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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ul 26. 2018

그들이 훔친 건 연(絆)이었다

어디에도 없는 가족, 어느 가족 万引き家族



'가족은 누군가 보지 않으면 버리고 싶은 존재다'라고 키타노 타케시가 말했다. 20년도 넘게 지났으니 꽤나 해묵은 얘기다. 그 말을 옮기는 것조차 왜인지 민망해진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가족은 흔들림 속에 있다. 시부야 구가 동성 파트너십 조례를 가결한 지 3년이 흘렀고, TV와 스크린에선 보이지 않았던 가족, 가족 밖의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 다수 이어지고 있다. 여자의 존재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개인의 자리를 확장하는 사카모토 유지, 누군가의 상실 이후 드러나는 빛바랜 시간 속에 사람을 응시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을 지금 다시 예기하는 건 아니다. 사랑을 성찰하는 시간 속에 그들의 작품은 매번 진동하고 매번 확장한다. 하지만 10년 넘게 느슨한 영화를 만들어 오던 오기가미 나오코가 새로운 가족을 엮어내며('그들이 진심을 엮을 때') 컴백을 했고, 최근 TV를 채우는 건 차이로 빚어진 조금 다른 색의 지붕들이다. '남동생의 남편', '이웃집은 파랗게 보인다', '사토네 아침, 스즈키네 저녁', '아재의 러브', 그리고 이제 막 방영을 시작한 '새엄마와 딸의 블루스'까지. 차이 곁에 차이를 두고, 결혼과 사랑을 한 발짝 떼어내며 일본은 가족이란 이름에 조금 다른 색을 더하려 한다. '다양한 사람이 있는 게 자연이니까, 그 쪽이 낫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말처럼 서로 다른 누군가와 누군가의 지붕이 지금 일본을 물들이고 있다. 기타노 타케시는 2008년 '버리지 못해서(捨てきれなくて)란 곡을 발표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끝나지 않은 오즈 야스지로의 시간을 느낀다. 그의 영화를 채우는 건 어긋난 시간, 보이지 않는 상처, 후회로 상기되는 어제이고, 따뜻함으로 얘기되는 고레에다 영화 특유의 온화한 온도는 어찌하지 못하는 애절함의 온도다. 2017년, 지난 해 발표된 전작 '세 번재 살인'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세 겹의 스릴러로 진행되는 이 영화 역시 뒤틀린 가족의 시간을 맴돌았다. 올해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의 신작 '어느 가족'은 '만비끼'를 일삼는 가족의 이야기다. 가족이라곤 하지만 엄마 아빠의 관게를 제외하곤 누가 누구의 할머니고, 나이 차가 꽤나 있어 보이는 남매의 엄마, 아빠는 도대체 누구인지 애매하고 불분명하다. 심지어 영화를 시작하는 건 아빠로 보이는 남자와 아들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함께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어느 가족'은 처음부터 위험한 시간 위에 있다. 한국으로 건너오며 '어느 가족'이란 다소 두루뭉실하고 아련한 제목이 되어버렸지만 이 영화의 원제는 '만비끼 가족(万引き家族)'이고, 좀도둑이 현실에 자리하는 것처럼 이들의 처지는 위태롭다. '만비끼 가족'이 결코 '어느 가족'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어쩌면 지금 일본의 가족은 동성애와 이성애의 담론을 넘었는지 모른다. 엄마와 아빠에 대한 물음, 혈연이란 믿음에 대한 의심, 모성을 엄마의 품에서 떼어내려는 노력, 그렇게 바라보는 혼자라는 이름의 자리. 버리고 싶지만 버리지 못했던 20년이 흐르고, 오기와 혈기로 뱉어낸 기타노 타케시의 말은 지금 여기에 아픔으로 흐른다.



아빠에 대한 물음에서 엄마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떤 가족'에서 어디에도 없는 가족을 바라본다. 도심에 가리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우리는 모두 함께이지만 함께가 아니고, 어쩌면 가족이거나 아니면 아니다. 하츠에(키키 키린)와 사야카(마츠오카 마유)는 일견 절친한 할머니와 손녀 사이로 보이지만 하츠에는 사야카의 친부모에게 몰래 돈을 받고 있고, 정작 중요한 순간 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문을 잠그고 만다. 피로 이어지지 않은 이들을 맺어주는 건 매일 저녁 둘러 앉아 함께 먹는 식사 한 끼, 자신의 상처를 포갤 수 있는 누군가의 상처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이들은 그저 폭죽음과 잔향으로 하나비를 즐긴다. 그만큼 애달프고 애절한 밤이다. '어느 가족'이 전작들과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군가의 상실이 아닌 누군가가 더해준 시간으로 영화가 흘러간다는 것이다. 도둑질로 아낀 돈으로 고로케를 사먹으며 집으로 가던 길,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쇼타(죠 카이리)는 추위에 떨고있는 여자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다. 고레에다 영화가 조금 다른 결의 시간 위에 안착하는 순간이고, '사라짐 이후 드러난 상처'에서 '더해진 상처로 인해 드러나는 시간'으로 전환하는 시간이다. 아마도 학대를 받는 듯한 유리(사사키 미유)는 시바타 집에 들어와 린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고, 할머니가 기워준 옷으로 갈아입는다. 상처(傷)와 상처(傷)의 만남, 상처에 더해진 상처. 키즈(傷)와 키즈나(絆)의 거리. 아픔은 인연이 된다. 아키는 사야카로, 유리는 린으로 이미 충분히 행복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지워지지 않은 그들의 이름이 어김없이 그들 곁에 남아있다.



20여 년 전 기타노 타케시의 말이 틀리 건 아니지만 그의 말속엔 일종의 체념과 포기가 담겨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감정, 내일로 이어지지 못하는 시간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그 애절함의 시간을 산다.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는 길을 그의 영화는 부단히 이어간다. 낳은 정과 기른 정, 혈연의 무게를 뒤로 하고 그래도 이어지는 길을 바라본다. 어찌할 수 없이 보고 싶은 친 아들에 대한 마음을 고레에다는 숨기지 않는다('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애써 쌓아올린 상처의 시간이 무참히 무너지는 '어느 가족'의 심문 장면에서도 고레에다는 그저 말 없이 메마른 눈물을 닦이내는 노부요(안도 사쿠라)의 얼굴 만을 바라본다. 인연이 되었던 시간은 다시 상처가 되고, 그렇게 연약한 시간만이 흐르는 꽉 막힌 작은 방 안에서 안도 사쿠라는 어쩌면 가족 이전, 하지만 어찌할 수 없이 여기에 머물러야 하는 우리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어느 가족'의 실패도, 혈연과 낳은 정에 대한 순응도 아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부서질 듯 가녀린 개인의 시간을 끌어낸다. 좋아하면 때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하는 거'라며 린을 꼭 껴안고, 라무네(ラムネ)의 구슬이 '우주처럼 보인다'는 린이 집에 돌아가 수많은 구슬을 줍는 모습을 보여주며, 가족 이후에 남겨진 것들을 바라본다. 다시 흩어져버린 해변의 모래들이 남긴 자국처럼, 린이 손에 움켜쥔 수 많은 우주처럼, 혼자가 된 시간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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