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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스트 Jul 18. 2023

마누라가 집을 비웠을 때가 기회다.

주방 장악 5개년 계획(3)

   나는 주방장악 5개년 계획을 실행 중이다.

   요즘에는 와이프가 완전히 주방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정∘부가 서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식재료 주문을 주로 내가 한다거나, 계란이 몇 개 남았는지 와이프께서 나에게 묻곤 하는 것을 보면서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일에서 완전히 은퇴를 한다면 조만간 주방의 실권은 내 것이 될 것이다.



   오랜 기간 냉장고에 불만이 있었다.

   작은 냉장고임에도 냉동실에는 매장시기가 불분명한 것들이 얼려있었고, 냉장실에는 유통기한 지난 양념과 소스들이 눈에 거슬렸다. 한번 어설프게 버릴까 말을 꺼냈다가 와이프의 승인을 받지 못해 도로 집어넣었다.


   그때는 뭐 와이프가 주방을 장악할 때였다.

   하지만 나의 조용하고 점진적인 장악시도가 진행 중이고 와이프는 점차 실권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은 내가 득세하고 있는 시기다.


   지난주 어느 날 오전, 와이프가 집을 비웠다.

   아침부터 외출을 하신다기에 평소와 비슷하게 나는 설거지를 하며 와이프께서 나가시기를 기다렸다. 오전 10시가 가까워지자 와이프는 외출을 했고 나는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의약품을 먼저 싹 처분하고, 돌아오는 길에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사 와, 몰래 예정된 개혁을 감행하는 순서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


   일단 서랍에 있는 의약품상자를 꺼냈다.

   여기야 말로 한 보따리다. 별의별 약들이 다 있다. 처방받고 다 먹지 않은 약들, 언제 샀는지도 모를 다양한 약들과 연고들이 서랍 안에 꽉 차있다. 유통기한이 넘었건 넘지 않았건 일단 사용하지 않는(않을) 약들은 모두 폐기처분 대상이다.


   이 약들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약성분으로 인해 환경오염이 되기 때문에, 모두 싸들고 약국으로 갔다. 그런데 약국은 더 이상 폐의약품을 받지 않는단다. 약사는 (귀찮은 듯) 봉투 한 묶음을 나에게 건네주며 여기에 한 알 한 알 전부 까서 우체통에 넣거나 주민센터에 가져다주란다.


   길 건너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홀짝홀짝 마셔가며 약 한봉다리를 전부 까서 폐의약품 봉투에 담았다. 매우 번거로웠지만, 하나하나 모든 수작업을 마치고 주민센터에 의약품 상자에 투입하고 동네 슈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 5리터짜리를 한 묶음 샀다.

   집에 돌아와 냉동실부터 '발굴'을 시작한다. 3000년은 된듯한 멸치, 2016년 제조 건버섯????, 떡,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곡물가루, 바스러진 미역, 돌덩이가 된 고기 등등이 나왔다. 5리터 음쓰봉 6개 반이 나왔다.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버린다. 그런 가치판단은 확실한 개혁을 방해할 뿐이다. 필요하면 이미 꺼내 먹었을 것이고 또 진짜 필요하면 다시 구매하면 된다.


   이제 냉장실 차례다.

   와이프가 5년 전쯤 선물 받은 마유크림, 유통기한이 지난 으랏차차 아니 스리라차 소스와 쌈장,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았지만 먹지 않는 것들, 그리고 어딘가 찝찝한 양념들이 그 대상이다. 하수구에 몽땅 쏟아버리고 속을 헹구고 겉면 스티커를 제거하여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이제 냉장실, 냉동실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 이제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와이프도 뭐가 있었는지, 뭐가 버려졌는지 잘 모른다. 버릴지 말지 어설프게 물어봤자 개혁이 안된다. ㅋㅋ


   다시 한번 느끼지만 냉장고는 커야할 이유가 없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말이다.



   어제 늦은 저녁에 와이프가 약을 꺼내면서 말한다.

   '이야, 약상자 정리되니 깔끔해서 좋다.'


   냉장고 열면서 또 그런다.

   '좋다 좋다.'


   다음은 싱크대 상하부장에 그득한 잉여 그릇과 냄비 등이다. 와이프에게 또 언제 약속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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