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Jun 16. 2018

지금 일본이 파랗게 물들고 있다

가족이 결혼의 결과는 아니고, 혈연보다 진한 건 관계의 결이다.


하나 더 얹은 숟가락으로 완성되는 가족이 있다. 서로의 결핍이 맞물려 만들어지는 지붕도 있다. 한 지붕 한 가족이란 말은 옛말이 되었고 애초 가족이란 말은 혈연 위에 쓰여지지 않았다. 최근 일본에서 방영됐고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올해 초 TBS에서 방영된 '사토네 아침, 스즈키네 저녁(佐藤家の朝食、鈴木家の夕食)'에선 두 아빠를 가진 딸과 두 엄마를 가진 아들이 서로 마주보며 살고있고, 타가노 겐고로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남동생의 남편(弟の夫)'은 세상을 떠난 동생의 자리를 캐나다에서 건너 온 동생의 남편이 채운다. 심지어 '이웃집은 파랗게 보인다(隣の家は青く見える)'라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후지 테레비의 드라마는 난임 부부와 배 다른 엄마를 가진 아들, 게이 커플과 과한 모성으로 뒤틀린 모녀를 한 지붕 아래 두었고, 타나카 케이가 주연한 '아재의 러브(おっさんずラブ)'는 사랑을 알아가는 한 남자의 시간으로 비로소 하나의 가정을 완성한다. 혈연도, 나이도, 성별도 무게를 덜어낸 이 가정에 차이는 그저 차이일 뿐 그 외에 아무런 의미도 걎지 못하며, 우리가 앓고있는 수많은 아픔과 고민은 사실 가족이란 허구의 관념에서 비롯된 상처임이 드러난다. 가족을 혈연에서 그저 삶의 자리로 돌려놓은 시간이 흐르는 일본에, 지붕이 파랗게 물들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겐 엄마를, 딸을, 아빠를, 아들을 그저 한 사람의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일본의 드라마 작가 사카모토 유지가 그려내는 건 엄마와 딸 이기 이전 한 사람인 여자의 시간이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에서 느껴지는 애잔한 따뜻함은 혈연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쌓인 시간의 온도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뤄지는 가족에서 실종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시간을 일본은 정성껏 어루만진다. 이는 어쩌면 관계를 얘기하는 이야기에서 가장 정석의 길이고, 그렇게 일본은 파랗게 물들고 있다. '이웃집은 파랗게 보인다'의 마지막 회. 드라마는 '본말전도'란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한 지붕 아래 네 가족의 이야기를 매듭 지으며 그간의 소동과 눈물이, 복잡하게 엉켜있던 시간이 실은 간과된 각자의 삶에서 기인한 게 아니냐고 얘기한다. 꼬이기 이전의 시간, 그저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일상, 그렇게 간단한 일. 남편의 외도, 같은 남자를 향한 마음, 자꾸만 실패하는 임신에 흘리는 눈물, 국적과 성별을 뛰어넘어 맺어진 사랑, 동생의 정자로 낳은 아들, 외면받은 길러준 정,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아픔과 시련. 이렇게 울퉁불퉁하고 격하게 요동치는 나날의 깊은 바닥은 어쩌면 그저 고요하고 잔잔한 물결의 아른거림일지 모른다.


기무라 이헤이 상을 수상한 일본의 사진가 모리 에이키는 'Family Re-gained'란 이름의 전시를 하며 하나의 퍼포먼스를 했다. 빨간 옷을 입은 게이 커플과 남자 어린이가 비 오는 날 거리를 그저 걷는 이 퍼포먼스는 일견 지극히 전형적인 가족의 나들이로 보이지만 가족 구성원간의 나들이란 점을 제외하면 모든 게 전형에서 벗어나있다. 모두 남자로 구성된 가족, 치마를 입은 게이 커플, 빨강이란 전복의 컬러. 하지만 왜인지 자연스레 가족으로 보이는 그들. 어떤 과격한 주장 하나 없이 이들은 우리의 사고를 뒤집어 놓는다. 가족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가족을 재고하는 것, 차별의 철폐를 외치는 게 아니라 관계의 시간을 사유하는 것, 원망과 비판의 자리에 배려와 존중의 자세를 가져다 놓는 것. 모리 에이키는 'Family Re-gained'에서 서로 다른 마흔 개의 가족과 함께 어울려 사진을 찍었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고, 이혼했기에 알게되는 혼자의 시간이 있으며, 엄마의 자리를 내려놓은 여자의 시간도 있다. 애초에 우리는 모두 타인이고, 가족은 혈연이 아닌 그저 자신과 닮은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럴 수 있음'의 관대함이기 이전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차하는 시간이다.

5% 안팎의 시청률로 막을 내렸지만 아사히 테레비의 '아재의 러브'는 SNS를 중심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목부터 비범한 '아재의 러브'는 연애 경험 한 번 없는 남자 하루타가 직장 상사 쿠로사와의 사랑에 부닥히며 겪게되는 좌충우돌 그 자체의 이야기다. 소꿉친구 치즈와의 관계에서 뒤늦게 사랑의 감정을 알아채는 진부한 줄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재의 러브'는 '사랑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새삼 직구로 던진다. 무엇보다 하루타는 엄마가 집을 떠나갈 정도로 칠칠치 못한 아들이고, 어디까지가 우정이고 어디부터가 사랑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어떻게 보면 바보, 어떻게 보면 순수한 남자이며, 그래서 어떤 상황과 마주해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에게 동성에 대한 경계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바보니까 그만큼 자유롭고, 같은 의미에서 연상의 남자 쿠로사와의 고백에도 오롯이 마음만으로 대답한다. 함께 산다는 게 사랑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시간을 지나 하루타는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바라보고 전하는 시간 속으로 성장한다. 가족의 무게도, 혈연의 흔적도 희미한 그의 마음은 어쩌면 가족 이전의 우리일지 모른다. 


1인 가족이 늘고있다. 이제는 미혼이 아닌 비혼을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고 관계를 마주하는 감수성의 문제다. '싫어하는 것을 지우며 살다보면 어느새 좁아진 새장에 갇히고 만다'는 '이웃집은 파랗게 보인다' 속 주인공 타이키의 엄마 사토코의 말처럼 그렇게 남겨지는 건 외로움 곁 자신 혼자 뿐이다. 직장 남자 부하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편 탓에 이혼을 하게 된 '아재의 러브'의 아내 쵸코는 남편의 사랑을 위해 전략까지 세우며 도와주고, 같은 드라마 주인공 하루타와의 사랑에 실패한 소꿉친구 치즈와 동성의 같은 직장 동료 마키는 같은 벤치에 앉아 끝나버린 사랑의 분함을 이야기한다. 실패와 성공의 여부를 떠나 그저 쏟아부은 마음 만큼의 가치가 존중되는 시간, 일본은 그 사라져가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서로 정반대의 고민을 부딪히며 고민의 무게를 벗어내고('이웃집은 파랗게 보인다'), 역시 정반대의 가정을 대비시키며 집이란 공간에서 가족의 무게를 덜어내며('당신에겐 돌아갈 집이 있다'), 아주 사소한 해프닝으로 어울려 살게 된 남녀 두 쌍을 아무렇지 않게 한 테이블에 앉히며 가족을 그저 또 하나의 관계로 데려다 놓는('아오바네 테이블青葉家のテーブル') 일본. 가족이 결혼의 결과는 아니고, 혈연보다 진한 건 관계의 결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 하나의 고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