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다섯 개의 심장이 하루를 채웠습니다.

by 재찬

거창한 것을 바란 적은 없었습니다. 남들처럼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사랑이나, 서로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연애, 혹은 충만한 기쁨으로 반짝이는 행복 같은 단어들은 제 삶의 서가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책과 같았습니다. 그저, 켜켜이 쌓인 잿빛 먼지 같은 제 세상에 더는 축축한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만 해달라고, 텅 빈 허공에 대고 희미하게 되뇌었을 뿐입니다.


오랜 동면 끝에 눈을 뜬 짐승처럼, 저는 아주 오랜만에 웅크렸던 몸을 펴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동굴 밖으로, 한 발, 아주 느리고 더딘 한 발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혹여 발밑의 작은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질까,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를 곤두세운 채 내딛는 걸음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지요. 정말로,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이 용기라는 것을 내어본 것이.


하지만 운명 혹은 팔자라 불리는 거대한 흐름은, 제게

잠시의 평온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모양입니다. 마치 거대한 손이 나타나 기어이 저를 다시 절망의 늪으로 끌어당기는 듯했습니다. 내 운명의 바탕색은, 내 팔자의 무늬는 결국 ‘비참함’이라는 이름으로 직조된 것이었나 봅니다.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말입니다.


넘어야 할 산이 첩첩산중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습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이 단단한 아스팔트가 아닌, 질척이는

갯벌과 같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기적이라도 바라고 싶었습니다.

사막의 여행자가 신기루를 좇듯,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빛줄기 하나라도 붙잡고

싶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개뿐입니다. 받는 것 하나 없이, 내어줄 마음마저 모두 재가 될 때까지 헌신하며

그녀의 곁에 남거나, 아니면 이 모든 미련과 기대를 칼로

베어내듯 끊어내고 멀어지거나. 하지만 이 두 가지 길

모두, 결국은 비참함이라는 종착역으로 향하고 있음을 저는 압니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것도, 모든 것을

잃고 돌아서는 것도, 제게는 똑같은 절망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