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의 진로를 바꾼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 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1만 2,000년 전 발생한 농업 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그리고, 과학 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인지 혁명이란 약 7만 년 전부터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중략) 우연히 발생한 유전자 돌연변이로 뇌의 내부 배선에 변화가 생겼고 그 덕분에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인간은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인종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세상을 정복한 것은 고유한 언어 덕분이다. 언어가 진화함에 따라 같이 생활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나누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적 협력이 더 강해진다. 협력을 통해 동물을 잡는 사냥 기술을 발달시켰다. 인간이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기술이 뛰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협력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우리와 침팬지의 진정한 차이는 언어를 바탕으로 한 무리와 집단의 결속력에 있다.
사회적 협력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 신화와 전설 같은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더 많은 수의 무리를 단합시킨다. 침팬지 무리가 20~25마리 정도인데 반해 언어를 통해 서로 믿고 의지하는 인간의 무리는 150명까지 확대된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공통된 신화를 믿음으로써 우리라는 개념을 형성하고, 그 규모는 부족 국가, 고대도시, 현대 국가로 이어지며 확대된다. 동일한 신과 종교가 일면식도 없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협력하도록 만든다. 허구의 스토리가 가상의 실체가 되어 현실 세계에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 먹을거리를 찾아서 여기저기 떠돌며 길 위의 삶을 살았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었고 주위의 동물과 식물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냈다. 많은 열매가 열리는 계절이 오거나 동물 무리가 떼 지어 이동하면 한동안 정착을 하기도 했다. 특히, 해산물이 풍부한 바닷가와 강변에 어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런 생활을 통해 그들은 후손인 농부들보다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이 오히려 적었다.
창의력과 적응력이 발달한 호모 사피엔스는 다수의 사람들이 협력하는 조직력까지 갖추게 되면서 빠른 속도로 지구를 정복해 나간다. 먼저, 아프리카에서 대륙이 연결되어 있는 유럽과 아시아로 이동한다. 그리고 바다를 넘어 호주와 아메리카로 퍼져갔다. 호주에 도착한 지 몇 천 년 지나지 않아 50Kg이 넘는 동물 24종 중 23종이 멸종하고 아메리카에서도 2천 년이 지나지 않아 북미 대형동물 47 속 중 34 속이 사라지고 남미에서는 60 속 중 50 속이 없어진다. 몇 천만년을 번성하던 동물들이 순식간에 멸종한 것이다. 사자나 침팬지는 아주 오랜 시간을 걸쳐 최종 포식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인간은 인지 혁명으로 인해 짧은 시간에 가장 치명적인 종이 되었다.
“농업 혁명 덕분에 식량 생산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전보다 더 나은 식사나 여유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많이 일했지만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1만 2,000년 전부터 사피엔스는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야생 식물과 동물의 삶을 조작하여 길들이는 데 바치기 시작한다. 생존과 번식의 관점에서 보면 밀과 쌀 같은 곡류는 지구 상에서 가장 성공한 식물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들인 노력에 비해 얻을 것이 많지 않다. 낟알이 작고 숫자가 아주 많기 때문에 껍질을 까고 익히는 과정이 복잡하다. 하지만 그것을 야영지로 가져와서 처리해야 했기에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 주위에 점점 더 많은 밀과 쌀이 자라게 된다. 처음에는 곡류를 수확하는 몇 주 정도만 정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식물들이 점점 퍼져나감에 따라 정착 기간이 늘어나고 결국 정착 마을이 된다.
농경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구도 늘어가고 수렵채집인의 생활을 포기하자 여성은 매년 아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농경 생활은 점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게 한다. 씨를 땅속에 심고 물이 부족하면 끌어오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어야 한다. 게다가 아이들의 숫자는 늘지만 모유를 덜 먹게 되어 면역력이 낮아진다. 동물에게 발생한 질병이 사람에게 옮기면서 유행병이 발생하고 사망률은 크게 증가한다. 인간의 숫자는 늘었지만 삶은 더 힘겹고 고통스러워졌다.
농경과 정착 생활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농부들은 수렵채집인들과의 싸움에서 유리해진다. 농경 생활은 고통스럽지만 인류는 이제 자신의 사냥터를 농부들에게 내어주거나 스스로 쟁기를 잡아야 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수렵채집 생활은 그날의 먹거리 걱정만으로 충분했지만 농경 생활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미래를 걱정하는 일이 늘어난다. 계절의 미묘한 변화에 맞춰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물을 대는 힘겨운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고 짧은 추수가 끝나면 또 다음 해를 걱정해야 한다. 인간이 과거보다 더 현명해져서 힘들고 위험한 수렵채집인의 생활을 포기하고 농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작물을 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밀, 쌀, 감자와 같은 작물이 인간을 그렇게 길들인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걱정하는 농사 덕분에 어떤 마을은 잉여 식량이 생기게 되고 이를 관리하는 지배자와 엘리트 계층이 출현하게 된다. 농부에게는 겨우 연명할 것밖에 남겨주지 않고 세금으로 빼앗은 잉여 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종교의 원동력이 된다. 농부들을 지킨다는 이유로 성과 궁을 짓고 사원과 무덤을 만드는 건축 공사에 그들을 동원했다.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인류의 90%인 농부가 작물을 키우고 가축을 길들이는 동안 극소수의 지배자와 엘리트가 해온 것만 기록한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경제 활동은 매우 불편했다. 내가 생산한 쌀 한 줌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고 내가 원하는 신발과 바꾸려면 얼마의 쌀을 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화폐가 등장하면서 모든 물건과 서비스에 대한 가치가 매겨졌고 경제 규모가 마을 단위에서 전 지구로 확대되면서 지역별 가격의 차이가 크게 줄어들었다. 차이가 생기는 즉시 싼 곳에서 구매해서 비싼 곳에서 판매하는 거래가 발생하고 그 거래로 인해 수요 공급의 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차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신뢰받는 화폐인 달러화조차 그 가치는 우리의 공통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 돈으로 다른 모든 물건을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상호 신뢰 시스템에 기반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미국 재무성을 믿고 나의 이웃들이 믿는다는 사실을 믿는다. 더구나 돈은 인간이 창조한 모든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종교나 인종, 성별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다. 즉, 화폐는 인간이 고안한 것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상호 신뢰 시스템이 된다.
제국이란 정치질서는 화폐만큼 보편적이지 않지만 문화적 다양성과 영토의 탄력성이라는 두 가지 큰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제국은 다양한 소수민족과 생태적 지역들을 하나의 정치 체제하에 묶어낼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인류와 지구에서 점점 더 큰 부분을 하나로 융합했다. 제국은 지역적 통일을 위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악을 위한 체계로 보이지만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 조직이었다. 정복당한 민족이 제국의 지배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기록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제국의 문화에 융합되어 고유의 문화가 흐지부지되는 게 보통이었다.
사피엔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속한 ‘우리’와 우리가 아닌 ‘그들’을 나누어 생각한다. 그런데,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인종적, 문화적 차이를 모두 아우르는 경향이 있었다. 제국은 온 세상이 기본적으로 하나이며 하나의 원칙과 체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켰다. 지배자들은 의도적으로 표준화된 제도와 관습, 규범을 퍼뜨렸다. 영국은 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이라는 쌍둥이 복음을 퍼뜨리고자 했고, 오늘날 미국은 제3세계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혜택을 가져다 줄 도적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500년 동안, 인류는 과학 연구에 투자하면 스스로의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경험적으로 반복해서 그 사실이 증명되었고, 정부와 부자들은 과학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였다.”
지난 500년간 인간의 힘은 경이적으로, 유례없이 커졌다. 1,500년경에 지구 전체에 살고 있던 호모 사피엔스의 수는 5억 명이었다. 오늘날에는 70억 명이 산다. 인류가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총가치는 오늘날의 가치로 2,500억 달러에서 60조 달러로 증가했다. 인구는 14배 늘었는데 생산은 240배 확대되었다.
현대 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비교하면 세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 무지에 대한 인정이다. 1,500년 이전에는 종교를 통해 우주와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설과 실증적 검증이라는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된 것은 거의 없었다. 현대 과학은 무지를 받아들인 덕분에 기존의 어떤 전통 지식보다 유연하며 탐구적이다. 둘째, 관찰을 통해 사실과 데이터를 수집하고 수학적 도구로 분석하여 이론을 만들어 낸다. 셋째, 현대 과학은 이론을 발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론을 사용해서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여 새 힘을 얻고자 하였다. 물리학 이론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을 이기기 위해 원자폭탄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과학은 제국주의와 맞물려 발전하였다. 1761년 런던 왕립협회는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태양의 일부가 금성에 의해 가려지는 시간을 지구 여러 곳에서 측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측정은 1761년과 1769년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탐험대는 천문학자만 보내지 않고 그들을 보호할 군인과 의사, 식물학자, 지리학자 등 여러 분야의 과학자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타히티와 태평양의 섬, 호주, 뉴질랜드를 거쳐 돌아왔다. 이 탐사로 영국은 본래의 목적 외에 정치 군사적 가치가 높은 정보들을 획득할 수 있었고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를 정복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서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사업은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변화되었다. 스페인 국왕은 콜럼버스에게 투자하여 아메리카 대륙에서 금광, 은광을 개발하고 사탕수수, 담배를 재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다른 국가들도 탐사 사업을 벌이지만 수익을 올릴 확률은 높지 않기에 많은 투자자가 참여하는 합자회사를 만들게 된다. 특히, 네덜란드는 개인에게 빌린 돈을 기일에 맞춰 갚고 사유재산권을 보호해 줌으로써 그렇지 못한 스페인보다 더 신뢰를 얻게 되고 투자자가 선호하는 투자 대상이 된다. 당시 가장 유명한 주식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1602년 설립되어 인도네시아를 200년 가까이 통치하면서 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투자자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대를 운영하고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순한 부와 생산에 투자되는 자본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이윤을 생산 증대에 재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소해 보이지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경제가 성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고용 증대와 물질적 풍요는 최고의 선이 되었다. 인간의 정의와 자유, 행복까지도 경제 성장에 좌우되게 되었다. 정부와 기업이 투자를 할 때 “이 프로젝트가 생산량과 수익을 늘려줄 것인가? 경제 성장을 만들어낼 것인가?” 묻게 되었고 과학의 경우에도 같은 질문이 적용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이 가능해졌고 그 믿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