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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제혁 Mar 17. 2023

매화도(梅花圖)

매주 목요일은 나에게 있어 매우 바쁜 하루다. 아침 회진을 돈 후 9시부터 내시경을 바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입원 환자들이 많은 경우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허기짐을 참고 내시경실에서 준비하고 있을 환자들을 생각하면, 입원환자들이 밤사이에 별 문제가 없었는 지 확인하고 빠르게 외래로 내려가봐야 한다. 그날은 바로 그 바쁜 목요일이었다. 

2022년 7월 21일 목요일, 같이 근무하는 소화기내과 서과장님이 나를 찾아왔다. 어제 밤에 응급실당직이였고, 환자 한 명이 입원했는 데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런 경우 나는 마음 속으로 약간의 긴장을 한다. 무언가 특수 시술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환자는 무려 1달이나 변을 거의 못 보고 배가 아파서 응급실에 내원하였다. 긴장감 속에 복부 CT 를 보았고, 장폐색 (여러 요인에 의해 장이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막혀서 장의 내용물이 빠져나가지 못하여, 배변과 가스가 장내에 축적되어 장애를 일으키는 현상) 이 매우 심했으며 구불결장 (대장 중 하행결장에서 직장으로 이어지는 결장의 끝부분이 완전히 막혀 있는 상태로, 구불결장암에 의한 장폐색 소견이 의심되었다. 최근에 보았던 암으로 인한 장폐색 중에 가장 심한 상태였다. 환자의 증상 완화를 위해 우선 비위관(Levin tube)을 코로 삽입하여 가스를 빼내고 있었다. 최대한 시간을 내서 환자를 진찰하였고, 환자의 배는 장폐색으로 인해 매우 팽창되어 있었다. 환자에게 현재 상태를 설명하였고, 오후에 대장 스텐트(stent) 삽입술을 시도해보기로 하였다. 대장이 막혀 있을 경우 바로 수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첫째, 암 주변에 다량의 분변이 있어 수술 도중 감염 위험이 높고, 시야확보가 어려워 암의 완전 절제가 되지 않기도 한다. 둘째, 스텐트가 성공적으로 거치가 되면, 수술 전 장정결이 가능하여 인공항문(장루)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셋째, 스텐트 시술 후 대장내시경으로 대장을 전부 확인하면, 용종 제거 및 다른 부위에 암이 있을 시 한꺼번에 수술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대장암으로 인한 장폐색이 있을 경우 대장 스텐트 삽입술은 환자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수술 후 장루를 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매우 큰 차이다. 인공항문을 가지고 있으면 변 관리가 쉽지 않고 냄새가 나서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 어려움이 많다. 인턴 때 환자의 장루를 갈아준 적이 여러 번 있었는 데, 환자들은 매우 불편해하고 어떤 경우 창피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라, 장이 막혀 있으면 대장 스텐트를 삽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오후 3시 12분 시술이 시작되었다. 구불결장의 병변까지 도달하는 데는 3분이면 충분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부분의 환자들의 경우, 장이 막혔다고 하더라도, 약간이라도 막히지 않은 부위가 보이거나, 막힌 부위를 찾지 못하더라도 소량의 변이 나오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 시간이 비록 오래 걸리더라도 스텐트를 넣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우 드물게 장이 완전히 막혀 스텐트를 못 넣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공을 들이고, 시술을 도와주는 간호사와 함께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으나 시술이 잘 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시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장에 가스가 주입되어 환자가 힘들어한다. 의사 또한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도 하여 더욱 어려워진다. 또한, 천공의 가능성도 올라가게 되어 시술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환자에게 동의서를 받을 때 환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선생님. 저는 어머님만 있고, 다른 가족이 없습니다. 대장암 수술을 하더라도 장루를 차고 지내는 건 힘들 거 같아요.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환자가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시술이 안 될 거 같으면 무리하지 않고 중단하는 것이 좋은 의사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조금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장이 많이 막혀 있어 처음에는 어디로 truetome (스텐트 시술할 때 필요한 부속기구 중 하나로 스텐트 넣기 전에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준다.) 을 돌려야 할지 감이 안 왔지만, 자꾸 집중해서 보다보니 어느 쪽으로 돌리고, 어느 방향으로 위치시켜야 할지 느낌이 오고 있었다. 환자가 가스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며 많이 움직였고, 환자에게 진정 (가수면 상태를 말한다) 상태를 깨우는 약을 주고 말하였다. “환자분! 아까 말했지만 스텐트 시술을 하지 않으면 장루를 하셔야 해요. 조금만 더 도와주세요!” 

환자는 내 말을 들은 후에 다행히 움직임이 줄었고, truetome을 왼쪽으로 돌린 후 위로 올려 내강의 좁은 입구로 생각되는 부위에 유도선 (guidewire: 스텐트 삽입 전에 장내로 유도선을 넣어 스텐트를 삽입할 수 있게 한다.) 을 삽입하였고, 무려 1시간 가까이 삽입이 되지 않던 유도선이 가볍게 대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납복을 1시간 내내 입고 있어 땀에 절어 있던 나는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와!  통과했어요.” 

남은 시간 최대한 집중하여 금속 스텐트를 삽입하였고, 막혀 있는 장에서 다량의 변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시술을 종료하였다. 

다행히 시술은 합병증 없이 잘 끝났고, 추후 대장내시경을 다시 하여 안쪽 대장의 용종을 모두 제거한 후 외과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잘 되어 환자는 인공항문 없이 퇴원하였다. 수술 후 대장암 병기가 3기여서 환자는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2022년 11월 3일은 역시 바쁜 목요일이었다. 그날은 더 바빠 12시 30분에 시술이 끝나지 않고 1시 넘어서 시술이 끝났고, 진료실에는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진료실 책상에는 정성스럽게 싸여 있는 그림이 편지와 함께 놓여 있었다. 편지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과장님께서 스텐트 시술해주신 박** 입니다. 제 어려운 상황을 이해해주시고 새생명을 주신 부분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제 찾아왔다가 오늘 오전에 오면 뵙고 만날 수 있다 하여 왔으나, 환자분들로 바쁘셔서 뵙지 못하고 갑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그림 한 점 놓고 갑니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새봄을 가장 먼저 알린다는 사군자 中 하나인 “매화도(梅花圖)” 입니다. 선비의 지조와 관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뜻하신 바 만사형통하시고 가내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원드리며, 다시 한 번 제게 새 생명을 주신 부분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직접 뵙고 드리지 못한 부분 넓으신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고, 제 작은 마음의 선물을 받아주십시요.’

환자에게 무언가를 받기 위해 시술을 한 적 없고, 환자에게 무언가를 받으면 안 되기에 환자에게 전화를 하였다. 
 “잘 지내셨어요. 제가 환자분 오신 줄 모르고 지금 왔네요. 이런 큰 선물을 주시면 안 되는 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꼭 받아주세요. 저도 매화처럼 항암치료 잘 받고 다시 뵙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받아주시면 저도 항암치료 잘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환자가 이렇게 말하니 나도 더 할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 그림은 매일 보면서 더 열심히 진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사는, 특히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환자가 오면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다. 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이 환자분이 나의 의술로 인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박** 환자가 나에게 준 그림은 평생 진료실에 걸고 환자를 대할 때 그 분 마음을 생각하면서 진료를 하려고 한다. 

박** 환자분. 항암치료 잘 받고 쾌유하시길 기원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을 주었지만, 당신이 준 그림은 제가 의사 생활을 하는데 큰 버팀목이 될 거 같습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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