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결여된 일상, 그건 어쩌면 삶의 진심
일상은 어쩌면 도너츠일지 모른다. 구멍이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밀가루 덩어리의 고체 말이다. 구멍은 평소엔 알아 차리지도, 느끼지도, 드러나지도 않지만 어딘가 어긋나거나 뒤틀어지면, 모가 나거나 이가 빠지면 알아 차리고, 느끼고,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은 잘 나가는 샐러리맨에게도, 방안에서 뒹구는 프리타에게도 찾아온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일탈이나 탈선, 그리고 다시 찾은 자유나 방황이 이 순간을 가리키는 현실의 언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일탈도, 탈선도, 다시 찾은 자유도, 방황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다 구멍을 지닌 채 살아가고 그렇게 인생은 굴러간다. 이케마츠 소스케와 테라지마 시노부가 주연한 영화 '배신의 거리(裏切りの街)'를 보았다. 영화는 하는 일도 없이, 심지어 아르바이트도 가지 않는 청년 스가와라와 탄탄한 샐러리맨의 아내로 살아가지만 어딘가 허무함을 안고 사는 주부 하시모토의 이야기다. 둘은 인터넷 채팅에서 서로를 알게 되고 만남을 가지며 동거녀 몰래, 남편 몰래 연애 아닌 연애를 만들어 간다. 그러니까 인생의 구멍을 알아차린 순간의 이야기다. 껍데기만 보면 희망 없는 청춘과 권태기 중년의 일탈로 보이지만 나는 이 영화 안에서 구멍의 흔적을 보았다. 일상은 어쩌면 도너츠일지 모른다.
1년을 쉬었다. 정확히 그 정도 되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허전하고 허무하다. 어디 한 군데 이상 비어있는 느낌이 자주 든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퍼블리의 프로젝트를 하나 마쳤고 다른 하나는 하고 있으며, 부산 영화제에서 통역일을 하였다. 일본 문화원에선 리포트 일을 하고 있고 몇 달 전엔 처음 써본 소설로 응모도 해보았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전하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탓인가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생각해보면 회사에 다닐 때, 그러니까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던 때 나는 허전하지 않았던가. 일본에서, 하루 8시간 가량씩 일하기도 하며 살았던 때 나는 허전하지 않았던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예전에도 허전했고, 지금도 허전하며, 앞으로도 허전할 것 같다. 때로는, 누군가에겐, 구멍은 조금 더 자주 나타난다.
스가와라는 사실 복받은 인생일지 모른다. 동거하는 여자는 매일 그에게 2천 엔의 용돈을 주고, 일을 알아보라고 재촉도 하지 않는다. 복받은 인생으로 말할 거 같으면 하시모토 역시 만만치 않다. 그녀의 남편은 반듯한 회사의 고위직 간부이고 하코네 온천 여행을 미리 알아서 준비할 정도로 애처가다. 하지만 둘은, 스가와라와 하시모토는 구멍을 느낀다. 일상에 머무를 수 없음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둘에게서 어쩌면 삶의 진심일지 모를 무언가를 보았다. 스가와라는 친구에게 여자 친구의 생리가 왔다는 말을 들으면 안심을 한다고 말한다. 여자 친구는 스가와라에게 집에서 빈둥빈둥 거리는 모습을 보면 안심을 한다고 말한다. 두 개의 안심, 하지만 다른 안심. 스가와라는 여자 친구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 같아 안심을 하고, 여자 친구는 스가와라가 떠나지 않을 것 같아 안심을 한다. 하지만 둘은 사실 같은 안심이다. 모두 진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심이 결여된 일상, 그건 어쩌면 삶의 진심일지 모른다.
영화는 스가와라와 하시모토를 교차로 보여주며 삶의 단편을 채워간다. 가령 스기와라가 진심 없이 자신의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하는 장면이 하시모토가 아무런 감정 없이 남편과 섹스를 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식이다. 하지만 두 섹스는, 어긋난 두 섹스 장면은 장외에서 연결된다. 갈 곳을 잘못 찾은 진심은 정처없이 맴돌다 거리에 나오고 두 진심은 서로에게 서툴게 기대어 간다. 하지만 영화는 사실 구멍을 느끼며 사는 이는 하시모토와 스가와라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시모토의 남편도, 스가와라의 여자친구도 각각 서로 다른 상대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허무와 허전함, 고독과 이유없는 상실의 확장이다. 그래서 남의 얘기같지가 않았다. 지난 1년간 나는 구멍 속에서 살았음을 알았다. 하시모토의 남편은 스가와라에게 외도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며 내연녀에게도, 하시모토에게도 다 진심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심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더한다. 진심은 하나 뿐이 아니라는 이야기. 그러한 진실. 영화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스가와라와 하시모토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남겨진 구멍은 매어지지 않은 채 거리에 떠돌고 있다. 누군가의 진심을 배신하며, 누군가의 진심 바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