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영화는 어떻게 ‘현실’과 만나고 또 헤어지는가
코로나란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가 등장하고 3년. 어쩌면 가장 영화같은 시대가 시작되었다. 시대 국적을 초월하고 ‘영화같다’란 말은 가장 진부한, 동시에 좀처럼 벌어지지 않을 일(것)들에 대한 수사이지만, 단순히 물리적의미에서, 그리고 문자 그대로 여느 영화에서 봐왔던 어떤 장면들은 곧, 우리 일상이 되어버렸다. 외출의 자유를 빼앗기며 많은 걸 집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나이트 샤말란의 ‘해프닝’ 속 텅 비어버린 거리 속 바로 그 장면이었고, 그렇게 남은 단 하나의 선택지, 사이버 공간에서 살아가는 하루란 ‘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의 단말기에서 벌어지는 AI적 일들에 다름 아니었다. 맞다. 난 지금 매우 단순한, 초-유치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코로나가 시작하고 우리 삶은 다름아닌 그 단순함에 동강이 났고, 아마도 이에 해당할 예시의 영화란 시대를 망라하며 수도없이 많을 것이다. 보다 노골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코로나 반대급부로 OTT 시장에서 급상승하기 시작했던 영화들. 이른바 ‘컨테이젼’이나 ‘감기’와 같은 재난 블록버스터가 그려온 현실 아닌 현실은 아마 수십 년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작돼 여전히 끝날줄 모르는 코로나, 그리고 ‘그 후.’ 이건 정말 영화 같은 시대의 서막이었을까. 우리는 정말 그 단순하고 유치한, 픽션의 판타지, 스크린 너머에만 존재했던 그 '페이크 현실'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린 걸까. 세상은 종종, 픽션보다 더 픽션같이 흘러간다.
오랜만에 들른 체인 카페에서 누구와도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고 차가운 카푸치노를 주문한다. 카페의 부쩍 줄어든 테이블과 의자, 그렇게 드러난 전에 보지 못했던 텅 빈 마루에 스필버그의 실패작, 기후 재앙 이후 로봇이 모든 걸 대신하는 사이버 우주에서의 삶, ‘AI’를 떠올린다. 테오도르가 셔츠 포켓에서 단말기를 꺼내 일과를 체크하는 것처럼 스마트폰의 결제 서비스를 가동, 사람을 대신한 자판기를 닮은 커피 머신에 접속, 이른 여름의 ‘아아’를 한 잔 손에 넣는다. 충격은 컸으나 별 일없이 굴러가고 있는 커피 한 잔을 사는 재앙, 그 후. 어쩌면 이건 우리가 봐온, 영화를 통해 대체 경험한 학습의 효과일까. 너무나 (생각보다) 쉽게 적응해버려 재앙도 곧 현실이 되고 현실도 픽션처럼 굴러가는 세상.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건, 과연 어디 어느 무렵의 오늘일까.
외출을 빼앗긴 도시에 영화관에 간다는 건 감염의 위험을 무릎써야 하는 과제가 되어 버렸다. 사람을 잃은 극장에 떠들썩하게 개봉을 알리는 영화는 자리를 감춘 지 오래다. 오래 전 히트 작품이 신작을 대신하고, 심지어 영화가 아닌 스포츠 중계나 뮤지컬 영상들이 불꺼진 스크린을 밝히는 시절이 밝아온다. 영화가 사라진 거리에 일상은 점점 더 영화와 같아, 난 이건 ‘트루먼쇼’의 실사 버젼이거나 혹은 오래 전 워쇼스키 자매가 예견했던 빨갛고 파란 알약의 그 시연은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했다... 별 재미가 없어 지워버렸다. 어차피 영화란 삶과 얼마간 다르고, 또 얼마 쯤 닮았을 뿐이다. 그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코로나가 시작하고 111일, 난 큰맘을 먹고 홍상수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지난 3년, 홍상수는 모두 3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난 극장에 가자고 결심했다. 늘어나는 확진자 수에 좀처럼 극장 갈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코로나 이후 첫 봄이 만연했던 5월, 마스크를 동여매고 버스에 올랐다. 마포에서 종로까지, 버스엔 기분 탓인지 사람이 별로 없어 보였고, 거리엔 왜인지 지난 기억만이 스쳤다. 코아 아트홀이 있던 거리를 지나, ‘극장전’의 동수가 영화를 보고 나왔던 씨네코아 자리를 뒤로 맛없는 국밥으로 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극장에 도착했다. 코로나로 관객을 잃은 영화관이 힘들다는 소식이 들려온지 벌써 한참, 우리 동네 극장은 아직도 임시 휴업, 서울극장이 42년 만에 영업을 종료한다는 서글픈 발표를 하고, 3일째 되던 저녁이었다. 세상의 모든 게 바뀌어버린 것만 같던 저녁, 그럼에도 적응하는 시절은 ‘방 안에 스크린’을 켜고, 갈 곳을 잃어버린 영화의 한탄마저 들려오는 계절, 홍상수의 영화가 그곳에 있었다. 그의 지나간 명작이 아닌, 새로 시작하는 이름의 영화 ‘인트로덕션’이 지난 5월 개봉을 했다.
‘인트로덕션.’ 영어 그대로 풀이하면 시작이거나 도입. 포스터엔 서로 다른 장면에 서로 다른 말풀이가 적혀있었는데, 난 이건 그럼에도 시작하는 영화의 영화, 팬데믹이 휩쓸고간 일상에 다시 일어나는, ‘지금을 환기하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조심스럽지만 정말로, 그리고 어쩌면. ‘인트로덕션’은 ‘1. 한 사람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행위’로 시작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코로나와 엮어가며, 영화 외적인 요건들을 적용해 감상, 풀이한다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야기, 즉 서사가 중심이지 않은 그의 영화는 대부분 감각, 혹은 장면이 상기하는 감정에 의해 수축·팽창하고, 픽션과 현실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며 경계를 서성이다 끝내 현실 그 어딘가에 진한 자욱을 남긴다. 그런 그의 영화를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지극히 현실적 말들로 재단한다는 건, 그야말로 위험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내에 코로나 첫 환자가 발생한 2020년 2월부터 코로나적 일상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2022년의 여름까지, 그는 모두 3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개봉했고, 그건 모두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완성된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코로나 때문에 전과 다른 방식으로 3편의 영화를 완성해냈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코로나 시절 심심찮게 들려오는 흔한 임기응변과 임시대책의 예가 절대 아니란 이야기이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영화란 꾸준히, 여타 감독들에 비해 빠른 페이스로 제작되어 왔다. 또 한 번의 코로나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모두 두 편의 영화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방향을 돌려 코로나 시절에도 동일한 페이스와 리듬으로 완성된 3편의 영화라는 건, 곧 역으로 가장 코로나에 영향을 받은, 동시에 가장 받지않은 작품이라 말해볼 수도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재난·재앙이란 시간이 흐르고 충격이 잦아들면, 눈앞의 위험이나 하루 빠른 백신 개발같은, 즉 할리우드식 위기와 해결법이 아닌,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과오를 되짚는, 보다 성찰의 심리적 과정을 거치고, 어느 미술 잡지에 기고된 미술 작가 이우환의 성명문을 보았을 떄 난 이건 마치, 홍상수 영화에 대한 코멘터리가 아닐까 생각하고 말았다.
‘코로나와의 싸움은 보다 내면으로서의 인간을 지양(止揚)하게 하는 싸움이기도 하다. 멸망을 피하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성과 자제심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자제심이란 자신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인류의 근원인 자연의 법리, 신체 감각에 의한 우주 메커니즘에 다가서는 일이다.”(미술수첩, 2020.05.13)
현실과 픽션을 넘어 어느 근원을 서성이던 홍상수의 영화를 이 문장에서 떠올렸다면 그저 나의 영화적 망상에 불과할까. 세상은 점점 더 영화를 닮아가고, 홍상수는 코로나 시작되고 모두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더이상 단촐할 수 없을 것 같은 오프닝. 홍상수의 코로나 이후 첫 번째 작품 ‘인트로덕션’은 설마, 종이 한 장으로 문을 연다. 그의 영화 오프닝이란 늘 정직하게 타이틀과 배우, 스태프의 이름을 적어나가는, 심플한 구성이라 할 것도 없이 간소 또 검소했는데, 이번 영화에선 그마저도 없이 흡사 영화 제작 기획서의 표지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화면이 그를 대신한다. 타이틀과 제작사, 감독 크레딧, 그리고 촬영 기간 등 최소한의 정보만이 적힌 ‘A4 용지’ 한 장이 영화의 시작을 시작하고 있다. 마치 이건 영화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촐하다. 난 이 오프닝은 분명 의도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한 남자는 책상 앞에 앉아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기도를 하는 중이다. 흑백 화면 속 다소 묵시론적 분위기는 사뭇 그의 오래 전 작품 ‘그 후’의 봉완(권해요)을 떠올리게 한다. 이른 새벽녘 홀로 식탁에 앉아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봉완. 어둠이 가득한 길을 걸어 지하도로 걸어내려가기 전의 봉완. 그런 ‘그 후’의 또 한 번의 시작. 이렇게 꽤나 간절해 보이는 남자, 동현의 기도는 그의 음성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그는 지금, 사죄를 구하고 있다. 물론 무엇에 대한 사죄인지, 어떤 이유의 기도인지 우린 알 수 없지만, ‘만약 하느님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기도는 생사를 오갈 정도로 절박하고, ‘꼭 그렇게 살겠습니다’, 온평생을 회개하고 뉘우칠 정도로 절대적이다.
다시 한 번 살아간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세상의 업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이, 이곳에서 ‘시작’은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좀처럼 쉽지가 않다. 애초 새로운 시작이 아닌 다시 시작하는 시작을 위해, 영화는 기도한다. 시간이 흘러도 남자의 기도가 해명되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지만, 세상 모든 게 알 수 없게 변해버린 시간, 혹은 부정된 시대. 우린 새삼 시작을 위해 시작을 구원해야 하는 게 아닐까. 홍상수는 지금, 이곳에 ‘다시 시작하는 삶(영화)’에 대해, ‘그건 과연 가능한가’라고 묻고있는 것만 같다.
모두 세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인트로덕션’은 처음으로 홍상수의 영화가 시간적 흐름을 따라 완성된 작품일지 모른다. 1 아빠의 전화를 받고 한의원을 찾은 영호(신석호)와 2 유학을 위해 독일로 건너간 영호의 여자친구(박미소), 그리고 돌아와 3 아빠가 아닌 엄마(조윤희) 부름에 바닷가 횟집에 모인 영호와 그의 친구(하성국)와 한의원에 잠시 들렀던 연극 배우(기주봉)의 술자리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최대한 정리해 말하면 진로를 코앞에 둔 남녀가 각각 엄마와 아빠 품을 떠나는, 그 길목의 이야기라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챕터별로 진행되는 이야기에 서로를 이어주는 맺음의 조응은 없고, 그곳엔 유독 ‘시작의 자리’가 도드라져 있다.
특히나 영호가 아빠의 한의원을 찾은 1에서 둘의 만남은 지연되기를 반복하고, 심지어 동현이 2층으로 퇴장해버리며 시술 받은 여자 환자의 다음도, 짧게 대화를 주고받았던 배우(기주봉)와의 약속된 재회도 이뤄지지 않는다(이후 그는 동현의 아들 영호와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행위’). 그에 더해 문앞까지 함께 왔다 잠시 찻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던 여자 친구의 ‘기다림’까지. 이상하게 보상받지 못한 ‘기다림’ 만이 그곳에 계속 생겨난다. 예정된 만남도, 우린 결코 확신을 할 수 없다.
챕터 1은 의외로 영호와 오래 전부터 알았던 한의원 여자 직원(예지원)의 포옹으로 마무리를 짓는데, 그런 뜻밖의, 예고없이 내리는 눈과 같은, 알 수 없는 만남 만을 우린 기도할 수 있을까. 기다림의 완성 혹은 소멸이 아닌 기다림의 문턱에서 마주치는 어떤 우연과 같은(어쩌면 기적). 불확실함을 끌어안는 것. 오랜 기억을 더듬으며 서로의 오늘을 긍정하던, 둘 사이의 익숙한 포옹이 오직 그곳의 기다림, ‘그 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작이란, 기다림 그 끝에 찾아오는 것이 (결코 or 아마)아니라고, 애써 말하는 것처럼.
‘인트로덕션’을 혼돈에 빠진 현실에 대한 홍상수식 대답이라 이야기하는 건 여전히 조심스럽다. 하지만, 코로나가 시작하고 한 바퀴의 계절을 돌아 도착한 그의 다음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21.10.21 개봉)’는 나의 미약힌 확신에 조금은 힘을 더해준다. 영화는 기묘한 풍경숏과 하나의 기도로 시작한다. 그렇다. 기도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영화의 초반 아파트에 둘러싸인 공원과 잔디, 단지 내 재단된 인공 자연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조금씩 상승을 시작하고, 아마도 가장 익숙할 도시의 창 밖 풍경, ‘아파트 시점의 일상’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너머 한 여자가 기도를 하고있다. 햇살이 들이치는 마루에서 소파에 앉아 노트를 긁적이는 상옥(이혜영)은 다소 알 수 없는 주문과도 같은 기도말을 중얼거린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만이 진실, 얼굴 앞에 보이는 것이 은총입니다.' 동현의 그것보다는 성스럽고, 해맑고, 보다 감사에 가까운 기도처럼 들린다. 이후 그의 동생 정옥(조윤희)이 다가와 ‘오랜만’이라 인사를 하는데, 섣부르게도 난 그 순간, 이건 다분히 코로나적인, 최소한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린 홍상수의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버렸다.
방충망 너머로 바라본 듯 뿌옇게 흐린 창 밖과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직조된 인공 자연, 그리고 그를 쫓아 상승하던 홍상수의 (아마도) 처음 보는 카메라. 전과 달리 이번 영화는 수평이 아닌 수직의 패닝을 하고, 그렇게 도착한 곳엔 땅과 괴리돼 살아가는 도시의 일상이 흘러간다. 엄밀히 말하면 코로나적이라기 보다 코로나로 알게된, 깨우친 우리 일상의 자연 분리적인 삶의 일면. 상옥은 동생 정옥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서 갓 돌아온 상태이고, 그렇게 ‘떠남’이 아닌 ‘돌아옴’의 이야기이고, 둘은 보지 않고 살아온 시간 만큼 서로를 알고 또 알지 못한다. 상옥의 떠남이 정옥에게 ‘버려짐’의 기억이었단 것도, 상옥이 미국에서 바(bar)가 아닌 주류점(liquor store)을 운영하며 살았던 사실도 둘은 알지 못한다. 여기엔 어딘가 ‘돌아온 오늘’에 귀기울이려는 이상한 애씀이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과거사가 화면을 전환해가며 서술되는 건 아니다. 그저, 둘 사이의 구멍난 대화가 자연스레 그런 오늘을 드러낸다. 상옥의 기도를 빌려오면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만이 진실.’ 상옥의 단 하루를 그리면서도 영화는 그녀의 과거를 아우르고, 하지만 플래쉬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좀처럼 오늘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가령, 정옥이 좋다는 브런치 카페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대화가 오가는 사이 (관객의) ‘얼굴 앞으로’ 두 번의 행인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한 번은 남녀 커플이, 그리고 또 한 번은 중년 남성이 멀리서 다가와 지나간다. 롱테이크로 찍힌 이 대목은, 말들 만이 오가는 가운데 돌연 나타난 불청객인 만큼 이상한 기분을 주는데, 그 두번의 오고감을 우리는 보았고 상옥과 정옥은 보지 못했다. 물론 별 거 아닌, 그저 그 순간 커플과 남자가 지나갔을 뿐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홍상수의 카메라는 컷을 나누지도, 줌업을 하는 일도 없이 스크린 하나 만큼의 풍경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마치 그것이 ‘오늘’이라면, 그 안에 다가오는 것들을 모두 ‘보이게 한다’는 마음으로, 모두 다 받아들인다. 이 단순한 사실이 기적과도 같은 마법처럼 느껴진다.
난 그 순간 영화가 돌연 시간성을 확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를 코로나 시절 잃어버린 시간 감각에 대한 홍상수식 해석이라 한다면, 지나치 코로나 피해 망상일까.
칸 해변이나 강원도의 어느 강가, 베를린과 서울 등을 오가며 ‘떠남’ 이후의 시간을 서성였던 전작들과 달리 돌아옴, 이태원과 인사동, 택시 안과 길가를 맴도는 단 하루에 도착한 그의 영화에서 ‘오늘’은 그 어떤 여행지에서의 풍경보다 광활한, 아니 보지 못하고 지나온 시간을 이곳에 펼쳐놓는다. 떠나지 않고 떠나는, 그 돌아봄의 여정이 코로나 이후 지난 과오를 돌아보고 있는 우리 일상을 반영하고 있다면,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나태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까. 정옥의 아들이 운영하는 분식집에 손님은 없어도 배달은 밀리고, 갑자기 연락 온 감독 재원(권해요)을 만나기 위해 찾은 인사동 술집 ‘소설’에서 재원은 ‘요즘 손님이 별로 없대요’란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한다. 어딘가 요즘 많이 들었던 말과 같이. 그만큼 촬영은 수월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멈춰있던 현실의 영화에의 개입.
멀리 떠나지 못하는 시절 가장 근거리의 여행을 택한 홍상수의 이 영화는 그곳에서만 보이는 진실에 다가서고, 일본에서 개봉하며 만들어진 카피 ‘천국이 숨어있던 자리(天国が隠された場所)’란 문장을 보고, 이건 분명 오늘에 숨어있던 선물같은 영화라는 확신을 조심스레 마음 속 더듬어 보았다. 제자리에서 비약하는 낯설고 익숙한 오늘처럼. 다시는 잃지 말아야 할 오늘이, 어쩌면 그곳에 있다.
코로나와 홍상수, 세상 모든 게 움츠러든 것 같던 지난 3년, 그 만큼 활발하게 작품을 만든 감독은 내 기억에 아마 없지만, 그 둘을 연결지어 이야기하는 글은 내가 알기로 별로 보지 못했다. 영화는 현실에 대해 치열하고 지난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현실은 영화가 스크린에 박제된 골동품인양 무심해보이기까지 한다. 특히나 홍상수 영화에 관해서라면 이런 암묵의 룰은 왜인지, 오랜 시간 작용해왔다. 하지만 조금 더 위험한 이야기를 해보면, 코로나가 시작되고 홍상수의 두 번째 작품 ‘당신 얼굴 앞에서’를 보며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느 영화거나 감독도 아닌, 일본의 건축가 쿠마 켄고였다. 골칫덩이가 되버린 2020 도쿄 올림픽의 메인 스태디움을 설계한 바로 그 건축가. 콘크리트가 아닌 나무의 건축을 실천하며 코로나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인물. 안도 타다오의 0.5 이후 쯤 세대이고, 저서로는 ‘지는 건축’, ‘자연스러운 건축’, ‘작은 건축’ 같은 게 있다.
물론 홍상수 영화에 건축가가 등장한 것도(‘도망친 여자’에서의 2층 남자가 있지만), 특정 건물이 도드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상옥과 정옥이 브런치를 마치고 강가로 내려가 수풀에 둘러싸인 채 지난, 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이 쿠마가 이야기하던 ‘건축은 인간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신념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와 달리 줌업이 최대한 자제된 이 영화에서 카페를 떠나 강가에 도착한 카메라는 대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인물에 근접해 있고, 그 앵글은 조금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다. 상옥과 정옥, 사람과 자연이 하나의 앵글 안에 하나의 그림으로 하나의 순간을 완성하도록, 자연 그 곁에 함께인 사람을 바라본다. 홍상수의 많은 영화들이 ‘너머의 풍경’, 바로 전작인 ‘인트로덕션’의 바다거나, 독일의 이상하게 생긴 나무, 그리고 ‘도망친 여자’에서 각 챕터를 열어주던 창 밖의 인왕산과 나머지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두 개 산에의 ‘바라봄’이었던 걸 돌아보면, 수풀 한 가운데에서의 상옥과 정옥은 분명 홍상수가 걸어온 길목의 어느 변이점임에 틀림없다. 특히나 상옥이 다리 아래 허리를 굽히고 담배를 피는 장면에서 징검다리 몇 개 뒤의 정옥은 그를 기다리고, 다소 불편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순간을 카메라는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다. 난 이 순간이 그저 아름답다 느껴졌는데, 경수와 병수(‘강변 호텔’)처럼 상옥과 정옥도 한 자 차이, 홍상수의 영화에서 사람은 점점 더 ‘자연’이 되어간다. 이를 ‘미지의 진실’이 아닌 이곳의 작은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래 전 아름(김민희)은 발밑에 태어난 풀잎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영호에게 화를 내는 배우의 말처럼, ‘진짜’를 포기한 이곳엔 ‘작게 좋은 것 밖에 없다.’
물론 홍상수가 자연과 괴리된 일상을 고발하기 위해, 아파트 단지 내 공원에서 시작해 상옥이 머무는 고층의 아파트까지 상승하는 식의 진입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매 사이임에도 서로의 근황을 잘 모르는 상옥과 정옥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둘의 이름을 한 자만 다르게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코로나로 인해 그간의 일상을 반성하는(다소 일차원적인), 인간 중심의 역사를 뉘우치고 있는 ‘우리의 오늘’을 의도하는 일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마도 ‘풀잎들’ 이후 홍상수의 영화는 조금 더 ‘낮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나아가 현실의 개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카페와 강가, 그리고 우연한 행인과 지나친 뒤 정옥의 아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향하는 길가에, 아파트 담장 앞으로 플라스틱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가득하고, 아들의 식당엔 손님은 없지만 배달은 밀린다. 그러고보면 이른 점심을 하며 둘이 나눈 대화는 ‘아파트 분양이 어떻고 어디는 집값이 2억이나 올랐으며 저금 2억으로 집을 살 수 있네없네’ 지극히 현실의 이야기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이와 같은 위화감을 처음 느낀 건, 보다 더 전작 ‘도망친 여자’에서이다. 2억이 아닌 4억이나 오른 수영(송선미)의 집이랄지, 첫 번째 방문했던 영순(서영화) 집 문 앞에서 벌어진 길고양이를 둘러싼 논쟁이랄지. 이상하게 홍상수의 영화가 이상하게 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던, 반응하기 시작하던 이상한 순간이었다.
자연스레 그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건 그의 영화가 배우 김민희와 만난 시점과 묘하게 일치하(다 느껴지)지만, 지금까지 제기했던 조심스런 이슈들과는 보다 다른 차원에서 위험하게 느껴지는 탓에, 여기선 변화, 그 후 드러난 것들만 바라보고자 한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일상을 덮친 후,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작동하던 일상이 돌연 멈춰버린 정막 그 후. 쿠마 켄고의 말을 빌려오면 ‘새로운 메카니즘을 건축’해야 하는, 멸망 이후 다시 태어나야 하는 시절에, 죽음과 삶 곁을 사색하던 홍상수의 어쩌다 지상으로 내려온 ‘지금의 영화’는 어쩌면 가장 ‘이곳’ 가까이에 있다. 알 수 없는 실체를 향한 갈구, 죽음 앞에 발길을 돌리던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고작 아파트 단지의 자연을 거니는 이 영화의 ‘오늘’은 우리에게 지극히 익숙한, 바로 지근거리의 일상에 다름 아니다. 마치 너머의 너머는 제자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 멀어 보이지 않듯 너무 가까워도 볼 수 없는 것처럼.
근래 들어 홍상수의 영화는 오늘, 혹은 어제, 내일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가장 최근작 ‘소설가의 영화’에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준희(혜영)는 ‘바라봄’에 그치지 않고 땅으로 내려와 공원을 걸었다. 보다 확실한 것, 작게 아름다운 것, 그리고 이곳에 있는 것. 마치 등을 돌리고 있던 너와 내가 서로를 마주하는 것과 같은, 예고되지 않은 이 우연한 조우를 우린 무엇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쩌면 코로나 때문에, 아니면 영화란 마법에 의해. 다만 확실한 건, 가장 영화같은 시대에 홍상수는 가장 현실같은, ‘오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근래 홍상수 영화에 따라붙는 몇몇 말들을 모아보면 ‘가벼워졌다’, ‘투명하다’와 같은 말일 것이다. 물론 전에도 몇몇 러닝타임이 짧은 영화에 대해 오해 혹은 감상을 포기한 채 ‘가볍다’라 이야기된 작품이 있었지만, 최근 가벼워지고 있다고 이야기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 ‘가벼움’이란, 그의 작품이 점점 더 삶 속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듯한, 말하자면 (성실한) 관찰자적 시점에서 그려지고 있다는 일종의 영화적 포지션의 이동에 기인한다. 삶과 죽음을 맴도는, 이곳과 저곳을 아우르던 알 수 없는 고뇌의 장광설은 줄어들고, 꿈과 현실을 뒤섞거나 시간을 비틀며 관객을 착각하게 했던 카메라와 편집도 모습을 감춘다. 영화는 그저, 지금 이곳에 보이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영화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햇살 좋은 오후 테이블 한 켠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있는 것처럼, 살며시 그 곁에 영화 한 편이 놓인다고 하는 게, 어쩌면 지금의 홍상수 영화를 말하는 가장 최선일지 모르겠다. 그의 2010년 영화 ‘옥희의 영화’ 속 대사를 가져오면, ‘이 우유팩이 여기에 놓여진 이유를 알면 온 세상을 알 수 있다’의 우유팩과 같이, 그저 그런 감각으로 홍상수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부쩍 일상 곁으로 다가온 듯 느껴지는 영화 속의 거리감. 코로나가 시작되고 해외 여행이 힘들어진 시절, ‘국내도 볼 것 많아’라는 오랜 자조의 진실은 더할 나위 없는 계절을 만난 듯 느껴지는데, 그야말로 홍상수, 그의 영화는 지금 가장 가까이의 세계를 탐지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 재생되는 시간이 더이상 과거나 미래, 꿈이 아닌 오늘과 어제 내일 정도로 좁혀지고 있는 건, 아마도 이런 시점의 이동, 그리고 그의 영화와 (코로나를 포함)현실이 만난 기적과도 같은 '이상한 우연'의 결과는 아닐까.
‘당신 얼굴 앞에서’는 미국에서 돌아온 상옥의 하루, 그리고 약간의 아침을 그리고, ‘소설가의 영화’ 속 준희의 시간은 오랜만에 돌아온 서울 외곽 어느 곳에서의 하루와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던 서울 어느 극장에서의 몇 시간 남짓이 전부다. 그에 더해 세 명의 여자를 만나러 가는 감희(김민희)의 오랜만의 외출記 ‘도망친 여자’에서의 여정도, ‘하루 세 명을 세 번 만난다’는 건 다소 힘들게도 느껴지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넘어섰다고 꼭 확신할 수도 없다. 화려한 픽션에 가려져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현실을 비추는 창으로서 영화에 주어진 시간은 별로 길지 못하다. 시간이 흘러 상옥이 몇 번이고 되뇌었던 것처럼,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만이 진실.' 가까이, 그리고 오래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이 그곳에 있다. ‘오래 반복해 바라보는 것 만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던, ‘클레어의 카메라’가, 어쩌면 이곳에 드디어 실천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이야기(변화)는, 영화 자체에 대한, 영화 만들기라는 어쩔 수 없이 시차를 품고 완성되는 그 행위에 대한, 홍상수 감독 본인의 다소 강박적인 섬세함, 예민한 정직함에 의한 반영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반영하는, 비추는 매체로서 영화는 얼마나 더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 혹은 과연 가능은 한가라는 보다 존재론적 의심. 실제로 우린 ‘인트로덕션’ 마지막 챕터의 술자리에서 키스 장면에 죄스러움을 느낀 영호에 노년 배우 기주봉이 격하게 화를 내던 장면에서 그 고민을 확인할 수 있다. 마케팅 상 ‘어떤 것의 처음 부분’이라고 이름 붙은 이 에피소드에서 영호는 연기 속 가짜 포옹에 죄스러움을 고백하고, 주봉은 전에 없이 큰 화를 내며 고함을 지른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데시벨이 가장 높아지는 대목인데, 좀처럼 시작을 시작하지 못하는 그곳에 배우를 했다 포기한 영호의 고민은 새삼 연기(영화)라는 허구, 그렇게 찾고있던 진짜(실)의 비어있는 자리를 상기시키고, 주봉의 확신에 찬 술김의 일침은 배우란 기나긴 인생에 작고 커다란 ‘배움’을 내뱉는다. ‘가짜가 어딨어. 작게 좋은 것만 있어.’ 머나 먼 어딘가의 진실이 아닌, 보이지 않던, 가까운 어딘가에 숨어있던 아름다운 가치의 깨우침.
이후 영화는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영호의 꿈을 거쳐 파도치는 바다 앞 서로를 얼싸안는 영호와 친구의 포옹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이 영화의 세 번째 포옹이 완성된다. 1 해소되지 못한 기다림 후 문득 찾아온 예상 밖의 눈과 같은 포옹과, 2 오직 다짐 만을 확인할 수 있었던 한국을 떠나 외지에서의 가장 고독하고 진실했던 둘 사이의 포옹, 그리고 3 어느 넘어진 시작 이후 겨울 바다에 파르릇 떨던 그에게 건네주던 패딩 점퍼와도 같았던 포옹. 그 마지막 포옹은 겨울 바다 만큼 웅장하고 장대하고 또 애절하고, 거침없이 몰아치는 파도 앞에 오직 진실, 유일하게 버티고 있다. 멀리서는 아마 엄마가 창문을 열고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둘은 알아보았지만 아는 척, 손을 흔들지는 않았고, 뿌옇게 보이는 그 멀리의 엄마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난 바다를, 산을, 이상한 나무와 눈을 바라보던 그 눈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마치 또 하나의 ‘자연’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그건 포도막염에 걸린 여자 친구의 시점만큼 불명확하지만, 세상에 가짜는 없고 오직 작게 좋은 것들만. 다시 살아가야 하는 시절 그곳에 내일이 있다면, 그건 아마 실패하며 일어나는 하루일 것이다.
“소형 카메라로 어떤 장면을 즉흥적으로 찍고 그날 편집할 때가 있다. 그런 소품들이 꽤 있다. 그 중 (이번 영화에 나오는) 단편 영화는 시나리오도 없고, 주제도 없이 매우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만들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영화와 스토리와 주제가 담긴 영화를 나란히 비교해보았다. (중략) 이 차이를 보여주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다.”
홍상수 감독은 베를린 수상 기자회견 자리에서 어쩌면 본 영화의 가장 큰 힌트일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는 곧 영화의 타이틀, 그리고 영화 속 소설가 준희가 만드는 영화에 관한 코멘터리로도 기능하는데, 여기서의 영화란 종래의 우리가 알고있는, 플롯이 있고 시놉시스와 스크립트를 통해 만들어지는, 기획된 영화를 가르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준희의 하루치 산책 중에 발견된 무엇이고, 서로에게 진심인 배우를 편안한 상태에 두고, 그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무언가를 온전히 기록하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에 스스로 반응하고 깊이 느낄 수 있는 배우들 사이 ‘진짜’ 발생할 것 같은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가장 만들(어지)지 않은, 어쩌다 그곳에 도착한, 그렇게 가장 영화같지 않은 영화란 우연한 산물을 지칭한다. 영화같은 날들이 흘러가는 시대, 어쩌면 이건 홍상수 감독이 그곳에 던져보는 ‘영화란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을 다시 묻듯, 영화를 새삼 질문하는 그런 ‘인트로덕션’의 물음은 아닐까.
전망대에서 내려와 우연히 길수를 발견하고 시작되는 길수, 양주(조윤희)와 효진, 그리고 두 부부가 퇴장하고 길수의 조카 경우(하성국)가 등장해 이어지는 일련의 대화에서, 준희는 처음으로 ‘영화가 만들고 싶다’는 맘을 고백한다. 우리는 그제야 ‘소설가의 영화’란 타이틀의 의미, 그 힌트를 비로소 다소 허무하게 부여받는다. 공원에 풍기는 음식 냄새에 허기를 느끼고, 라면 먹는 사람을 보고 라면이 먹고 싶어지고, 분식집에 앉아 정확히 라면과 비빔밥을 나눠 먹는 시간, 아니 그런 우연. 아무것도 아니지만 늘 지나치고 있던 것들. 실제로 자리를 이동해 준희는 라면을, 길수는 비빔밥을 주문해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창가엔 한 소녀가 멀뚱히 둘을 바라보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창을 닦던 의문의 검정 코스튬 차림의 남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을 영화는 (더이상) 외면하지 않고, 아니 볼 수 있고, 나아가 길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소녀에게 말을 건넨다.
문을 열며 안과 밖의 사(차)이를 지워내는 듯한 경쾌한 나아감. 그저 봄날같은 이 맑은 날에서의 변화를 우린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영화같은 시절을 살고 있는 지금, 가장 영화같지 않은 영화란 역으로 가장 영화같은 영화란 말이 되어버린다. 그저 말장난처럼 들려 도, 효진과 양주가 꺼내고 준희가 부정했던 카리스마란 말은 이후 길수와의 대화에서 조금 다른 뉘앙스의 말로서 다시 긍정되었다. 준희의 영화는 아직 하고싶다고만 동의된, 꼭 함께여야 할 남편의 출연은 확정되지도 않은, 허락을 받지 못한, 그러니까 미정의, 오직 마음 속에 있지만, 둘은 마치 영화 그 안을 거닐듯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하고, 어쩌면 영화는 이미 그곳에 시작하고 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알코올, 막걸리가 등장하는 책방의 술자리에서 술에 취한 길수는 ‘우리 꼭 영화 만들어요’라고, 조금 전 둘 사이에 발생했던 어떤 ‘진짜같은 감정’을 되새기듯 이야기하지만 준희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야기’로 정리될 수도, 기억으로 간직할 수도 없는 ‘그 현장성’의 영화는 그렇게 결코 오늘 그곳에 완성되지 못한다. 날은 금새 저물기 때문에. 맑던 날이 저물어가던 시간, 길수는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사는 걸 바꾸는 건 힘드니 영화라도 바꿨다’고 말하던 효진의 영화가 아닌, 가장 순수한, 그 순간 그 자리에 발견되는 영화를 쫓던 이야기는 마지막 작은 영화 하나를 남긴다. 그것도 ‘소설가’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41분 남짓의 단편 영화이고, 대부분 흑백으로 촬영되었고, 경우의 말에 의하면 편집을 위해 3백번이나 반복해 확인한 뒤 완성된 작품이다. 세상 모든 우연이 그곳에 도착한 것만 같던 ‘하루’가 끝이 나고 어느 내일, 서울 모 극장에서 준희의 첫 영화는 두 번째로 상영된다. 그야말로 영화같지 않은 영화이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한, 조금 다른 뉘앙스와 의미로서 ‘아마츄어’의 영화이다. 길수가 있고, 공원을 거니는 중이고, 남편이 아닌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이 이따금 다가와 길가의 낙엽을 주워 길수에게 건넨다. 햇살을 받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작은 목소리로 ‘결혼 행진곡을 혼자 흥얼거리는 길수의 밝은 미소가 그곳에 있다.
그리고 종종 들려오는 길수와 그를 찍고있는 경우의 목소리. 줄곧 흑백으로 촬영되던 영화는 이후 컬러로 화면을 전환하고, 우리가 보고있던 스크린 속 영상이 현실이 아닌 촬영에 의해 기록된 영화란 걸 상기하는 별 거 아닌, 하지만 특별한, '영화적 순간'이 찾아온다. 시공간을 이탈한 어떤 환기의 깨어남처럼, 싱그럽고 자유롭고 또 아름답게 '영화'가 시작된다. 보지 못했던 빨강과 파랑과 노랑과.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차이를 보여주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다’라는 말과. 준희의 영화 속 하루는 우리가 보았던 우연한 오늘이 아니고, 그 하루를 상영하고 있는 오늘 또한 우리가 경험한 하루가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길수는 상영관 문을 열고 복도에 나오지만, 그곳엔 핸드폰 알람까지 맞추며 기다리겠다던 길수도 영화를 촬영한 경우도 보이지 않는다. 전과는 분명 달라진 상황. 극장 직원은 길수에게 다가와 준희가 옥상에 있을 거라며 엘리베이터를 타면 된다고 말해주는데, 길수가 도착한 그곳은 과연 준희가 떠난 그 자리일까. 오늘은 이미 떠나가고 이곳에 없다.
옥상에 올라 구석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던 준희와 스크린 속 며칠 전 오늘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객석의 길수와 영화가 끝난 뒤 준희가 떠난 복도에 도착한 길수. 영화 속 영화와 영화 속 현실과 현실의 영화와 영화의 현실이 동시에 어제로 저물어가는 듯한 순간, 지금 우리가 본 건 무엇일까. 혹은 오늘은 언제일까. 그러니까 그들은 다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을까. 난 그 순간 ‘오늘’이란, 홍상수 영화가 도착한 어쩌면 또 하나의 ‘너머의 시간’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숨어있는 자리. ‘당신의 얼굴 앞’이나, 바라보고 있던 길가의 풀잎들. 나아가 ‘지금’ ‘이곳’에 자리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손을 마주 잡으며 포옹을 하며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들. 그런 지근거리에서의 기적들. 이건 과연 돌아옴일까 다시 시작하는 출발일까. 그곳에 우연히 태어난 그 영화같지 않은 영화는 지금 여기 어디에도 없지만, 아직 시간이 흐르고 있다면 그건 분명 영화란 시제일 것이다. 만남이, 이동이 제한된 코로나 3년, ‘작게 좋은 것’들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어쩌면 홍상수의 영화가 이야기한다.
p.s
가장 최근 2022년 4월 21일 개봉한 ‘소설가의 영화’에서 준희는 마스크를 쓰고있었다. 책방을 나와 전망대 빌딩에 도착한 그녀는 들어가기 전 핸드백을 뒤져 마스크를 꺼내 쓰고 입장한다. 우연히 만난 효진 부부도 마스크를 쓴 차림이었고, 심지어 효진의 와이프 양주를 준희는 마스크 떄문에 알아보지 못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그들 얼굴엔 모두 마스크가 양 귀에 걸려있었다. 최근 3년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지만 TV만 틀어보아도 그와는 전혀 다른 일상이다. (대부분)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촬영 시의 감염을 방지하기 위한, 현실적 수고의 흔적에 불과한 인상일지 모르지만, 영화같은 시대를 살아버리게 된 지금, 오직 홍상수의 영화만이 그렇게 오늘을 기억한다. 여전히 또 하나의 현장을 펴며 그곳에 시작하는,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함께한다.
코로나란 키워드로 홍상수의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건 역시나 주저되는 일이지만, 현실을 반영하고 기록하는 매체로서 홍상수의 영화는 코로나 이후에도, 혹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유효하다. 지옥같은 코로나 일상을 하루라도 빨리 잊으려는 자본 중심의 보다 더 큰 픽션의 환각이 아닌, 오늘을 반성하고 성찰하고 관찰하며 그럼에도 영화를 살아가려는 아주 작은 바람으로부터의 영화. 홍상수는 코로나가 시작하고 모두 3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영화못지 않은 현실을 경험한 이곳에 다시 영화가 쓰여진다면, 그건 분명 홍상수의 가장 낮은 곳에서의 영화일 것이다. 코로나 978일, 나는 마스크를 쓰고 홍상수의 영화를 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