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사 동료들과 함께 파업씩이나 해봤다.
인생 첫 회사는 한국후지쯔주식회사였다. 일본 IT기업인 ‘후지쯔(Fujitsu)’의 한국 법인이다. 예전 ‘후지쓰배’라는 바둑 대회가 유명했다. <응답하라 1988>에서 최택(박보검)이 덕선이(혜리)에게 준 항아리가 바로 후지쓰배의 우승 트로피였다. 당시 한국 법인은 국내 매체들에 ‘후지쓰가 아니라 후지쯔로 표기해주세요’라고 애원했지만, 상대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스틸야드에 있던 ‘FUJITSU’ 광고판을 기억하는 포항 팬은 최소 40대다.
약 5년 동안 나는 한국후지쯔에서 신나게 지냈다. 항상 하는 일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대물산에 들어간 친구와 서로 연봉을 깠는데 내가 1.5배 많았다. 친구는 “아 시발 좆같네”라고 말했다. 90년대 말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했다. 한국후지쯔는 주 5일 근무였다. 그 친구가 또 “아 시발 좆같네”라고 말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일본어밖에 없는 사회 초짜치고 한국후지쯔는 꽤 근사한 직장이었다.
입사 1년 차 때 IMF 사태가 터졌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났다. 모든 물가, 금리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자동차 기름값이 갑자기 두 배로 뛰어 고속도로가 텅 비었다. 내가 새롭게 든 적금은 이자 19%짜리였다. 운 좋게 회사는 창사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다. 기업들이 정리해고 지옥에 빠져 신음할 때 한국후지쯔 직원들의 임금은 올랐다. 대표이사는 “친인척이 모인 자리에서 경솔한 언행을 삼가라”라고 당부했다. 노조는 수익 대비 인상률이 낮다는 이유로 파업을 감행했다.
외국계 회사의 파업 시위는 어정쩡했다. 다들 책상머리 앞에서 공부만 했을 것 같은 샌님들이어서 민중가요 가사도 잘 몰랐다. 구호를 외치는 주먹에서 투쟁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침 9시 회사 정문 앞에 모여 두 시간 정도 시위하고, 점심 먹고, 여의도공원에 모여 자전거 타며 놀다가 오후 3~4시 정도에 귀가했다. 파업 기간에 서울역에서 전국 단위 노조가 집합하는 총궐기 대회가 있었다. 노조위원장은 “현장에서 ‘금속’ 자 들어간 깃발이 보이면 가까이 가지 말 것”과 “최대한 조용히 있다가 눈치껏 잽싸게 흩어질 것”을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지시를 충실히 따르면서 유령처럼 있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무료함을 느꼈는지 노조는 가족 동반 파업을 기획했다. 별것 없었다. 어차피 오후에 노니까 가족들 나오라고 해서 여의도공원에서 소풍 기분을 내자는 내용이었다. 같은 부서의 결혼한 선배 세 명이 형수와 아기를 데리고 왔다. 여의도공원에 옹기종기 모여서 우리는 형수들이 준비한 김밥을 먹으면서 소풍을 즐겼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만 해도 핸드폰은 전화만 가능했고 디지털카메라도 없었다. 사진 촬영은 지금보다 훨씬 큰 격식이 요구되는 행위였다. 결국 이 사진은 후지쯔 시절 함께했던 동료들과 함께 찍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았다.
왼쪽 두 번째, 흰 티를 입고 있는 녀석은 내 입사 동기 손창섭이다. 고려대 출신이 누리는 인맥과 명석한 머리, 빠른 눈치로 나보다 훨씬 유능했다. 창섭의 아내(맨 왼쪽)는 미대 출신으로 동화책을 낸 적이 있다. 창섭은 총각인 내게 동화책을 사달라고 했는데 어차피 월급이 넉넉했으므로 나는 흔쾌히 강매를 당했다. 시간이 흘러 창섭은 한국IBM에서 승승장구했고, 나는 영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와 축구 기자가 되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창섭이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나는 차갑게 대했다. 몇 마디를 더 나눠보니 발신자가 정말 창섭이었다. 세계적 IT기업에서 잘나가는 녀석이 월급 200만 원짜리 축구 기자에게 돈을 빌려달라니? 나는 별 고민 없이 창섭의 부탁을 거절했다. 내 돈벌이를 뻔히 아는 창섭도 쉽게 수긍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달 뒤, 후지쯔 시절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창섭이 형 죽었대. 나도 잘 몰라. 교통사고가 났대.”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창섭의 아내는 넋이 나가 있었다. 신입사원 시절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이였지만 그녀는 기억 소환을 시도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혼자 귀가하던 중 트럭을 추돌했고 창섭은 유리창을 뚫고 앞으로 날아갔다고 했다. 다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고 “믿을 수가 없다”라며 혀를 찼다. 내가 아는 창섭도 꼭 안전벨트를 매는 스타일이었다. 후지쯔 시절 선배는 창섭이 아파트 중도금 문제로 끙끙 앓았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나한테까지 돈을 빌리려고 했구나. 그때 그 통화가 창섭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는 사실이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주에서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