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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13. 2020

영화적 우연을 걷다

김종관의 '조제'를 기다리며, 그와의 짧은 대화



단편 영화란 이름으로 한 걸음. 북촌과 서촌, 남산의 언덕길을 걸어 또 한 걸음의 단편 영화. 김종관의 영화엔 시간의 품을 들여다보는 산책의 느림이 있다. 그를 널리 알린 ‘폴라로이드 작동법’, 단 6분 남짓의 작은 영화를 비롯 수 십편의 단편 영화엔 삶의 작은 순간을 담아내는 깊이가 매번 생생했다. 영화를 시작하고 시간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가 남긴 소위 장편 영화는 네 편 남짓이다. 말 그대로 러닝 타임의 장단을 의미하는 구분일 뿐이지만, 테이블 하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더 테이블’, 지난 전주 영화제에서 공개된, 한 남자가 만난 여러 명의 사람들과의 대화로 구성되었다는 ‘아무도 없는 곳’, 그 두 편의 장편을 떠올리면, 그에게 ‘단편 영화’는 세상을 담아내는 단위, 혹은 기호가 되어 자리한다. 지금 그곳엔 오래 전 국내에 개봉됐던 이누도 잇신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다시 태어나고, 공교롭게 그 영화가 만들어진 건 ‘폴라로이드 작동법’이 완성되던 2004년, 그 무렵이다. 화제는 되었어도 이누도 잇신 영화가 불러들인 국내 관객수는 고작 7만 여 명. 그런 작은, 하지만 그 이상의 울림이 김종관의 영화와 닮아있다 생각했다. 이미 흘러간 시간를 바라보는 꿈 속의 밤과 같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찰나의 이상한 멜랑꼴리같은, 그런 마법의 순간이 그의 영화에 진하게 묻어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영화의 원작이 되었던 타나베 세이코의 동명 소설은 1984년 작품이고, 10년, 20년 남짓을 단위로 찾아오는 시간의 우연이 조금 운명처럼 느껴졌다.



Q 지난 1월 촬영을 끝마쳤다고 들었다. 원작을 가진 첫 작품, 리메이크도 처음인데 어떤 촬영이었나.

A 4개월 정도 촬영을 했어요. 50회차 정도 찍었고, 이전에 독립 장편 네 개를 했는데, 그 넷을 다 합쳐도 이번 ‘조제’보다 차수가 적더라고요.(웃음) ‘조제’가 중저예산 작품이기는 해도, 지금가지 했던 영화들을 다 더한 회차들보다 많으니까, 그만큼 여유가 있었어요. 작은 독립 영화라 해도, 처음 시작하는 작품이라면 회차가 많아질 수 있거든요. 아무래도 독립 영화 작업이란 게 상업 영화에 비해 개런티를 많이 주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그래서 항상 적은 회차와의 싸움이에요. 그래서 머리를 써서, 공간을 제한하거나, 적은 회차로 한 편의 영화가 마무리될 수 있는 궁리를 해요. 


Q 아마도 상업영화로는 처음인 것 같다. 어떤 차이들이 있었나. 

A 하나의 아이디어로 재미있게, 임팩트 있게 만들어가는 영화도 있어요. 하지만 영화 작업이란 게 결국 디테일을 만들어, 세부적인 것들을 쌓아 올리는 거잖아요. 제 영화 공정도 작은 이야기를 통해 만드는 쪽이고, 그런 걸 독립 영화에서 할 때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공간을 줄이고, 연출자 스스로 준비가 많이 되어 있어야 해요. 쓸데없는 장면은 최대한 찍지 않고, 테이크도 많이 가지 않고, 정해진 한도 내에서 해야하는 압박같은 게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점에서 제가 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졌다는 느낌. 납 주머니 달고 뛰다 떼고 뛰는 것 같단 느낌이 있었어요.(웃음)


Q 원작이 많은 팬을 가진 작품이다. 제안을 받은 기획인가.

A 기획은 제가 했어요. 원작을 워낙 좋아했고, 영화가 가진 것 안에 제가 하고 싶은 게 많이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좋은 멜로의 틀을 갖고있고, 그 안에서 관계를 다루는 섬세함이 있잖아요. 메시지도 분명하고, 정서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드러나는 선한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랄지, 아이러니한 것들. 휴머니즘이 많은 스토리라인이고, 제가 이전에 시도하고, 하려했던 영화들도 대부분 그런 작품들이었어요. 



Q 이미 10년이 지난 작품이고, 리메이크 제작까지 과정은 어떠했나.

A ‘최악의 하루’ 일로 일본에 갔을 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프로듀싱한 분을 만났어요. 그분과 일본과 한국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일본에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제외하면 오리지널이 많이 없어지고 있고, 우리가 2000년 초반 좋아했던 영화들은 점점 만들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한국은 어떠냐고 이야기하면서, 한국에서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다면 어떻겠냐, 어떤 영화를 좋아했냐고 했어요. ‘조제’이야기를 했더니, 리메이크할 맘이 있냐고 그래서, 너무 좋은 영화라 누구라도 선뜻 나서지는 않을 거라고, 저도 그 영화는 그대로 놔두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어요 ‘러브 레터’ 이야기도 했는데, 그 분이 짖굳게도 둘 중에 고른다면 어던 걸 리메이크하겠냐고 물었고, 고른다면 ‘조제’라고 이야기했어요. ‘조제’엔 제가 다르게 갈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거든요. 리얼리티한 멜로인데, 한국의 리얼리티와 일본의 리얼리티가 다르고,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청춘도 다르니까요. 그래도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영화라 욕 먹기 좋은 프로젝트라 얘기했죠.


Q 그런데 영화의 촬영을 마치고, 이제 후반 작업을 남겨두고 있다.

A 한국에 돌아왔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문득 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이전에 제가 독립 영화로 ‘조제’와 비슷한 질감의 영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걸 상업 영화까지 끌고가는 게 힘들었어요. ‘조제’는 원래 하고 싶은 내용의 이야기이고, 그 정수를 고스란히 가지고 오면서 나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건 어떤 게 있을까 해보자고 생각했죠.


Q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2004년 국내 개봉했고, 김종관 초기 대표작인 ‘폴라로이드 작동법’ 역시 2004년 작품이다. 별 거 아닌 우연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만났다는 느낌이 든다.

A 우연이라기엔 용기가 많이 필요했죠. 처음 이누도 잇신 감독 영화 봤을 때, 나도 열심히 영화 만들어 이런 영화를 한 번 만들어봐야 할텐데라고 생각했어요. 이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고요. 이전에 시나리오 썼던 것도 비슷한 정서감의 영화였는데, 잘 안되고, 안되고, 그러다 결국 리메이크 형태로 이야기를 하게됐단 생각이에요. 리메이크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길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부담을 안고 가는 거니까요. 



Q 하나의 임팩트로 끌고가는 영화가 아닌, 작은 순간들을 쌓아가는 영화라는 점에서 상업 영화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 듯한 느낌도 든다. 원작이 화제가 되었다고는 해도 관객수는 7만 정도였고, 작아서, 행간이 넓어서, 오래 들여다봐야 하는 이야기라서 필요했던 시간이랄까.

A 어느 순간부터 장편의 플롯이 힘들다는 생각은 없어졌어요. 독립 영화들은 어찌됐든 별 다른 제약 없이 만들잖아요. 단편도 그렇게 했고, ‘최악의 하루도’ 그랬고. 다만, 제가 하려는 영화가 몇 십 억의 돈을 들일 만한 한 가치가 있는가. 그 중간의 무언가를 만나는 게 힘들었어요. ‘최악의 하루’도 그 전에 준비하던 게 3년, 4년 끌다 안돼서 했던 작품이고요.


Q 그래서 제목이...(쓴웃음)

A 뭐, 그건 하룻동안 벌어지는 일이니까. 여러 보편성이랄까요? 제가 가진 것 중 어느 면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보편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아직 검증된 게 아니라, 그걸 조금씩 풀어가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안이 왔을 때 저랑 닮지 않은 걸 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무언가를 하기까지, 그 과정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Q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모두 세 번 보았는데, 이 영화는 결국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의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감정을 잃어버린, 하나의 시절을 상실한 사람의 이야기란 점이 김종관 영화와 포개지는 느낌이 있었다. 원작의 어떤 부분을 가장 가져오고 싶다고 느꼈나.

A 제가 받아들인 게 의도와 맞다면, 사람이 살아가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20대의 시기, 그 시간을 눈 뜨고 어떻게 겪어나가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보았어요. 기본적으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연애 이야기지만, 결국 멜로 영화는 타인을 이해하는 여정에서 자신을 여행하는 과정의 이야기라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 남자 주인공은 인간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라 생각했고, 여자 캐릭터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경멸하는 사람이 타인을 만나 변화하고 끝에 이르러선 본인을 더욱 좋아하게 되는 이야기라 보았어요. 원작과는 다른 플로우를 타고 흐르면서 결과적으로 같은 감정,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Q 한지민 씨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남주혁 씨가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를 연기한다. 정유미, 한예리 씨 등 기존의 배우들과 달리 모두 처음이다.

A 그들도 언젠가는 처음이었니까요.(웃음) 공을 들인 캐스팅이에요. 원작은 20대 초중반 남녀의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30대 중반 여자의 이야기이고, 그런 점에서 원작과 다른 결들이 생겨나더라고요. 좀 더 고독하고, 고립된 사람이란 생각을 했고, 6, 70년대 클래식 멜로,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이나, ‘추억’같은 걸 해보고 싶었어요. 연령대가 달라지면서 새로운 생명력이 있지 않을까 싶었고, 두 배우 모두 기대보다 훨씬 좋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잘 소화해줬어요. 


Q 기존의 영화들이 대부분 서울의 강북, 서촌과 남산 주변을 담았다면, 저번 메일에 지방에서 촬영중이라고 했다. 몇 편의 에세이, 그리고 ‘골목 바이 골목’이란 책에서 드러나듯, 김종관 영화에 공간은 지역성이라기보다 시간 혹은 계절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A 제 영화에 나오는 공간은 죄다 쓸쓸한 곳들이에요. 이번에는 더 그랬고, 거리도 낡은 거리에, 낡은 식당에, 고물상, 버려진 물건만 모이는 곳, 무언가 그림자를 훨씬 많이 보는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빛이 드는 곳이라기보다, 음영이 있는 공간들을 많이 찾아왔던 것 같고, 그러면서 보고 느끼는 게 많았어요. 실제 있는 공간이지만,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느낌, 무언가가 놓여있던 자리. 그런 부분이 저에게 전해주는 게 있었고, 다음 작업을 하면서 변화를 주기도 하고, 내가 그 안에서 다른 걸 찾을 수 있을지, 관찰을 많이 히는 것 같아요.


A 원작에선 쿠루리의 음악이 영화의 정서를 많든 부분도 크다고 느낀다. 

Q 나래 음악 감독과 같이 작업해요. ‘페르소나’, ‘더 테이블’, 그리고 ‘하코다테에서 안녕’, ‘메모리즈’도 같이 했고. 저는 6, 70년대 향수가 있는 클래식한 멜로를 하고 싶어서, 음악적으로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 하고 같이 고민해요. 요즘 복고나 레트로가 아닌, 클래식한 영화엔 음악의 힘이 있잖아요. 그런 걸 가져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무래도 대중 영화니까 어려운 화법은 쓰지 않겠지만요. 


Q 방금 이야기했든, 대중 영화, 김종관 영화 중에선 아마 가장 상업 영화인데, 타협이라 느겼던 건 없나.

아직은 모르겠어요. 이걸 좀 더 준비했다면, 좀 더 여력이 있어 고민을 했다면, 그런 것들은 있는데, 프로덕션 과정에서 타협점은 없었다 생각해요. 이런 진행 방향이 있고 그에 대해 누군가 걱정을 한다면, 그 안에서 제가 즐길 수 있는, 어떤 부분으로 진행한 것은 있지만, 어쨌든 보편성을 지녀야 하잖아요. 이 정도 예산이 들었다면 그 이상의 관객은 봐줘야 하는 거고, 그건 제가 노력을 해야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고민들은 있었지만 그게 타협같지는 않아요. 굉장히 좋게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Q 개봉작으로 보면 ‘더 테이블’ 이후 2년이지만, 삼성전자와 ‘메모리즈’, 윤종신의 미스틱 스토리와 ‘페르소나’ 중 ‘밤을 걷다’, 여행 잡지와는 ‘하코다테에서 안녕’, 단편 작업도 했다.

A 예전의 제 단편은 카메라 하나만 갖고 찍은 것도 많아요. 10만원, 20만원 예산에 하루 이틀에 촬영한 것들. 그러면서 영화적 언어도 배우고, 영상적인 것들도 깨치고 알아가는 과정이었어요. 대부분 보면 딱 두 사람만 나오고, 그 안에 흘러가는 이야기는 무수히 변형 가능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통해 나름의 무언가가 생긴 것 같아요. 취향이랄지, 해보고 싶은 것들. 그런 걸 계속 이어간 게 ‘페르소나’였고, ‘아무도 없는 곳’은 그런 점에서 영화적 성취가 가장 컸다고 느껴요. 


Q 보통 단편 영화는 장편보다 짧은, 3, 40분까지의 영화를 이야기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김종관의 영화들을 만드는 하나의 영화적 언어라는 느낌이 든다. 갖춰진 줄거리의 영화라기보다, 장면 하나하나가 농밀한 내면을 드러내며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하는 영화랄까. 그런 점에서 ‘조제’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A ‘조제’도 제가 진행하는 어떤 과정 중 일부에요. 상업 영화기 때문에 좀 더 많은 관객에게 보일 거란 기대같은 건 있지만, 저한테 아주 큰 포지션의 터닝 포인트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외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페르소나’나 ‘하코다테에서 안녕’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변화를 가져가는 지점이고, 이번 영화를 했다고 제가 작은 작업을 하지 않을 건 아니기 때문에, 연출자로서 긴장은 있어도 크게 달리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다만, 이번 영화는 곳곳의 소도시를 많이 돌았고, 제가 살던 동네, 오래 전의 저, 제 자신을 많이 들여다본 작업이었다고 느껴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츠네오는 이별 후 담담하게 흘러가는 오후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물고기 헤엄치는 러브호텔, 조개껍질 베드, 멜랑꼴리한 네온 빛이 세상의 전부일 것 같던 시절이 끝이나고, 영화엔 쿠루리의 적적한 멜로디가 쓸쓸히 흘러간다. 김종관의 ‘페르소나’ 중 ‘밤을 걷다’엔 끝나버린 시절의 남아있는 것들이 아른거리고, 떠나갔지만 떠나가지 않은 것, 밤을 방문한 듯한 꿈의 한 폭이 어둠 속 몽연한 세계를 산책한다. 현실은 어둠처럼 비어있지만, 영화는 남아있는 것들을 바라본다. 김종관 감독의 책, ‘사라지고 있습니까(2010)’와 ‘나는 당신과 가까이에 있습니다(2019)’의 10년과 같이. 밤이 되어서야, 이제서야 보이는 것들. 김종관의 영화는 지금, 영화적 우연을 걷고있다. 

https://youtu.be/H0jXfEx0hq4


•'SINGLES' 2020.03월호로 진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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