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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May 27. 2020

우리가 사랑하는 숲이에요.

비자림로가 파헤쳐지던 날

‘제주’ 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물론 바다가 먼저겠지만, 이 곳에 살아가다 보면 제주엔 바다 외에도 아름다운 자연이 많다는 걸 나날이 느끼게 된다. 특히 그중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내겐 구름과 숲이다. 구름이란 게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고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겠지만, 제주의 구름은 정말로 ‘그림 같다’. 그림 같이 아름답다는 말이라기 보단, 언젠가 평화로운 풍경화 속에서 본 듯한 형체의 구름,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뭉게구름’, ‘새털구름’, ‘양떼구름’의 그림 속 모습, 바로 그것이다. 뭉게구름은 정말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듯하며, 새털구름은 촘촘히 연속되는 새의 깃털을 보는 것 같고, 양들이 무질서하게 무리 지어가듯 몽글몽글한 형상들이 총총총 이어진다. 그래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제주 하늘은 또 어떤 구름을 보여줄까 하는 기대로 창 밖을 내다보게 된다.


제주 송당의 하늘과 구름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으로 꼽는 또 하나의 자연은 ‘숲’이다. 제주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지만 바닷가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양 옆으로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중산간 안쪽을 누비다 보면 곳곳에 울창한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찬 숲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는 유명한 관광지가 된 숲들도 있지만(사려니숲이나 절물 자연휴양림 같은) 동네마다 느긋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을만한 오름 근처의 조그마한 숲들이 많다. 내가 사는 동네 송당에는 당오름을 중심으로 숲이 넓게 깔려있고 그 안으로 둘레길이 이어져 있는데, 동네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그 둘레길을 산책할 수 있다. 당오름 숲 안으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둘레길은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느낌을 주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보물 같은 산책로다. 산책을 할 때 가끔씩 꿩이나 산비둘기, 길냥이와 말들을 마주치곤 하는데 그런 순간엔 내가 만물의 영장 따위가 아닌 그들과 함께 숲 안에서 같이 살아가는 동등한 생명의 하나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 순간 숲 안에선 인간과 동물, 식물은 모두 하나의 자연이 된다.


송당의 당오름 둘레길


마을에서 조금만 더 벗어나면 조금 더 큰 숲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비자림’이다. 비자림은 말 그대로 비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오래된 비자나무가 많아 아름답고 성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요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특히나 비 온 뒤의 비자림은 그 향취가 풍성하고 빗물을 머금은 숲의 공기가 상쾌해 나도 가끔씩 찾곤 한다. 그리고 비자림에서 한라산 쪽으로 길게 뻗은 도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비자림로’다. 비자림로는 양 옆으로 삼나무가 촘촘히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래서 그 길을 지날 땐 숲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느낌이어서 나도 모르게 속도를 줄이게 되는 곳이다. 송당에서 시내에 나갈 땐 그 비자림로를 거쳐가게 되는데,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숲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두리번거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세상에, 시내 나가는 길이 이렇다니!’ 하며 뜬금없이 하늘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비자림로가 무참히 파헤쳐지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도대체 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그 아름다운 나무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그중 특히 사랑이 많고 용감한 사람들이 숲을 지키기 위해 나섰지만,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다. 나무의 밑동을 자르는 비명 같은 톱날의 회전 소리는 날카롭게 하늘을 갈랐고, 쓰러진 나무를 쓸어 담는 포클레인의 거대한 아가리는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드러냈다. 지금도 날카로운 톱날의 굉음과 거대한 탐욕의 아가리는 제주의 아름다운 숲을, 자연의 연약한 생명을 무심히도 짓밟고 있다. 오늘도 황폐해진 그 길을 통과해 집으로 들어선다. 이 폭력이 자행되는 걸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밤이다.


파헤쳐진 비자림로


- 환경매거진 '클리마투스 컬리지(CC)' 4호 (2019.9)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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