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둥글게 살고 싶어서

쿠퍼 블랙(Cooper Black)과 깔루아 밀크

by 디자인 바텐더

어서 오세요.

벌써 여덟 번째 잔이네요.

그동안 독한 술들을 참 잘 견뎌오셨습니다.


날카로운 마티니부터

묵직한 올드 패션드,

강렬한 마가리타까지.


우리는 지금까지 참 '어른스러운' 서체와 술들을 맛봤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완벽해야 했고,

때로는 쓴맛을 기꺼이 삼켜야 했죠.

하지만 매일 밤 그렇게

힘을 주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이 여정의 마지막은,

가장 말랑말랑하고 무해한 녀석으로 준비했습니다.


혹시, 글자에도 '살집'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오늘 소개해 드릴 서체는

활자 세계에서 가장 통통하고 귀여운 녀석,

쿠퍼 블랙(Cooper Black)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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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오스왈드 브루스 쿠퍼가

디자인한 이 서체를 보세요.

가라몬드의 우아함이나

디도의 날카로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획의 끝은 조약돌처럼 둥글게 닳아 있고,

빈 공간(Counter)은 살이 쪄서 아주 좁아졌죠.


마치 푹신한 쿠션이나

둥글둥글한 구름을 뭉쳐놓은 것 같지 않나요?


이 서체는 심각한 뉴스나

진지한 소설에는 절대 쓰이지 않습니다.

대신 1970년대 팝 음악의 앨범 커버,

맛있는 디저트 가게의 간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통통한 고양이

'가필드'의 로고가 되었죠.


보는 순간 묘하게 마음이 무장해제되는 글자.

이 둥글둥글한 쿠퍼 블랙에 어울리는 기주는

단연코 리큐르(Liqueur)입니다.


리큐르는 증류주에 과일, 허브, 크림,

혹은 커피 같은 향과 단맛을 잔뜩 더해 만든

'혼성주'입니다.

알코올 특유의 독한 냄새를

달콤함으로 덮어버린, 아주 친절한 술이죠.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커피 리큐어,

'깔루아(Kahlua)'를 베이스로 한

깔루아 밀크(Kahlua Milk)를 내어드릴게요.

image.png thespruceeats.com

잔을 한 번 보시겠어요?

아래에는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깔루아가 깔려 있고,

그 위로 부드러운 우유가 눈처럼 덮여 있습니다.

마시기 전에는 층이 나뉘어 있지만,

바 스푼으로 몇 번 휘저어주면

금세 달콤한 라떼의 색깔로 변하죠.


한 모금 마셔보세요.

입안을 찌르는 알코올의 킥(Kick)이나,

혀를 조이는 쓴맛은 전혀 없을 겁니다.

달콤한 커피 우유를 마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부드럽고 묵직하게 넘어갈 테니까요.


저는 쿠퍼 블랙과

깔루아 밀크가 참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세상의 뾰족한 모서리들을

둥글게 깎아낸 결과물이니까요.


손님,

오늘 하루 온갖 각진 말들과

날카로운 시선들 사이에서 베이고 긁히셨나요?

그렇다면 오늘 밤만큼은

이 푹신한 서체에 기대어,

디저트 같은 달콤함으로 스스로를 달래주세요.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가끔은 이렇게

한없이 둥글어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뾰족했던 하루를 부드럽게 감싸줄,

당신의 달콤한 밤을 위하여.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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