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의 기주, 8개의 활자, 그리고 닫히는 문
어서 오세요.
아, 오늘은 새로운 주문을 받지 않겠습니다.
영업이 끝났거든요.
바의 조명을 한 단계 낮추고,
마호가니 테이블을 닦아내는
이 고요한 마감 시간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당신이 그동안 비워낸 여덟 개의 잔들은
모두 깨끗하게 씻겨 진열장 위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습니다.
참 길고도 짙은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장 차갑고 이성적인 진과
군더더기 없는 헬베티카로 첫인사를 나눴죠.
비가 오던 날엔 묵직한 위스키와
펜글씨의 온기를 품은 가라몬드로
꽁꽁 언 마음을 녹였습니다.
보드카의 날카로움과
디도의 아찔한 긴장감으로 도시의 밤을 걸었고,
축배의 샴페인과 기하학적인 푸투라로
달 표면에 낭만적인 발자국을 찍기도 했습니다.
숨이 막힐 땐 거친 파도를 닮은 럼과
춤추는 스크립트 서체로 그리드를 탈출했고,
정신이 번쩍 드는 데킬라와
벽돌 같은 록웰로 일상에 타격감을 주었습니다.
사치스러운 브랜디와
화려한 아르 데코로 쓸모없는 아름다움을 찬양하더니,
마침내 달콤한 리큐어와
통통한 쿠퍼 블랙의
둥근 위로 속에서 긴장을 풀었죠.
디자이너로서 픽셀을 만지던 시간과,
바텐더로서 얼음을 깎던 시간.
전혀 다른 두 세계 같지만,
결국 이 여덟 잔의 술을 내어드리며
제가 깨달은 본질은 하나였습니다.
'글자를 고르는 일'과 '술을 섞는 일'은 완벽하게 똑같다는 것.
디자이너는 백지 위에
어떤 서체를 올릴지 고민함으로써,
읽는 이의 호흡과 감정을 설계합니다.
바텐더는 빈 잔에 어떤 기주를
부을지 결정함으로써,
마시는 이의 오늘 하루와
내일의 컨디션을 설계하죠.
두 직업 모두,
당신이 삼켜야 할 '메시지'와 '위로'를
가장 완벽한 형태의 '그릇'에 담아내는
건축가들입니다.
이 바의 문을 열고 나가면,
당신 앞에는 다시 무수히 많은
빈 캔버스와 빈 잔들이 놓일 겁니다.
어떤 날은 헬베티카처럼 단호해져야 할 것이고,
어떤 날은 쿠퍼 블랙처럼
한없이 둥글게 사람들을 안아주어야 하겠죠.
제가 만들어드린 이 여덟 번의 페어링이,
당신이 앞으로 써 내려갈 수많은 날들의 문장 속에,
그리고 퇴근길에 홀로 기울이는
한 잔의 술 속에 아주 작은 영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당신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한 단 하나의
'서체'와 '기주'는 무엇이었나요?
언제든 세상의 뾰족한 텍스트들에
지쳐 목이 마를 때,
다시 이곳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당신의 기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글자와 술을 준비해 두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써 내려갈
앞으로의 모든 문장들을 위하여.
마지막 건배.
Che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