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mm, 삭발
'사각사각'
EBS 한국기행에서 어떤 스님이 면도기로 머리를 밀 때 들리던 그 소리가 내 머리에서 났다. 삼중날 면도기는 밤새 마당에 쌓인 눈을 넉가래로 밀어내듯 내 정수리의 검은 눈을 쓸어냈다.
어떤 비구니 스님은 처음 머리를 밀 때의 느낌이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눈물이 다 났다던데, 나는 눈물 정도는 아니지만 머리를 밀면서 번뇌를 떨쳐내는 느낌이 뭔지 아주 살짝 이해가 되었다. '아, 이래서 스님들이 머리를 미는구나' 정도?
0.8mm와 0mm는 또 천지차이였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우스갯소리 좀 섞자면 0.8mm는 장발이고 두피의 체온을 지켜줄 정도다. (이 글을 읽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한번 체험해 보면 된다.) 머리가 더 시원했고, 어딘가 마음이 맑아진 느낌이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두한족열'에 딱 맞는 스타일이다.
지난주에 나흘의 휴일을 가졌다.
그래서 머리를 0mm 즉, 스님처럼 아예 면도를 해본 것이다. 면도를 하고 영 아니올시다 해도 뭐 4일이면 내 기본값인 0.8mm는 충분히 돌아올 것이란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0.8mm로 정착해 있다.
이 길이가 내 기분에 가장 최적화된 '길이'다. 이보다 더 길면 별로다. 그 이하의 길이인 0.5mm 이발기도 있긴 하던데 그러려면 이발기를 새로 사야 한다. 0.3mm의 차이를 경험하기 위해 하나 더 산다는 것은 불필요한 지출이기에 0.8mm인 지금에 만족하기로 했다.
0mm인 면도를 선택하면 이발기보다 더 저렴한 비용으로 미니멀 헤어 라이프를 즐길 수 있긴 하지만, 두피가 늘 매끄러운 것아 아니기 때문에 오돌토돌 나온 부분들이 예리한 면도날에 깎여나가는 유혈사태는 전혀 원치 않기에 면도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마 이번 4일간의 휴일 동안 충분히 경험을 했기에 0mm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했고 이제는 궁금하지 않다.
0.8mm는 깎고 나면 어딘가 까슬까슬한 느낌이 있는 반면에, 0mm 면도는 이건 완전히 맨살이다. 생전 처음 느껴봤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신생아 스타일'이었다. 손으로 정수리를 대보면 내 손의 체온을 더 확실히 '피부로' 느낄 수 있달까?
면도를 한 다음날, 가족과 함께 스타벅스에 갔다.
각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시선이 나를 거쳐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이런 시선이 좀 쑥스럽기보다 어딘가 자연스러운 (경력이 제법 쌓인) 누드모델이 된듯했다.
누드모델이 부끄러워하고, 가수나 연기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각자의 선택으로 각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선택을 마음껏 누린다는 것은 역시나 좋다는 것을, 후회나 막연한 궁금증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물론 일단 저질러야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삭발의 단점이 하나 있다.
회색 옷을 입기가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특히나 그 '템플 그레이' 느낌의 회색 말이다. 나는 스님은 아니라, 단지 신생아 스타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