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을 버텨온 클래식의 위로

가라몬드와 올드 패션드

by 디자인 바텐더

어서 오세요.

오늘은 표정이 조금 지쳐 보이시네요.

지난번에 드렸던 드라이 마티니는 조금 날카로웠죠?

헬베티카처럼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지만,

그래서 가끔은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오늘은 부쩍 추워진 날씨라서

조금 더 온기가 있고 묵직한 잔을 내어드릴게요.

바텐더들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올드 패션드(Old Fashioned)입니다.


보통 칵테일 하면 얼음이 부서져라 흔드는

역동적인 쉐이킹을 떠올리시죠?

하지만 이 친구는 다릅니다.

요란한 소음 대신 침묵이 필요하거든요.

각설탕이 비터스에 젖어

위스키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 때까지,

그저 스푼으로 둥글게,

아주 느긋하게 저어줘야 합니다.


찰칵거리는 셰이커 소리 대신,

얼음과 유리가 부딪히는

낮은 달그락 소리만 들리는 시간.

바 스푼을 쥔 손끝으로

얼음이 부드럽게 돌아가는 감각에 집중하다 보면,

술을 만드는 저까지 덩달아

마음이 느긋해지는 걸 느낍니다.


저는 이 술을 만들 때마다,

서재 가장 깊은 곳에 꽂혀 있는

두꺼운 고전 소설책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책의 표지와 본문을 장식하던 서체,

가라몬드(Garamond)를 생각합니다.


혹시 '세리프(Serif)' 아시나요?

글자의 끝부분에 달려 있는 작은 장식,

흔히 우리가 '명조체'라고 부르는

글씨의 삐침 부분을 말합니다.


wikipedia.org / typofonderie.com

16세기 프랑스의 서체 조각가

'클로드 가라몽'의 이름을 딴 이 서체는,

서체 역사상 가장 우아하고 가독성이 좋은

'본문용 서체'의 표준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명조'나 '바탕체'를 볼 때

느껴지는 그 편안함, 아시죠?

가라몬드가 바로 알파벳 세계의 명조체입니다.


기계로 깎은 듯한 차가움 대신,

사람이 펜촉으로 종이를 눌러썼을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잉크의 뭉침과 온기가 살아있죠.


그래서 가라몬드, 혹은 명조체 계열의 글자로

인쇄된 책을 읽으면 눈이 피로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편안하죠.


자, 올드 패션드 나왔습니다.


'세리프' 서체가 500년 동안 책 속에서

사람들의 눈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면,

이 올드 패션드는 200년 가까이 바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온 술입니다.


'칵테일(Cocktail)'이라는 단어가 역사에

처음 등장했을 때의 정의가

'술, 설탕, 물, 그리고 쓴맛(Bitters)의 혼합물'

이었습니다.

이 올드 패션드가 바로 그 정의를 그대로 따르는,

칵테일의 조상님 같은 존재죠.


화려한 리큐르나 과일 주스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직 질 좋은 버번위스키의 묵직한 오크향,

약간의 단맛,

그리고 오렌지 껍질의 시트러스 한 향이 전부입니다.


image.png liquor.com

저는 이 둘의 공통점이

'시간이 증명한 편안함'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는 매일 새로운 유행의 폰트들이 쏟아져 나오고,

화려한 기교를 부린 시그니처 칵테일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유행에 지치고 화려함에 눈이 시릴 때,

우리는 결국 가장 기본적이고 클래식한 것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동안 바빠서 미뤄두었던 책을 한 권 꺼내 두고,

클래식한 올드 패션드를 천천히 홀짝이는 밤.

이것만큼 완벽한 위로가 또 있을까요?


잔 속의 커다란 얼음이 아주 천천히 녹고 있을 겁니다.

위스키의 맛이 시간에 따라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걸 느끼면서, 천천히 드세요.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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