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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Jan 12. 2016

우리는 왜 응팔에 열광하는가?

신원호 연출 & 이우정 극본, [응답하라 1988]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라면 단연, [응답하라 1988]이다. 케이블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17.8%을 기록하며 종영을 앞두고 있다.(글쓰는 시점은 종영 2회 전) 복고는 문화예술 전 분야에서 어느 시대나 사랑받아온 소재이지만, 응답하라 시리즈 중에서도 특별히 이번 1988편이 더욱 큰 사랑을 받는 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재미를 만들어 내는 기본적인 전략은 이렇다. 복고와 예능이라는 파괴력 있는 무기를 앞세워 이를 최전선에 배치함으로써 시청자의 관심을 먼저 잡아 끈 이후에, 본격적인 로맨스로 지원 사격하여 시청자의 마음을 완전히 점령하는 수순이다. 때문에 그 복고와 예능이라는 코드가 앞에서 파괴력을 갖지 못하면 드라마 전체가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마는 구조라는 측면에서 어찌 보면 리스크가 큰 전략이기도 하다. 그래서 리스크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적 장치, 가령 디테일과 캐릭터, 콩트식 에피소드, 배경음악, 트릭 등등의 표현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드라마 내내 보는 재미, 듣는 재미, 웃는 재미를누릴 수 있다. 그러니까,


1. 깨알 같은 디테일로 추억을 소환하는 재미.

2. 예능 스텝이 만든 드라마답게 지루할 틈 없이 등장하는 콩트식 에피소드.

3.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의 예능적 캐릭터 배치.

4. 드라마 곳곳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그때 그 시절 노래.

5. 도대체 누가 남편인지 안달 나게 하는 각종 트릭들.


깨알같은 디테일과 예능적 캐릭터


이런 것들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힘은.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번 응답하라 1988 (이하 응팔)의 경우는 좀 다르다. 물론 복고와 예능이라는 요소는 여전히 강력하게 가져가지만 단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번 응팔이 탑재한, 드라마 전반에 흐르는 폭탄은 바로 가치관과 정서다. 그리고 그 가치관과 정서는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힘 이상의 공감대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희구하는 보편적인 가치인 휴머니즘과 우리에게 사라져가고 있는 정서인 낭만에 대한 것이다.


응팔은 다른 시리즈와 다르게 웃음에 할애된 부분보다 눈물에 할애된 부분이 많고, 실제로 매 회 눈시울을 적시는 장면이 많은 것 또한 이런 가치관과 관련된다. 또한 이야기의 중심이 단지 주연들의 로맨스에만 집중되지 않는다는 측면, 아이들의 사랑 이상의 어른들의 인생에 대한 조명이 있으며, 무엇보다 개인들간의 관계 보다는 공동체 관계, 가족의 의미가 부각된다는 측면에서 다르다.


포스터만 봐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가령, 드라마 초창기에 눈물을 쏟게 하는 성동일 어머님 장례식 장면을 보자. 떠들썩한 장례식을 마치고 형님과 조우하면서 형제들끼리 끌어안고 눈물이 터지던 그 장면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사실 드라마 초반이라 인물에 감정 이입도 하기 전이었으며 특별히 그들 형제에게 사연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그렇게 눈물이 흘렀던 것일까? 왜 그랬을까. 그저 주인공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뿐인데. 심지어 그 할머니와의 애틋한 대화 장면 한 컷조차 보여주지 않았는데.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고 알았다. 언젠가부터 우린, 장례식에서 부모님의 사망을 두고 저렇게 서럽게 우는 사람 본 적이 없게 된 것이다. 부모님과 관련해서는 어떤 병이 들어서 얼마가 들고 얼마나 더 간병을 해야 하며 남겨 재산은 얼마가 되고 또 어떻게 분배될 것인가... 등등이 누군가의 부모님 장례와 관련해서 오고 가는 말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모님=돈'이라는 등식이 우리들의 대화 밑 어딘가에 깔려있는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동일과 그 형제들의 눈물에는 이해관계가 없다. 그들이 우는 이유는 그저 부모님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그리움과 회한의 감정에서 오롯이 비롯된다. 그 장면은 우리가 부모님에게서 잊고 있었던 인간적인 감정을 깨워 우리를 이해관계자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호명한다. 그리고 현실 때문에 묻어두고 있던 부모를 모셔야 하는 어른의 모습이 아닌 부모님께 안겨 칭얼대던 아이의 모습이 일순간 마음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들


인간이 손익보다 우선하는 휴머니즘의 모습은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곳곳에서 등장한다. 선우 엄마가 집을 저당 잡혀 쫓겨나야 할 상황에서도 이웃들은 대뜸 돈을 빌려주려 한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돈이 얼마 없다는 걸 미안해할 지경이다. 요즘 같으면 사기 당하기 딱 좋은 태도다. 더 놀라운 건 절대로 받지 않으려는 선우 엄마다. 개인 간에 돈을 빌려주고 빌려 받는 세태가 사라진 요즘, 참으로 진기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덕선이 아버지는 보증을 잘못 섰다가 빚더미에 올라앉았지만, 친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더 놀라운 건 나중에 친구가 나타나 돈을 마저 갚아주며 미안함의 선물을 전해준다. 선물을 전해 받은 아내도 그 이전에 갚은 돈의 액수를 셈하지 않는다. 그저 다행스럽고 고맙다. 바둑 천재 아들을 둔 탓에 어마어마한 갑부가 된 택이네지만, 이웃들 누구도 돈만을 부러워하는 천박함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돈을 많이 번다는 이유로 어른이든 아이든 그들에게 아첨하고 주위를 맴도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들에게는 그저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걱정되는 택이 이며, 말수가 적어 답답하기 그지없는 택이 아버지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이런 모든 상황은 단지 그땐 그랬지 라는 추억의 향수와는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인간에 대한 향수다.


맞다. 인간이 원래 저랬었지. 하는.


드라마 속 인물들은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휴머니즘은 로맨스에서도 드러난다. 사랑이 곧 소유이자 현실이 된 시대에, 아이들이지만 이들의 사랑 또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로맨스 라인들을 보면 하나 같이 자신의 필요나 욕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정환이와 택이가 덕선이에게 대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부끄러워서도 아니고 자존심이 상해서도 아니다. 더 이쁜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손해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망설이는 요즘의 썸과는 다르다. 그들이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친구 때문이다. 친구에 대한 걱정이 자신의 욕망보다 더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사랑이냐 우정이냐 뭐 이딴 식의 이분법적이고 일차원적인 논의가 아니다. 다만, 사랑에 있어서도 우정이 걱정되는 그 미련스럽도록 인간적인 그들의 마음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적임에서 오는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는 울컥울컥 마음이 동요하는 것이다. 역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맞다. 사랑이 원래 저랬었지. 하는.


인간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던 시대를 복원하며, 작가들은 가끔씩 지금 시대를 꼬집기도 한다. 무슨 시사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에 분량이나 무게를 할애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나래이션이나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가령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요즘 애들은 근의 공식만 알지, 인생을 몰라요."

"대학 나오고 박사 달고  이런 거 다 필요 없다. 사는데 그런 종이 쪼가리가 뭐 필요하노."

"넌 맨날 이겨야 돼. 져서도 안 되고, 징크스도 안 되고, 똥도 싸면 안... 똥은 싸라. 대신 냄새가 나면 안 돼."


휴머니즘 말고도 이 드라마의 특별함은 낭만이라는 정서에도 있다. 낭만. 어쩌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쓰일 법한 단어가 되어버린 낭만은, 그 순수함과 순진함으로 인해 지금은 어리석음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단어다. 사실 맞기도 하다. 누군가를 향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열망, 다른 이유 따위는 생각할 수 없이 자신의 사랑에 충실하고 상대를 오로지 기다리고 믿는 순진함. 요즘 우리의 사랑은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통해 저울질되는 타협과도 같은 감정이 되어버렸다. 썸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된 건, 단지 남녀 사이에 있는 설레임의 과정, 밀당의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의 감정은 다치기 싫지만 너의 감정은 취하고 싶은, 그래서 연애하기는 부담이지만 기분 좋은 감정만은 누리고 싶은, 자기방어와 욕망에 대한 집착이 낳은 협상의 관계를 지칭한다. 이런 관계에 순수와 순진이란 말은 곧 패배와 손해를 의미한다. 즉, 썸이라는 협상에서 패를 미리 보이고 만 하수가 된 꼴이다. 낭만에는 그런 협상의 개념이 없다. 자기 방어를 위한 판을 깔지도 않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안간힘도 없다.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에 몰입하여 나를 상대에게 던진다. 그 던짐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저울질도 없다. 그저 터져버릴 것 같은 설레임과 그리움만이 있다.


설레임과 그리움이 폭발하는 낭만의 커플들


드라마에서 낭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캐릭터라면 단연, 정봉과 선우다. 상대에 대한 그들의 순진함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들의 만남을 보여주는 장면은 항상 극적이다. 극적인 장소에서 극적인 포옹과 극적인 키스, 감정의 폭발을 보여주는 통쾌함. 바로 낭만의 향연이다. 이런 낭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를 통해 누려본 지가 언제인가 싶다. 어리석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사랑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사랑의 낭만을 잘 보여주는 나래이션이 있다. 이 드라마의 특별한 표현 요소 중 하나인 나래이션은 매 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명문이다. 그리고 그 명문들은 하나 같이 인생, 사랑을 향해 있다. 마치 인간성을 복원하려는 사명감을 가진 것처럼. 이 드라마의 흥행이 단지 복고와 예능의 장치에만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래이션 중 특히, 기억나는 구절을 몇 개 옮겨 적어 본다.



이제 더 이상 산타를 믿지 않는 나이였고 마니또 게임에 설레지 않는 나이였다.

몰래 두고 가는 선물과 비밀스레 전해지는 은근함으론 성에 차지 않는 나이였다.

담아 두자면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이 가빴던 그 두근거림

털어놓자면 가슴이 터질 것 같던 그 쑥스러움

못 견디게 티 내고 싶지만 들키기는 싫었던 쌍팔년도의 그 셀럼

우린 열여덟이었다.


- 7화, [그대에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단지 그 사람의 체온을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체온을 닮아간다는 얘기야.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너를 끝없이 괴롭게 만든대도 그래서 그 사람을 끝없이 미워하고 싶어 진대도 결국 그 사람을 절대 미워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

사랑한다는 건 미워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코 미워할 수 없다는 뜻인 거야.


- 12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열어보기 전에는 무엇을 잡을지 알 수가 없다.

쓰디쓴 초콜릿을 잡았는데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내가 선택한 운명이다.

후회할 것도 질질 짤 것도 가슴 아플 것도

없다.


그러나 운명은 그리고 타이밍은

그저 찾아드는 우연이 아니다.

간절함을 향한 숱한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순간이다.

주저 없는 포기와 망설임 없는 결정들이 타이밍을 만든다.

그 녀석이 더 간절했고 난 더 용기를 냈어야 했다.

나빴던 건 신호등이 아니라 타이밍이 아니라

내 수많은 망설임들이었다.


- 18화, [굿바이 첫사랑]




이 드라마는 보고 있자면, 한 장면 한 장면, 대사 한 마디 한 마디, 소품 하나 하나에도 온 정성을 다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건 단지 재미를 위한 장치 이상의, 인간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 위한 정성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보편적인 인간성 회복을 위한 메시지라는 측면에서 감동적이다.


재미와 감동을 모두 잡아낸 그들의 솜씨에, 그들의 정성에, 그들의 통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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