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출국 1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에 일 열로 줄을 서서 위층으로 올라간다. 줄을 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옆에, 혹은 앞에 캐리어를 하나씩 붙잡고 있다. 그 행렬의 맨 뒤에 20대인지 30대인지 애매해 보이는 세 남자가 각자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야 벌써 공항 냄새나지 않냐?”
맨 앞에 선 형일이 호들갑 떨며 말했다. 셋 중 제일 키가 컸는데, 길쭉하고 탄탄한 몸에서 주는 분위기와 대비되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작은 위화감을 주었다.
“여기 아직 지하철인데.”
“그래 촌놈 티 내지 말자.”
이어서 올라가던 준호와 태영이 이때다 싶어 타박했다. 두 번째로 서 있는 태영은 누가 보더라도 몸이 좋고 목소리도 낮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준호는 몸이 좋다고 하기보다 적당히 둥글둥글해서 풍채가 좋다고 하는 말이 어울렸다.
“아 왜 나만 신났어. 너네도 좀 신나 해봐. 누가 보면 캐나다 나만 처음인줄 알겠네.”
“알겠어. 우리가 방방 뛸 테니까, 넌 좀 가만히 있어.”
“됐어 됐어. 너도 가만히 있어.”
태영이 폴짝폴짝 뛰면서 형일을 약 올렸다. 유독 티 나게 신난 형일을 놀리고 있지만 사실 준호과 태영도 기분이 들뜬 상태였다. 세 사람은 중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까지 10년이 넘도록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동안 국내 여행은 종종 다녔지만 셋이 함께 해외를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가까운 나라도 아니고 무려 캐나다와 미국을 가는 여행이었다. 생애 첫 아메리카 대륙을, 10년 넘게 봐온 친구들과 간다고 하니 아무리 뚱한 사람이라도 기분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과하게 신나버린 형일은 혼자서 앞서나가 일행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민형일이! 그쪽 아니야! 이쪽으로 와!”
“내버려둬. 알아서 오겠지.”
“그렇지? 한번 불러줬으면 됐지.”
준호와 태영이 가차 없이 돌아섰다. 다행히 자신을 부르는 준호의 목소리를 들은 형일은 부리나케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세 사람은 탑승 수속을 하러 갔다. 공항에 오는 지하철에서 출국을 위한 모든 절차를 미리 알아본 준호는 곧장 탑승 수속 카운터로 두 사람을 이끌어갔다. 준호는 오래간만에 온 인천공항의 거대함과 복작복작함, 여행 가기 전 설레임 같은 건 할 일이 끝난 뒤에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세 도착한 카운터에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줄에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모두가 커다란 캐리어를 가지고 다니는 공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대기 줄이었다. 반면 셀프 체크인 기기는 세 사람이 동시에 사용해도 될 만큼 자리가 비어있었다.
“와, 이렇게 전부 셀프로 하면 승무원 일자리 뺏기는거 아냐?”
“다른 할 일이 있겠지.”
형일의 수다에 준호가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내 셀프 체크인 기기가 내리는 지시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묵묵하게 체크인 기기에 집중하던 태영에게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
세상에서 가장 불길한 말 중 하나. 사람을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말 중 하나가 탑승 수속을 하던 태영에게서 들려왔다. 겨우 한 음절이 주는 불길함을 애써 무시한 채 옆에 있던 준호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왜?”
“나 여권 잘못 가져왔는데..?”
태영은 가져온 여권을 준호에게 보여줬다. 형일도 준호의 바로 뒤로 다가와 어깨너머로 태영의 여권을 확인했다. 여권에는 태영과 비슷한 얼굴을 한 사진이 있었다. 태영이 20년 정도 더 살면 아마도 이런 얼굴이 될 것 같았다. 이름도 오태영이 아닌 오명일이었다. 게다가 출생 연도가 그들과 같은 1996년이 아닌 1967년으로 되어있었다.
“지금 아버지 여권 가져온 거야?”
“어.. 그런 것 같은데 잠깐만.”
태영이 급하게 집에 전화를 걸었다. 굳이 통화 내용을 전달하지 않아도 태영이 여권을 잘못 가져왔고 태영의 여권은 집에 있다는 것이 자명해 보였다.
사뭇 심각해진 준호는 멀어지려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고 빠르게 머리를 굴린다. 지금 시간은 10시 30분, 타야 할 비행기는 1시에 출발한다. 탑승까지는 2시간 반이 남아있었다. 준호는 그 시간 안에 뭔가 해결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라 판단했다. 여권을 두고 공항까지 오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준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검색을 시작했다.
반면 형일은 공항에 소문이라도 내려는 듯 요란하게 태영을 질책했다.
“아니 야 여권 챙길 때 안 열어봤어? 챙길 때 한번 열어보기라도 해야지 그걸 그냥 집어 오는 게 어디 있냐!”
“내 여권 케이스라서 맞게 챙긴 줄 알았지. 이게 왜 바뀌어있냐 하..”
“야 그럼 넌 못가? 표 그냥 날리는 거라고?”
“생각 좀 해보자. 아직 시간 좀 있잖아.”
“그래, 우리 몇 시 비행기지?”
“1시니까 2시간 반 남았네.”
“그럼, 여권 퀵 같은 거 써서 보내거나 할 수 있지 않아? 수원이면 여기까지 충분할 것 같은데?”
태영은 대답할 3초가 아깝다는 듯, 형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부터 걸었다. 수원에서 인천공항까지 차로 약 1시간 반, 비행기 탑승까지 2시간 반이면 충분했다. 태영은 다급하게 통화를 하고, 형일은 옆에서 답답한 마음을 조금 달랬다.
태영이 통화를 마치기도 전에 준호가 검색을 끝내고 형일을 바라보았다.
“2시간 반 아니야. 체크인 마감하기 전에 와야 하잖아. 저거 비행기 타기 한참 전에 마감할 거야.”
“아 그러네? 언제 마감하는데?”
“그거 물어보러 가자. 너랑 나는 일단 짐 부치면서 카운터에 물어보면 될 것 같아.”
태영은 통화를 하면서도 둘의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통화를 마치고 바로 둘의 대화에 합류했다.
“그래 일단 너네는 가야 하니까 체크인부터 해. 여권은 동생이 택시 타고 출발하겠대.”
“그래? 그럼 넌 일단 이거 보고 있어봐. 링크 보내줄게.”
형일과 준호는 셀프체크인 기계에서 탑승 수속과 수하물 스티커를 출력하고 항공사 카운터로 갔다. 그 사이에 태영은 준호가 보내준 링크를 확인했다. 내용은 긴급 여권 신청 방법이었다. 인천공항 외교부 영사 민원서비스센터에서 출국 4일 이내에 여권을 분실한 사람을 대상으로 긴급 여권을 발급해 준다고 한다. 물론 온갖 서류를 구비해야 하는데, 서류만 충분하면 1시간에서 3시간 이내로 발급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하는데 최소 30분, 신청 후에 여권 발급까지 얼마나 필요한지가 관건이었다. 태영은 일단 민원센터의 위치를 확인해 두고 수하물을 위탁하기 위해 간 두 사람을 찾아 나섰다. 마침, 준호와 형일이 수하물을 위탁하고 나오고 있었다.
“그거 봤어? 신청될 것 같아?”
“어 신청할 수는 있는데, 이거 카운터는 언제까지 한대?”
“12시에 마감한대.”
“아.. 그럼 그 전에 안 될 것 같은데. 이거 빨라도 1시간 넘게 걸린대.”
준호의 말에 금세 시무룩해진 태영을 보고 형일이 끼어들며 말했다.
“야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봤는데, 너 짐 작은 캐리어 사서 거기다 들고가자.”
“짐? 짐을 갑자기 왜 옮겨?”
“봐봐, 너 여권 지금 오고 있잖아. 근데 카운터 마감 전까진 딱 봐도 무리거든? 근데 짐만 안 부친다고 하면 카운터 문 닫아도 온라인 체크인해서 12시 넘어서도 표 받고 들어갈 수 있어.”
“아 그러네?”
형일의 제안이 제일 현실적이었다. 비행기 타기 전에 여권은 확실하게 도착할 수 있고, 짐을 옮긴 뒤에 가져왔던 캐리어는 동생이 다시 들고 가면 되는 일이었다. 계산이 끝난 세 사람은 잠시 자리에 앉아 숨을 돌리기로 했다. 동생이 도착할 때까지 1시간은 더 걸릴 것으로 보였고, 짐 정리는 20분 정도 걸릴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는 30분 정도 여유를 가져도 충분했다. 이럴 때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은 항상 형일이었다.
“야 네 동생은 무슨 죄냐.”
“인천에 드라이브 한판 하는 거지 뭐.”
“와 자기가 하는 거 아니라고!”
“그래, 너 동생 오면 용돈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용돈..”
태영은 지갑을 슬쩍 꺼내보았다. 필요할 때가 종종 있어 출금해 두었던 현금이 2만 원이 조금 안 되게 남아있었다. 태영의 잔액을 옆에서 본 형일이 말했다.
“택시값도 안 나오겠다.”
“그래도 성의지 성의. 이거라도 줘야겠다.”
“그래 가족끼리 비용 처리는 네가 알아서 하고, 얘 이제 그만 구박하자. 여권 뭐 잘못 가져올 수도 있지!”
“그럴 수.. 있나..?”
“있는 걸로 해줘…”
태영이 조금 풀죽은 채로 동시에 말했다. 친구들의 배려에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태영이었다. 지금은 저렇게 말해도 여행 내내 놀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크게 탓하지 않는 친구들이 고마웠고, 비행기를 못 타지는 않는다는 것도 확인되었으니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숨 돌린 세 사람은 우선 기내용 캐리어를 하나 구매하고, 편의점에서 김밥을 한 줄씩 구매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니 배가 고팠지만, 곧 먹을 기내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 지금은 간단하게 먹기로 했다.
김밥을 우물거리던 세 사람에게 한 승무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