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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24. 2020

텅 비어있는 자리의 은총으로

그 하늘은 왜인지 이곳에 있다


세상의 질문되지 않는 물음들을 바라본다. 태초에 어떤 오랜 약속이라도 오고간 듯 답하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들을 돌아본다. 프랑소와 오종의 '신의 이름으로'와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레이스가 주연, 지난 칸느에서 뜨거웠던 '두 교황'은 왜인지 비슷하게 개봉했고, 고작 스크린을 마주하고 묻지 못한 질문들을 마주한다. 어릴 적 학교에 입학하듯 성당에 다니기 시작해 베드로란 세례명을 얻었고, 중학교 무렵 정해진 의례처럼 거행되는 경진성사라는 걸 문턱에 두고 돌아선 뒤 그 시간은 중단이 되어버렸지만, 성당에 다니는 걸,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걸, 설명할 법이 내겐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신의 이름으로'  무화되어 버리는 것들. 용서와 참회로 지워지는 기억들. 그렇게 질문의 의미를 잃는 현실의 고작 이것과 저것이지만, 고달픈 현실이 마주한 종교 어느 문턱의 하늘은 사실 보이지 않는 균열을 숨기고 있는지 모른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두 교황'은 위엄이 깃든 시마르와 어꺠에 걸친 파샤르, 커다란 십자가를 손에 든 남자 너머 리옹 시가지의 모습을 비추고, 종교는 아마 그 어딘가의 높이, 하늘 가까운 곳에 자리하는 무언의 세계다. 성당 자리에 앉아 올려다보는 십자가, 그건 고작 2, 3미터 정도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보다 높은 어디, 숫자로 세워볼 수 없는 어느 곳의 하늘이 왜인지 이곳에 있는 것만 같다.

프랑소와 오종의 '신의 이름으로'는 가장 오종답지 않고, 가장 과격한 작품이다 .어릴 적 성당 캠프에서 신부에게 지속적인 성추행, 폭행, 괴롭힘을 당한 소년은 아이 다섯을 가진 평범한 중산층의 남자, 알렉산드로(멜빌 푸포)로 등장하고, 그만큼의 세월, 세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교구 내 성직자, 추기경의 성추행, 이런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덜어내보면 ,아동을 상대로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건, 근래 이곳을 설명하는 가장 주요한 상처의 서사이다. 그리고 '성'이란 게 무언지, 피해자는 좀처럼 피해자이지 못한다. 수치심, 가족을 비롯 주변 사람들이 아파할 시간들, 그런 어김없이 현실의 이런저런 굴레는 상처난 '성'의 자리를 돌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침묵'의 시간은, 참 얄궂게도 참회와 용서를 이야기하는 성경 구절, 아무도 마련해주지 않은 자리에 앉아 별 무리 없이 몇 십년을 버틴다. 오종의 '신의 은총으로'는 기도문 말미에 등장하는 '아멘'을 말하기 이전 신에 의지하는 한 마디이고, 영화는 이 말에 감쳐진 위선, 용서와 참회, 믿음으로 시종일관 묵묵부답했던 가해의 오랜 역사를 드러낸다. 사실 성서책만 들춰봐도 모순으로 점철된 자명한 사실들. 하지만 멀고도 가까운, 그곳엔 이곳을 바라보지 않는 너머의 세계가 있다. '신의 은총으로', 그 말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책임의 도돌이표일지 모른다.

'신의 은총으로'도, '두 교황'도 이전의 종교를 다룬 작품들과 대비되는 건 수평을 오가는 시선과 앵글의 반격이다. 종교의 위엄함, 고귀한 곳을 바라보는 성스러운 장면은 와인이 아닌 환타로 저녁을 먹고, 애플 워치의 인공지능 기능에 일어나 몇 걸음을 걷고, 어김없이 이곳에 흘러가는 종교의 현실은 사실 별반 다르지 않아 새롭게 진동한다. 교황이라는, 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하는, 신,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의 그 이름에, 보통 명사에나 붙는 숫자를 붙여 놓으면서, 영화는 이곳에 작동하는 종교를 생각한다. 하늘 너머 먼곳에 자리하지 않는 한, 땅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에 흘러가는 한, 종교가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 종교는  무엇보다 무력하다. 믿음과 참회, '신의 은총이란' 말들은 구약을 건너 머나먼, 의미없는 시절의 짧은 외마디일 뿐이다. 소위 말해 시대착오적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소 재미없게 피해자를 쫓아가던 오종의 영화가 마주하는 건, 끊임없이 부정하고 현실을 직시히고, 싸움과 단결로 문제를 해결하며 마주하는 건, 텅 비어버린 자리, '아직도 신을 믿으세요'란 또 한 번의 무력한 질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곳에 가장 성스러운 장면이 태어난다. 부부간의 시간이 줄어들어 힘겹고, 다시 들춰낸 아픔에 여자 친구는 떠나가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돌아온 집엔 괴물같은 외로움이 덩그러니 남아있고. '두 교황'은 또 한 번의 새로운 교황의 선출을 알리고, '신의 은총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느 싸움 문턱에서 멈춰버리지만, 어쩌면 남아있는 건 하나, 알 수 없지만 자명한, 믿음으로 완전한 너머의 그곳일지 모른다. 오래 전 홀로 찾았던 파리에선, 노트르담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굵은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그런 것. 영화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어쩌면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지 모르지만, 실패하고, 무너지고, 좌절하고, 그곳에 남아있는 무언가를 바라본다. 누군가 그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그저 내가 믿는 무엇이라 조용히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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