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행동론에서 디지털 행동론으로 #6
화장품 판매에 있어서 예전에는 TV 광고가 미치는 영향력이 사실 막강했다. 어떤 모델이, 어떤 카피, 어떤 비주얼로 얼마나 아름답게 보여지는가에 따라 브랜드의 이미지는 좌지우지되었고, 그래서 탑 모델이 신선한 카피, 신비로운 비주얼과 환상적인 케미를 이룰 경우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하게 나타나고는 했다. 그러니까 광고 한 편으로 브랜드의 이미지와 매출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고, 때로 광고 한 편으로 일약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배우 이영애 씨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스타가 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곳엔 광고 한 편이 자리 잡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한 줄의 카피와 함께 말이다.
다시 디지털 세계로 돌아와 보자. 지금은 어떠한가? 물론, TV 광고는 필요하다. 이미지를 구축, 유지, 관리해 나가는 데 있어 아직도 TV만 한 채널, 광고를 대체할 콘텐츠는 없다(아직까지는). 하지만 TV 광고 한 편으로 하나의 브랜드나 제품이 갑작스럽게 어마어마한 빅 히트를 보기는 어려운 시대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간헐적으로 그런 광고들이 등장해 주기는 하지만) 요즘의 TV 광고는 빅 히트를 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 브랜드와 제품의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어적 역할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필자가 단지 광고회사에 다녀서만은 아니라, TV 광고는 브랜드의 존재감 유지를 위해 여전히 반드시 필요한 마케팅 활동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 역할과 효과에 대한 기대가 조금 달라졌을 뿐).
왜 그럴까? 예전에는 TV 광고가 그토록 큰 힘을 발휘했는데, 왜 지금은 그렇지 못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원들이 더 많이 생겨나고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앱 중에 ‘화해’라는 앱이 있다. ‘화장품을 해석하다’라는 말의 줄임말인 이 앱은, 각 브랜드의 제품별로 화장품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성분들을 모조리 다 나열해 주는 재미난 앱이다. 단지 성분 나열만이 아니다. 인체에 유해할 수도 있는 성분 20가지를 정해 놓고([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이라는 책을 기준으로 함), 해당 성분이 제품별로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경고해 준다. 몇 번 검색하다가 빨간 경고 아이콘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뭔가 섬뜩해지기도 하고 구매하려던 제품도 망설여지게 되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이제는 화장품 브랜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앱은 판매하는 기업 입장에서 보면 아주 난감한 정보원이자 골치 아픈 방해꾼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다. 때로는 억울할 면도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화해 말고도 화장품을 품평한 댓글들만 모아놓은 ‘글로우픽’도 있고, 어떤 화장품이 쓸만한지 추천해 주는 ‘언니의 파우치’도 있다. 제대로 된 정보, 실질적인 효과, 믿을 만한 검증절차가 필요하다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채널들이 바로 내 손 안에 있는 셈이다.
굳이 화장품 카테고리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모든 카테고리에서 이러한 검증 절차를 위한 앱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앱의 등장은 기업에게, 마케터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일 수밖에 없다. 기업이, 마케터가 소비자들의 인식을 가지고 놀던 시대는 갔다. 이제는 소비자가 기업을, 마케터를 가지고 놀려한다.
하지만, 앉아서 놀림을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그들과 한 판 붙자고 소매를 걷어붙일 일도 아니다. 방법은 단 하나다. 소비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들이 움직이는 맥락 하에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즘 애들은 재미있는 것을 좋아한다며, 무턱대고 광대 분장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해봐야 잠깐 지나가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 수도 있다. 결국 그들이 선택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을 이해하고, 그 가운데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출발점은 이렇다. 그들은 광고를 믿지 않는다. 안타깝고 아프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광고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마케팅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마케팅이 자신들을 희롱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속칭 ‘호구’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턱대고 모든 브랜드와 제품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히 자신들을 멋지게 빛내줄 브랜드와 제품, 아니 ‘My Item’을 원한다. 그리고 나를 빛내줄 무기, 가장 최고의 아이템을, 가장 최소한의 노력과 가장 최적의 가격으로 얻고자 한다. 다만 어떤 정보를 믿어야 할지 모를 뿐이다. 그리고 그 믿을만한 정보에 ‘광고’가 들어 있지는 않다(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광고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광고조차 하지 않으면 검색해야 할 리스트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저 ‘듣보잡’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믿을만한 정보원을 찾아 검색에 나선다. 그것이 한정된 시간에 믿음직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 효율적인 방법(믿을만한 정보원의 검색 과정)에 어떤 채널과 어떤 정보가 포함되느냐에 따라 선택은 결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을만한 정보원의 검색 과정은 디지털 세계의 새로운 의사결정 과정, 즉 ‘Digital Decision Journey’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필자는
새로운 소비자 의사결정 과정의 이름을 ‘검증의 나선형’으로 부르고자 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자. 수분크림이 다 떨어져 가고 있다. 이전에 쓰던 것을 그대로 살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왠지 나를 위해 좀 더 투자해보기로 결심한다. 그렇다면, 어떤 아이템이 좋을까? 가격대를 올리는 게 부담스러우니 그만큼의 가치를 하는, 아니 이왕이면 가격 이상의 가치를 하는 제품이었으면 좋겠다. 잘못된 선택으로 애써 투자하기로 결심한 마음에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다. 사놓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선택으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품질의 수분크림 아이템이 아닌, ‘이것이다’ 싶은 확신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확신을 얻기 위해 끊임없는 정보 검증의 무한 여정에 나선다.
우선은 내가 알고 있는, 요즘 눈에 띄었던 브랜드를 몇 개 후보군에 올린다. 김태희가 광고하는 에센스도 있고 무슨 무슨 성분이 들어가서 왠지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제품도 있다. 왠지 이미지가 뒤처져 보이거나 세련되지 않은 브랜드는 일단 안될 것이다. 몇 가지 브랜드를 정했으면 이제 본격적인 아이템 찾기에 나서야 한다. 노출된 정보가 아닌 내가 찾는 정보, 즉 믿을 만한 정보인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정보는 너무 많다. 검색할라 치면 봐야 될 것이 한두 개가 아니고, 깊이 파고들다 보면 머리만 복잡할 뿐이다. 애써 전문용어를 공부해 봐야 결국 서로 다른 주장에 급기야는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진은 빠지고 확신은 점점 옅어져 간다.
역시 다시 한 번 필요한 것은 확신이다.
그래서 손쉽게 검증을 대신해주는 전문가 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소비자들의 말을 찾게 된다. 뷰티 전문 채널인 온스타일에서 하는 ‘Get it Beauty’를 찾아본다. 전문가들과 유명 여배우들이 나와 가감 없이 하는 말이라니 들어볼 만 하다. 특히 가격과 브랜드를 감추고 실제 테스트와 평가만으로 순위를 정한다니 믿을 만하다. 다행히 내가 찾는 브랜드 중에 1위에 오른 아이템이 있어 다행이다. 쉽게 골랐다는 확신에 마음마저 기쁘다. 구매하기 전,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본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한다. 그거 다 회사에서 로비해서 순위를 올린 거라고. 이런, 이것도 마케팅이라니. 요즘 방송 믿을 게 하나도 없다. 맛집도 로비고 드라마 소품도 다 PPL인 세상이다. 얼마 전 드라마 ‘용팔이’에서 PPL한 앱이 생각난다. 역시 좀 더 검증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이럴 때는 구매 후기가 가장 믿을 만하다. 쇼핑몰에 들어가서 생각했던 아이템들의 구매 후기를 살펴본다. 카페와 블로그도 같이 본다. ‘써보니 너무 좋다’, ‘너무 만족스럽다’ 같은 평들이 많다. 처음에는 안심되고 좋았지만, 보면 볼수록 왠지 뭔가 수상하다. 너무 좋다니까, 그것도 브랜드가 노출되게 찍은 사진과 함께 말이다. 구매 후기도 왠지 문장이 자연스럽지 않고 리포트 같은 문체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틀림없이 경품을 노리고 쓴 말일 것이다. 그중 ‘별로다’, ‘절대 사지 말라’는 말이 차라리 신뢰가 된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표현은 또 완전히 믿지 못하겠다. 그냥 개인 취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향이 안 나서 바를 때마다 느낌이 안 좋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향이 나면 더 싫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친구에게 SOS를 청한다. 친구들은 그래도 A와 B, C 정도가 무난하다고 말한다. 일단 그 정도를 써보고 별로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에 다시 바꾸라고 조언해 준다. 처음부터 딱 마음에 드는 것을 사고 싶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알아보는 것도 힘들어서 친구들이 말해준 세 가지에서 선택하기로 한다. 그런데 한 친구가 또 이런 얘기를 해 준다. ‘요즘 화장품 화학성분 분석해 주는 앱이 있는데 꼭 참고하라’고. 안 그래도 요즘 피부에 안 좋은 성분을 뺀 저자극 화장품이 대세라고 하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난다. 앱을 다운받아 설치하고 세 가지 아이템을 검색해서 찾아본다. 이게 웬일인가. 셋 중에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A 아이템이 유해성분 경고가 가장 많다. 빨간 글씨로 경고를 보내는 성분이 7개가 된다. 왠지 무서운 생각이 든다. 비싼 돈을 주고 이런 성분이 든 것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다른 아이템 중 유해성분이 가장 적다는 B를 선택한다. 앱을 살펴보기 잘했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이제는 화장품숍에 가서 구매하는 일만 남았다. 가까운 곳에 가서 생각해 놓은 아이템을 손에 발라서 테스트해 본다. 구매를 종용하는 매장 언니 때문에 왠지 확신이 더 들지 않는다. 다른 숍에 가서 대안 중 하나였던 C를 테스트해 본다. 왠지 감촉이 더 좋은 것도 같고 향도 별로 나지 않고 패키지도 마음에 든다. 마지막으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카톡을 날려본다. ‘B나 C나 크게 다르지 않다. C도 괜찮으니 한번 써봐라’라는 말이 돌아온다. 주저 없이 C를 구매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잘 샀다는 확신이 든다. ‘좋은 걸 샀으니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에 왠지 기분까지 좋아진다. 힘들고 번거로웠지만, 그런 만큼 검증된 아이템을 get한 것 같아 만족스럽다.
구매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과정을 거쳤지만, 이 과정은 내가 원하는 효용성 있는 아이템을 ‘검증’하는 것이 핵심적인 소비자 행동의 동인이다.
즉, 원하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검증의 무한 검색, 무한 비교, 무한 확인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소비자가 얻게 되는 이익은 비용 대비 성능 좋은 상품이라는 기능적 가치겠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잘 샀다'는 만족감, 확신의 심리적 가치다. 그 확신을 얻기 위해 소비자들은 여러 번의 검증과정을 거치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의 검증 과정을 일컬어 ‘검증의 나선형’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소비자가 얻는 가치는 '확신'이다.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아래와 같다.
이러한 검증의 나선형에서는 다양한 정보원들이 활용되고 있는데 최초의 광고에서부터, 드라마, 방송 프로그램, 구매 후기(쇼핑몰, 블로그), 각종 앱, 제품 테스트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구매 아이템 리스트를 좁혀 나가고 선택에 가장 큰 확신을 주는 검증의 정보원은 바로 소비자의 ‘친구들’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기업의 가장 큰 경쟁 상대는 경쟁 브랜드가 아니라,
소비자의 친구들일지도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특정 아이템을 구매하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특정 아이템 구매를 막을 수는 있다. 친구의 부정적인 정보는 아주 큰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확장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 상의 Buzzer들, 그리고 마케팅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정보 채널인 다양한 애플리케이션들, 이들의 존재 또한 구매를 막을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결국, 디지털 상에서 어떤 말들이 오고 가는가가 아이템의 평가와 구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볼 수 있으며, 디지털 세계에서의 마케팅은 바로 이렇게 오고 가는 말, 즉 Buzz를 어떻게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 마케팅의 발전은 Buzz의 통제, 관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수단과 방법론의 개발을 통해 가능할 것이며, 이것은 전 세계 모든 마케터, 광고인들의 숙제로 남아 있다.
※ 본 글은 한국광고총연합회에서 발간하는 [광고계 동향] 2015년 12월호 (Vol.297)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