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서체 한 잔 드릴까요?

헬베티카와 드라이 마티니

by 디자인 바텐더

안녕하세요.


처음 오신 분들께는

대체로 가장 단정한 선택을 권해드려요.


오늘은,

드라이 마티니 한 잔으로 시작해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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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마티니는 진과 베르무트의

미세한 비율의 차이에 따라 성격이 달라져요.


진은 이 술의 골격 같아요.

알코올의 힘, 향의 중심, 존재감을


베르무트는 단맛·허브향으로

진의 각을 둥글게 하고, 마무리를 만드는

윤곽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죠.


그래서 이 둘의 적절한 균형이 중요해요.


이 느낌은 아무런 개성도 주장하지 않는

헬베티카의 깨끗한 획과 닮은 것 같아요.


첫 잔을 받으셨으니,

1970년대 혼란의 도시 뉴욕에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눠볼게요.


아, 뉴욕 얘기를 하기 전에

헬베티카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비유가 하나 생각나네요.

Helvetica Movie Poster / Beatrice Lamberton Warde
타이포그래피는 그 안에 담긴 술(메시지)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수정 잔이어야지,
잔 자체가 화려해서 술을 가려선 안 된다.


당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여성 타이포그래퍼 중 한 명이었던

'비어트리스 워드(1900 ~ 1969)'가

황금잔과 유리잔을 예로 들며 했던 말입니다.


제 생각에 헬베티카는

이 이론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서체 같아요.

마치 마티니 잔처럼, 자신은 투명하게 존재하며

오직 '정보'라는 술만 빛나게 해 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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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뉴욕 지하철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요.

노선마다 다른 서체
뒤섞인 규칙
읽히지 않는 표지들.


사람들은 도시 한가운데서도

길을 잃고 있었죠.

wikipedia.org

이때 등장한 인물이

이탈리아 디자이너 '마시모 비녤리'였습니다.


그는 뉴욕 지하철을 위해

그래픽 표준 지침서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중심에 헬베티카를 놓았죠.

누가 보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단순한 원칙은

뉴욕의 시각적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출발점이 되죠.

www.newyork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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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길을 찾게 되자,

사람들은 다시 지상의 도시를 즐길 수 있게 되었죠.


헬베티카가 그 혼란스러운 지하 세계에

'투명한 질서'를 부여했기에,

우리는 비로소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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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이야기의 마무리는,

마티니 잔을 비우고 '맨해튼(Manhattan)'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마티니가 헬베티카라는 '서체'를 닮았다면,

이 맨해튼은 헬베티카가 정리해 낸 '도시' 그 자체거든요.


위스키와 베르무트가 교차하며 만드는 단단한 구조.

마치 바둑판처럼 정교하게 짜인 맨해튼의 거리와 닮았죠.


오늘이 첫 오픈이고

처음 오신 손님에게 첫 잔으로

드라이 마티니를 권해드린 것도


헬베티카같이 튀지 않고 정돈된 느낌으로

여기를 느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한 밤이겠네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