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mm
와이프와 아들이 어제 출국했다.
5일 후에나 돌아올 예정이다. 나는 어제저녁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컴컴한 집에 불을 밝혔다. 집에 오자마자 세탁기에 들어있는 빨래를 건조기로 옮겨 돌렸다.
와이프가 끓여놓은 미역국으로 저녁을 챙겨 먹고 설거지를 한바탕 했다. 와이프도 아침 일찍 공항버스를 타야 했기에 아침 설거지는 그냥 두고 가라고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 수세미로 싱크대를 깨끗이 닦고, 가득 찬 분리수거 통과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들고 아파트 크린넷으로 향했다. 분리수거를 하고 돌아와 건조된 빨래를 거실에 쏟아놓고 착착 갠 다음 각자의 위치에 모두 가져다 놓은 후 현관의 신발을 정리했다.
이제야 뭔가 좀 정리가 된듯하여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했다. 뜨거운 목욕물은 그냥 버리기 아깝다. 문을 활짝 열고 환풍기를 켠 다음 바닥과 세면대 등을 솔로 문지르고 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며 말끔히 청소를 했다. (목욕을 할 때마다 목욕탕 청소를 하면 물도 절약되고 뜨거운 물이라 청소도 쉽게 잘 된다.)
잠옷 바지와 흰 티셔츠를 입고 거실에 앉아있는데 머리에서 땀이 연신 흘렀다. 매번 느끼지만 목욕을 하고 나면 몸에서 나쁜 성분이 빠져나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리고 혼자 지내는 첫날부터 집을 싹 치워놓으니 잘한 것 같아 좋다.
오늘은 아침 대신 브런치를 먹는다.
자전거로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이탈리안 식당에 갔다. 이 식당은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11시 오픈 타임에 맞춰 도착했다.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내가 좋아하는 마르게리따 피자와 제로 펩시 하나를 시켰다.
술 마시지 않는 남자의 일탈이랄까?
좋아하는 피자와 나름 궁합이 잘 맞는 일탈(제로 펩시) 한잔을 하니 좋다. 카페인이지만 아직 오전이라 괜찮다. 아니면 오늘은 뭐 까짓 거 한두 시간 늦게 자면 된다. (콜라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마시는 것 같다.)
식당 분위기와 어울리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예전엔 늦은 밤 야식이나 술 한잔이 생각났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잠 못 자서 싫다. 대신 이렇게 좋아하는 음식 특히 집에서 해 먹기 어려운 음식을 이렇게 날 밝을 때 먹어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앞 테이블 손님이 나를 자꾸 쳐다본다.
눈이 계속 마주친다. 삭발한 40대 남자가 일요일 아침부터 이탈리안 식당에 혼자 앉아서 피자를 먹으며 사진찍고 있는 모습이 낯설어서 일까? 아니면 그냥 머리가 너무 짧아서 일까?
(와이프가 엊그제 밤에 머리를 밀어주는데 이발기 눈금 확인을 하지 않고 밀어버려서 현재 내 머리 길이는 1.7mm가 되어버렸다. 와이프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보다 훨씬 낫다고 하는데 좀 믿을 수 없다.)
오늘은 미용실 홈커밍데이다.
이제는 집에서 머리를 밀기 때문에, 다니던 미용실을 졸업했다(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빵집에서 빵을 사서 미용실에 방문했다.
그동안 순차적 삭발의 여정을 함께 해준 원장님께 감사를 표하고 돌아왔다. 늘 친절하고 성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다. 물론 아들은 이 미용실에 계속 다닐 예정이다.(사실은 와이프가 아들 머리(삭발 아님)도 한번 깎아보겠다고 시도했다 망했다.)
집에 돌아와 조용히 거실 책상에 앉았다.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미역국이 눈에 들어온다.
미역국 한번 데워놓아야 할 것 같다.
이동식 옷걸이 아래 먼지 있던데...
청소기도 한번 돌리고,
안 입는 옷 혹시 있는지 옷걸이 서랍장 정리도 좀 하고,
침대 패드 삭 걷어다 빨아야겠다.
아, 생각난 김에 베갯잇도 벗겨 빨아야지.
맞다, 빨래방 생겼던데 이따 이불 들고 빨래방 가야겠다.
신발 정리할 때 보니까 아들 운동화 더럽던데
그것도 빨아놔야겠다.
저녁은 고기를 데울까?
냉장고에 계란말이도 있던데.
한 번에 다 먹으면 단백질 과잉이겠지?
오늘 고기 먹고 내일 계란말이 먹어야겠다.
와이프는 그냥 둘 다 먹으라고 했을 거다 ㅋㅋ
음, 와이프 몰래 버릴만한 게 뭐가 있을까?
걸리려나?
걸리면 얼마큼 혼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