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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Jan 28. 2018

무엇이 나의 삶을 살게 하는가?

한 여자의 위대한 삶, [JOY]

'나의 삶'을 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건 혼자 치르는 전쟁과도 같은 것이다. 넘어야 할 고지가 많고 도처에는 예기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결과에 대해서는 고스란히 책임을 떠안아야 하고 그 누구도 대신 수습해 주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온갖 위로와 조언이 넘쳐나고 희망의 말들로 내 귀를 가득 채우지만, 실패와 좌초의 순간에는 아무도 곁에 없다. 아니 오히려 침묵을 가장한 비난과 조소가 난무한다. 그러니까 '나의 삶'이란 건 장밋빛 판타지 같은 게 아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와의 싸움이다. 두려움은 내 편이 아니며, 희망은 아무런 미래도 담보해주지 않는다. 의지는 나약하고 세상은 냉정하다. 그리고 인간은 그리 신뢰할 만한 동물이 못된다.


나의 삶은 오로지 나의 문제이며 나의 선택이다. 그것은 나만이 수행할 수 있고 나만이 감당할 수 있다. '나의 삶'을 위한 선택에 있어 우린 그 사실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은하철도 999]에서 마쓰모토 레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선택에 타인의 말은 필요 없어"



영화 속 주인공 '조이'는 타인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는 여자다. 남자에 둘러싸여 들의 삶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위험한 도박이며 스스로 선택할 수조차 없는 불리한 도박이다. 하지만 다른 길을 상상하지 못했기에 그녀는 무거운 걸음으로 그 길을 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에 의해 자신을 포기당한 채, '여자'라는 강요된 삶에 갇혀있다. 그리고 그 삶은 지옥과도 같다. 무책임한 아버지 때문에 작은 방안에 숨어버린 어머니, 철없는 남편때문에 홀로 생계와 육아를 감당해야 하는 그녀, 자신만을 바라보는 할머니와 딸.  모두가 조이에게 의 무게를 짊어지도록, 타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재촉한다. 조이 또한 그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깨진 와인잔을 치우려 대걸레를 빨다가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보며 그녀는 각성한다. 그렇다. 타인의 삶을 벗어나기 위한 출구는 타인이 마련해주지 않는다. 그 출구 또한 자신이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출구는 기쁨의 순간에 오지 않는다.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절망의 순간에 찾아온다. 그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잃어버렸던 그 무엇, 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나의 삶에 대한 갈망, 그것을 목격한다. 그리고는 더 이상 잊어버려지지 않는다. 인내의 시간은 길고 길지만, 결단의 순간은 짧다.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내다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무모하지만 그 무모함이 나의 삶으로 돌진하는 뜨거운 연료가 된다.



우리는 '나의 삶'을 원한다. 그건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이가 바다로 향해 필사의 질주로 걸음을 내딛는 본능과도 같다. 저 넘어 측량할 수 없이 넓은 바다에는 끝도 없는 자유가 펼쳐진다. 물론 역시 온갖 장애와 천적, 경쟁과 위험을 동반한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자유는 경이로움이 된다. 척박한 환경에서 피어나는 꽃이 아름답다 못해 위대하듯, 위태로움 속에 거머쥐는 자유의 순간들은 그 어떤 경험보다 가치롭다. 인간은 자유를 향해 갈망하도록 태어나 있다. 그래서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은 거창한 이념이나 이상 이전의, 인간이 처한 실존의 문제다.  


하지만 체념의 유혹은 달콤하다. 자유가 없는 삶은 안전하고 확실하다. 예기치 못한 위험이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무릎의 타박상이 전부다. 아니 드라마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배신감도 있을 수 있겠지.(영화 속 조이의 어머니는 TV와 침대라는 안전한 삶을 선택했다.) 그런 소소한 위험을 극복하며 일상에 나를 맡기는 삶은 안전하고 확실하다. 그리고 가끔 주어지는 감각의 달콤함은 삶을 즐기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약간의 물질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도 있다. 더 원하려는 나의 갈망은 통제하기 어렵지만 잘만 다스리면 만족을 얻는 순간의 쾌감이 있다. 그런 쾌감이란 인간에게 삶의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는 기특한 감정이 된다. 하지만 쾌감이 있는 안전한 삶도 감당해야 할 건 있다. 그것은 나의 실존, 아니 나 그 자체이다.



자유란 달콤하지 않다. 그것은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를 향해 있다.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운행하듯, 인간은 자유의 주변을 언제나 서성인다.


자유를 찾아 나서는 길은 험난하다. 그 떠남의 결정에서부터 길을 걷는 한걸음 한걸음이 내내 힘겹고 위협적이다. 두려움은 언제나 용기와 의지를 꺾어서려 든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용기는 두려움 앞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과도 같다. 하지만 우리는 북극성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성공을 담보해 주는 근거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을 수 있다. 믿음이란 근거나 증거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안에 북극성이 있다는 믿음, 그것은 어떠한 근거보다도, 어떤 증거보다도 더 강인한 믿음의 힘을 불러 세운다. 그리고 그 모든 장애와 위험과 비난과 조소와 불안과 두려움, 나약함과 후회를 넘어서게 해준다. 그 놀라운 힘의 북극성,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리고 똑같이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찾아 나서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바로 나 자신이다. 우리는 물질과 감각 뒤에, 안전과 확실함 뒤에, 근거와 증거 뒤에, 불안과 두려움 뒤에 숨어, 자유 없는 삶에 기거한다. 우리가 자유를 피해 숨을 곳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리고 술래잡기에서 술래보다 숨는 사람이 더 쉽고 편하듯, 우리는 쉽고 편하게 도피처를 찾아낸다. 그리고 여러 가지 도피처를 전전하다 결국은 스스로에게 마저 숨겨져 자신을 잊은 가련한 짐승이 되고 만다.

 


조이는, 아무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한 삶의 끝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자신을 찾아 다시 일으킨 용감하고 위대한 여성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처참하고 절망스러운, 감옥 같은 타인의 삶을 끝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마는 위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이야기는 절망의 순간에서 피어난 자각에서 비로소 출발한다.


"결국 나는 나 자신에게도 숨겨져 버리고 말았어"


자유란 잃어버렸던 나를 찾아 나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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