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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책방 Jul 06. 2021

슬기로운 포티forty 생활, 넌 나처럼 일하지마

물러나는 중입니다

"뭐해 아직 퇴근 안 하고? 일찍 들어가 일찍."

잠깐 야식을 하고 편집실에 들어왔더니, 퇴근한 줄 알았던 후배가 떡하니 앉아 있었다. 음료수와 초코바를 키보드 옆에 세팅하고, 슬리퍼까지 신고, 돌부처처럼 자리 잡은 걸 보니 아무래도 밤샐 작정인가 보다. 헤드셋을 벗으며 그녀가 말했다.

"내일까지 업로드해야 해서요."

"어디 보자, 어디까지 했니?"

 적당함의 수준을 잘 모를 때가 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지점, 남은 모르고 나만 아는 디테일한 지점이 있다. 성실한 사람의 특징은 남이 알든 모르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못한다는 거다. 어, 친구! 오늘 이 디테일한 지점을 가지고 밤샐 작정이었다. 몇 가지 편집 포인트를 집어주고 먼저 일어났다. 같이 있으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다. 아무래도 남은 일은 내일 새벽에 나와서 해야할 것 같다. 마음이 안돼서 나가는 길에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  

"조금만 하다가 가. 넌 나처럼 일하지 마라. 그러다 몸 망가져."


 뉴미디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파견근무를 온 후배다. 제법 감각도 있고, 편집경험도 있어서인지 척하면 딱! 말귀도 잘 알아 들었다. 잠깐 있다가 갈 사람인 걸 아는데, 꼭 붙들었으면 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즐거워서 말려도 하고야 마는 사람. 이런 사람 요즘 드물다. 참 기특한데..., 자꾸 불안하다. 나도 그러다가 쓰러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번아웃된 후에 회복하는 과정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후배들에겐 이렇게 일을 주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라든가, 자아실현이라든가 그런 큰 의미보다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적절한 선'을 지켜주고 싶었다.


 X-세대,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는 낀 세대다.

96년 대학 신입생, ~라때는 마지막 운동권 세대인 88, 89학번 선배들이 긴 휴학을 끝내고 복학하기도 했고- 단지 졸업장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군대문화가 대학문화까지 이어지는 폐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참 뭐같은 선배가 몇 있었다. 이때 바로 위 95학번 선배들이 바리케이드 역할을 했다. 그들도 X-세대, '나는 나야'를 소리쳤던 개성 넘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폭력을 쓰는 선배들을 정말 싫어했다. 귀찮은 술주정도, 꼬장 부리는 얼차려도 그들이 막아주었다. 우리를 대신해 감당했다.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지랄 같은 선배가 가고 나면 우리를 달래주며 뒤풀이까지 해주던 이들도 95학번 선배들이었다. 고마웠다.


 우린 군대에서 IMF를 맞았고, 새천년이 되어 돌아온 학교는 그야말로 취업을 위한 전쟁터로 바뀌어 있었다. 졸업만 해도 취업이 된다던 시대는 지났다. 수업을 마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후배들을 보는 것이 낯설었다. 복학생인 우리를 반겨줄 사람이라곤 4학년이 된 여자 동기들 몇몇. 완전히 바뀐 학교 풍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럼에도 술잔을 부딪히며 친구들과 다짐하고 같이 고민했다. 같은 X-세대 95학번 선배들이 우리를 품어주었던 방식대로...

"후배들한테 X같은 선배가 되지 말자. 좋은 선배가 되자!"

 단, 좋은 후배가 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했다. 그들의 방식이 무척 싫었다. 권위주의는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선배랍시고 시키는 일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선배들도 같이 할 것 아니면 우리한테 시키지도 말라는 주의, 아마 높으신 선배님들께서 보기엔 정말 미운털이 박힌 후배였을 것 같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저 새끼들은..."이란 말, 참 많이도 들었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캐릭터들이 무척 낯익다. 이타적 개인주의자들인 그들의 대화가, 그들의 우정과 사랑의 방식이 무척 익숙하다. 그들의 성숙하고 순수한 모습에 뭉클해지기도 한다. 전혀 섞일 것 같지 않은 개성 넘치는 한 명, 한 명들. 그들은 무심한 듯 티나지 않게 후배들을 챙긴다. 까칠싸가지-김준환과 은둔형곰-양석형을 5대 3정도로 버무리고, 내가 할래-채송화를 기분 좋을 때만 살짝 양념처럼 뿌리면 나란 사람과 비슷할 것 같다. 소문에 귀가 어둡고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먼저 다가가 힘든 일이 없는지 물어보는 캐릭터는 절대 아니다.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슬기로운 포티forty 생활'은 뭘까? 어떻게 해야할까. 나이를 먹어서도 간섭을 싫어하는 건 '난 나야'했던 X-세대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후배들에게도 가급적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일테고. 먼저 다가가는 것이 어렵고 소심한 내게 먼저 찾아와 물어봐주는 후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까짓거 간쓸게 쯤이야 다 빼주지 뭐. 자기 일이 좋아서 열정을 쏟아붙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마음이 무너지지 않게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한다.


 아침에 출근하니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 밤샌거야?

- 다했어요. 이제 막 올리던 참이었어요.

- 얼른 들어가, 나오지마 오늘. 실컷 자고, 또 자. 자다가 지겨울 때까지 계속 자.


 후배들이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아서- 좋아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을만큼만 했으면 좋겠다. 좋아하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해야만 되는 모순된 구조가 있다면 바리케이드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좋은 선배'가 되고 싶지만, 여전히 어떻게 해야 되는지 어렵고 어색한 X-세대다. 후배가 밤새워 작업해 올린 영상을 찾아보았다.

'잘했네....'

좋아요를 눌렀다. 쓰다 지우다, 쓰다 지우다. 참 어색하게도 '머쪄요. 쵝오'라고 썼다.




#슬기로운의사생활, #슬기로운포티생활, #X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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