도록 미운 코리안이 있다면 고수를 잘게 다져 넣은 만두를 대접한 후 열 배로 복수당할 맛이다.


신기한 건 당시만 해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던 풀이 훗날 쌀국수를 먹을 때마다 고수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반드시 넣는 쪽을 택하는 기호식품으로 변할 줄은 몰랐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낯설어서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대체 불가능 한 존재감을 가진 녀석들은 결국엔 살아남아 중독적인 팬을 양성하기 마련인 건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가요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시대를 앞선 독보적인 개성으로 심사위원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대체 불가능 한 존재감으로 90년대를 장악했던 것처럼. 레몬 띄운 국물의 짭짜름한 신맛에 우러난 고수의 향은 미각신경의 맛봉 오리에 찰떡궁합으로 새겨져 쌀국수를 먹을 때마다 없으면 섭섭한, 감칠맛 나는 포인트로 자리 잡게 된 걸 보면 세상의 어떤 존재가 날 사로잡게 될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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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냄새가 충격적인 대면 끝에 정이 붙는 건 아니어서 중국 식당에서 내놓는 일부러 썩힌 두부나 계란으로 반죽한 면발에는 끝내 단련되지 못했다. 매번 조금도 가까워지지 못한 채 완벽한 이질감을 느끼던 요리가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피로를 달래주는 별미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마법에 걸린 이웃마을 사람을 만난 것처럼 뜨악하게 여겨졌으나 나의 애정 하는 닭발과 족발을 생각한다면 나 역시 마법에 걸린 이웃마을 주민일 터였다.

남기거나 주문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음식은 좀 나은 편이었다. 자칫하면 인종적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는 체취의 문제는 드러내 놓고 거부감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약간의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고난도의 문제였다. 어느 덩치 큰 외국인에게서 맡았던 땀 위에 치즈를 솔솔 뿌린 것 같은 고린내라든지 동양인에게서는 맡아보지 못했던 강렬한 암내가 닥쳐왔을 때의 충격은 어려서부터 받아온 모든 인성교육과 보편적 도덕 윤리를 총동원한 끝에 간신히 감춰야 했던 일상의 작은 재난이었다.


‘잘못된 게 아니야. 다른 거야. 다른 거. 호르몬도 다르고 신체구조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달라서 그런 거야.’


왜인지 갑작스레 떠오른 영단어 ‘different’를 중얼거리며 옆자리에 앉은 사내를 떠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무리 앉고 일어섬이 빈번한 지하철이라도 누군가 앉자마자 화들짝 일어나 떠나버리면 어쩐지 속내를 들킬 것 같아 태연한 척, 권태스러운 코가 서둘러 무디어지기를 바라며 내릴 역까지 벌을 받듯 자리를 지켰다.


사실 중간에 일어난다 해도 그가 알아차릴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버텼을까. 어쩌면 나도 다른 인종에게 데오드란트나 구강청결제를 쥐어주고 싶은 존재일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주식으로 김치를 먹고 자란 지 어언 삼십 년. 오랜 시간 치즈를 먹고 자란 사람의 체취를 감안해 볼 때, 어쩌면 나의 모공에서도 잘게 다진 마늘냄새가 땀을 타고 흘러내려 그 위에 고춧가루를 뿌린 것 같은 향을 뿜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치도 안 먹고 된장국도 안 먹는 백인들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혹시 내가 홀로 훤히 열린 김치통 같은 존재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구도 말해줄 수 없고 말해줘서도 안 되기 문제이기에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지만 어쩌면 모두들 나의 체취에 조용히 역겨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문제는 자기만 모른다는 꽤 많은 사례를 대입해 봤을 때, 절대 근거 없는 과대망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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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나도 모르게 풍길지 모르는 만약의 악취를 위해 이름 모를 사내의 냄새를 견디며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아량’을 베풀었고 언젠가 그 보답을 받기를 바랐던 셈이다. 고의는 아니지만 내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면, 상처받을 정도로 대놓고 피하지는 말고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적절한 시점에 자리를 떠달라는 바람을 디프런트에 담아 중얼거렸던 것 같다.


두려웠다. 그들의 날카로운 코끝에 행여 내 마늘냄새가 걸려들어 꿰이게 될까 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옆 사람의 마음속에서 악취 나는 존재로 낙인 되어 납작하게 밟혀 치워질까 봐 신경이 쓰였다. 서양인들의 코는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암묵적으로 나누는 연대의식으로 상징화되어 얼굴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는 했다. 보안을 위해 방어를 게을리하지 않는 첨탑 위의 감시자처럼 줄곧 외부를 향해 뻗어 있는, 생긴 것부터 다르게 솟은 높은 콧대들. 낯선 냄새를 풍기는 이방인은 단박에 잡아내겠다는 의지를 신체 언어로 표현해 내듯 날렵하고 단호한 스타일을 유지해 온 유전자의 대물림 코드.


그들 대다수와는 다른 유전자를 지닌 나로서는 이 소수자의 냄새가 틀린 답이 아니라 다른 답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냄새야말로 머리로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몸으로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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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는 예민해서 몸속으로 침투한 공기가 날것의 내부 장기를 건드린다는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연히 불쾌한 공기에 대해서는 살짝 열어준 문으로 벌컥 들어온 무단 침입자를 바라보듯 위험을 감지하고 날이 선다는 사실을 나 또한 몸으로 알고 있다.


냄새는 미래형을 모른다. 나의 미래에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냄새는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좋은 냄새’로 향하는 길을 만들고 익숙한 냄새는 하이패스를 단 자동차처럼 한 쾌에 통과시키지만 낯선 냄새에 대해서는 국경선을 넘기 전의 절차대로 엄격하게 시행하려 든다. 본능에 따라야 하는 우리이기에 이국의 냄새에는 어떠한 냄새를 ‘좋은 냄새’로 인지했던 유년의 결정적 시기를 놓쳐 버린, 이미 너무 오랜 시간 다른 방식으로 길들여져 온 다 큰 사람들의 완고한 고집이 편견처럼 배어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다른 인종을 알아간다는 건 개미가 되어 타인의 발끝부터 기어오르는 일. 타인이 쌓아온 과거를 통해 가본 적 없는 미래를 가보는 시간체험이다.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신비한 접촉으로 개미에게는 다소 버거운, 인간의 몸이 에베레스트 산만한 과제로 다가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