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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Dec 31. 2022

네개의 파이 바닥

가을 애플파이 

 깊은 가을에 들어와 있다. 약 세 달 전 늦여름, 여기저기 보이는 가을 제철 과일들의 모습이 옷장 정리를 재촉했다. 그렇지만 아직 낮은 뜨겁고 매미는 시끄럽다. 그렇게 미루고 어기적대며 가을로 들어서기를 망설이던 어느 주말의 아침, 밤새 건조해져 칼칼해진 목으로 잔잔한 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오늘을 기필코 창고에서 겨울옷을 꺼내오리라. 

 사람 관계에서는 눈치가 없어도 절기에 일어나는 작지 않은 변화들은 바로 보이고 살에 와닿는다. 나이가 들수록 그것들이 더 또렷해진다. 제철 음식이 무엇인지, 공기의 촉감이 어떤지, 이번 주 골목길 한 노부부의 마당 고무 화분에 어떤 꽃들이 피어있는지. 

 여름옷을 꺼내어 상자에 차곡차곡 담는다. 하나씩 보며 '여름옷이지만 가을 겨울 레이어로 입을까, 이건 좀 더 입고 싶은데...' 고민을 하다가 이내 미련 없이 접어서 넣어 버리기를 반복하며 세 시간이 흘렀다. 바람이 통하듯 하늘거리던 옷장 속은 묵직하게 가득 찼다. 

 바닥이 차서 양말을 꺼내 신고 여름 침구를 벗겨 정리했다. 밤이 되고, 오지 않을 것 같은 잠에 대해 걱정하며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어서 잠들고 싶지만 스쳐가는 생각이 하나 있어 눈을 감은 채로 잠시 집중했다. 한 여름의 중간에서 가을이 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게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나를 설레게 한  그것이 생각이 나질 않지만, 여름 내내 잃었던 밤잠을 자야 하니 우선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코 끝이 시려 잠에서 깼다. 밖이 어두워 한밤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다. 아직은 이 어두운 아침이 어색해서 코끝까지 이불을 덮고 창문 밖을 바라보다 다시 짧게 잠이 들었다. 어스름하게 푸른빛이 깃든 공기가 하얗게 밝아오자, 동네 노인들의 요란한 아침 인사 소리가 아직 잠에서 덜 깬 길목을 모질게 흔들어 깨운다. 곧이어 들리는 후진하는 트럭 소리, 그러자 갑자기 떠올랐다. 가을 햇사과로 애플파이를 만드는 것이 이 계절이 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충 씻고 사과를 사러 마트로 향하는데 문득, 애플파이는 아오리 사과처럼 단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은데 아오리는 여름이 제철 아니던가, 부사가 아닌 다른 사과를 구해야 해서 조금은 걱정이 된다. 그러나 마트에 도착하니 사과 품종이 작년보다 훨씬 다양하다. 빨간 사과는 물론이고 밝은 연둣빛과 노란빛이 함께 어우러진 황금사과, 시나노 골드 같은 품종들이 나와있다. 시나노는 손으로 들어보기만 해도 보통의 빨간 사과보다 단단함을 느낄 수 있다. 줄지어 올려진 금빛 사과 위 '상큼하고 아삭거리는 황금 사과!'라는 설명을 보고 애플파이에 좋을 것 같아 일부러 멍들고 상처 난 것들로 잔뜩 골라 마트를 떠났다. 어차피 껍질을 깎아 잘라서 넣을 테니 겉모습이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 

 작년에는 사과 파이를 만들지 않았었나? 파이를 준비하는 과정이 어째 오랜만인 듯 어색하고, 레시피가 쓰인 페이지를 몇 번이고 체크하는데도 자꾸 무언가를 빼먹을 듯 불안하다. 먼저 손으로 파이 크러스트 반죽을 만드는데, 모든 재료는 차갑게 준비한다. 차가운 버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밀가루에 넣고 빠르게 이리저리 굴리다가 가루이 잘 덧 입혀진 버터 조각들을 납작하게 누른다. 무엇이든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면 만족스러운 과정이다. 버터 조각들과 밀가루를 꼭꼭 눌러가며 섞어주다가 손으로 한 움큼 집어 부스러지지 않고 뭉쳐진다면 그때 얼음물을 조금씩 흘려 넣으며 포크로 빠르게 휘젓듯 섞는다. 천천히 밀가루에 물기를 더해 끈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섞다가 거친 표면의 덩어리가 되면 믹스 단계는 끝이다. 거친 반죽을 테이블에 덩어리지게 모아 납작한 네모로 뭉친다. 랩으로 꽉 싸서 두어 시간 냉장한다. 

 파이 크러스트는 간단한 재료로 믹서 없이 만들 수 있지만 조금은 대단한 결과물을 낼 수 있다. 공들여 만든 파이 크러스트에 필링을 넣고 원하는 대로 크러스트를 한 겹 더 얹거나, 다른 토핑을 얹어서 구우면 된다. 파이 크러스트가 단단해지면서 휴지시간을 가지는 동안 사과 필링을 만든다. 꼭 활용해보고 싶었던 레시피를 천천히 읽으며 한 과정씩 천천히 나아간다. 꽤 많은 양의 사과를 깎아야 해서 양 소매를 단단히 걷어올린다. 얇게 썰은 사과에 시나몬, 설탕, 사과주스 등을 넣고 필링에 되기를 더해주는 전분도 넣는다. 그렇게 버무린 사과를 한편에 두고 냉장고에서 파이 반죽을 꺼내와 이등분하여, 한 개는 얇게 밀어 파이 접시에 맞게 잘 담고 나머지 하나는 얇게 밀어 여러 개의 긴 리본처럼 자른다. 아주 넓적한 칼국수 같이 생긴 반죽들을 잠시 냉장한다. 

 그 사이 파이지를 그릇보다 살짝 여유 있는 크기로 테두리를 잘라주고, 사과 필링을 담는다. 산처럼 수북하게 쌓이지만 오븐 안에서 숨이 죽을 것이라 예상한다. 오래전부터 되직하지 못한 필링 때문에 파이를 자르자마자 무너지는 파이가 문제였는데, 이번엔 조금 다르길 기대해 본다. 

 잘라놓은 기다란 반죽을 냉장고에서 꺼내와 바구니를 짜듯 필링 위에 얹으면 어려운 과정이 끝난다. 손으로 만지느라 조금은 차가움이 가셨을 파이를 접시째 냉장했다가 다시 꺼내 계란물을 바르고 케인슈가를 뿌리고 뜨겁게 달궈놓은 오븐에 넣어 구우면 된다. 보통은 유리로 만들어진 내열 접시를 사용했을 때 가장 좋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접시를 사용하여 굽는다. 아주 뜨거운 온도에서 20분 정도 굽다가 온도를 조금 낮춰 마저 굽는 이유는 초반에 높은 온도로 빠르게 반죽을 부풀려 바삭거리는 식감을 살리기 위함이다. 온도를 낮춘 다음에 천천히 골고루 익도록 한다. 

 20분이 지나 온도를 낮추어 마저 굽는 동안 잔뜩 쌓인 설거지를 하고 주방을 정리한다. 그러고 나면 3분에 한 번씩 파이를 들여다보며 크러스트가 타고 있지는 않은지, 윗면이 가라앉고 있지는 않은지 안절부절못하며 오븐 주변을 맴돈다. 크러스트는 맛깔나보이게 잘 부풀어 구워지고 있다. 항상 걱정되는 것은 크러스트 아랫면이다. 윗면에 비해 열전달이 덜 되는 아래는 종종 설 익거나 바삭하지 않게 만들어지곤 한다. 전체적으로 골고루 잘 익은 파이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걱정되는 부분이다. 투명한 유리그릇 아래를 계속 확인하는데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윗면에 비해 아랫면으로의 열전달이 역시 부족해 보인다. 시간이 지나니 파이 속 사과 필링이 바구니처럼 짠 반죽 사이로 새어 나와 느릿하게 거품을 터뜨리며 끓는다. 이 모양새는 좋은 신호다. 파이가 거의 다 익어 간다는 뜻인데 뭔가 이상한 부분도 있다. 멋지게 부풀어 단단하게 형태를 잘 갖추고 있는 윗면에 비해 사과 필링이 숨이 많이 죽어있다. 물론 필링이 가라앉을 것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반죽만 들뜨고 사과는 지나치게 쪼그라들어 윗면 바로 아래가 텅 비어 버린 모양새다. 어떻게 손 쓸 수가 없어 우선 이번에는 아랫면이 잘 익기만을 기대해 본다. 

 한 시간 이상 오래 굽고 나서 꺼낸 파이는 결국 멀겋게 설익은 바닥 크러스트와 가라앉은 필링으로 이루어진 반토막 파이였다. 크러스트 윗면은 계란물과 설탕에 멋진 색을 내주었도 단단하고 바삭하게 잘 구워졌다. 완전히 익는 데는 두어 시간이 걸려서 그 사이 진 빠진 몸을 잠시 뉘어 왜 파이가 잘 구워지지 않았는지 고민해 본다. 혹시 레시피에서 빼먹은 부분이 있는지, 온도를 잘못 보고 맞춰 놓은 것은 아닌지 다시 읽어본다.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이 문제를 개선할 방법은 있을 것 같다. 다른 애플파이 레시피들을 유심히 읽어보며 내가 이용한 레시피에 없는 것은 무엇인지 찾아보니, 사과 필링을 반죽에 담기 전에 한번 조리하는 과정이 눈에 띈다. 안 그래도 파이를 만들기 전에 이 레시피를 살펴보다 사과를 따로 조리하지 않는 점이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다음 파이에 대한 계획을 세우느라 저녁이 되어서야 다 식었을 파이가 생각났다. 긴 빵칼을 가져와 톱질하듯 윗면을 자르니 역시 줄어든 부피의 사과 필링 위로 살짝 내려앉는다. 아랫면을 역시 바삭하지 않고 눅눅해서 깨끗하게 자르기 쉽지 않다. 마음에 안 드는 두 가지 문제만 제외하면 맛은 완전히 합격이다. 윗면 크러스트는 도톰하게 부풀고 바삭하게 구워져 입안에서 즐겁게 부서지고, 적절한 시나몬향과 새콤한 시나노 골드사과가 달콤한 필링에 멋진 발란스를 이룬다. 과거에 항상 문제가 되었던 필링은 적절한 농도와 되직함으로 잘라도 흘러내리지 않고 탄탄하게 형태를 유지한다. 분명 맛으로만 보자면 전혀 분제 될 것 없는 좋은 파이지만 다음에는 확실히 개선을 해보고 싶다. 

 며칠 후 다시 도전한 애플파이. 전날 미리 만들어 놓은 반죽은 얇게 밀어 파이팬에 담고 다시 냉장고에 넣고 나서는 사과 필링을 만든다. 잘 버무린 사과를 이번에는 냄비에 담아 조금 익혀보기로 했다. 그 많은 사과를 하나에 담기는 어려워서 두 개의 냄비에 나눠 조리하느라 진이 빠진다. 필링의 부피가 확연히 줄고 사과가 약간 반투명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불을 끈다. 다른 레시피에 의하면 한번 조리한 필링을 완전히 익힌 후에 반죽에 담아야 해서 넓은 쟁반에 잘 펼쳐 식힌다. 금방 식은 필링을 냉장해 놓았던 파이 반죽 접시에 조심스럽게 담는다. 빈틈없이 꼭꼭 담은 사과필링 위에 윗면 반죽을 얹고 테두리 모양을 낸 다음 계란물과 케인슈가를 얹어 충분히 데워 놓은 오븐에 넣는다. 오븐을 데우며 미리 베이킹 시트 하나를 넣어 놓았다. 뜨거워진 팬이 열을 더 용이하게 전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 구워진 파이를 보니 윗면과 필링사이 틈이 생기는 것은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으나 여전히 휑한 공간이 눈에 띈다. 아무래도 사과양을 늘리면서 1차 조리도 더 오래 해봐야겠다. 크러스트 바닥은 여전히 설 익은 느낌이다. 역시 맛은 좋지만 부족한 부분들은 그대로라 썩 만족스러운 파이는 아니다. 

 설익은 크러스트 바닥은 홈베이커들에게 정말 흔한 문제인데, 파이 접시의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오븐의 문제라면 그 부분도 바로 해결하긴 어려워 보인다. 다양한 해결방법을 읽어보며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느낀 솔루션은 피자 스톤이다. 피자 스톤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말 그대로 피자를 위해서만 쓰는 줄 알았지 기타 요리를 할 때 오븐의 온도 조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쓰는지는 몰랐다. 다시 만들 파이를 위해서 이 피자 스톤을 한번 써봐야겠다고 느꼈다. 


 그렇게 주문한 피자스톤, 한국말로는 곱돌이라고 하는 묵직한 돌판이 얼마 후 도착했다. 굉장히 무겁지만 믿음이 가는 물건이다. 기필코 성공하리라 마음먹고 다시 한번 파이를 만든다. 피자 스톤을 온도 유지가 잘 되지만 원하는 온도로 뜨겁게 데우는데도 시간이 오해 걸린다고 하여 미리 오븐에 예열을 한다. 두 번째 파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만 이번에는 사과를 충분히 더 익혀 보았다. 풍부한 갈색이 되도록 한참 동안 사과 필링을 조리하느라 서늘한 가을의 부엌에서도 이마에 땀이 흐른다. 그렇게 다시 한번, 필링이 끓어올라 오븐 바닥까지 흐르고 파이 윗면이 진한 갈색이 되도록 구웠다. 파이지는 멋지게 부풀어 올라 단단하게 잘 구워졌고, 그 정도는 덜하지만 여전히 필링과 위엔 빈 공간이 있다. 그렇다면 파이 바닥은? 유리 접시를 통해 본 파이 크러스트 아래가 설익지는 않았지만 만족할만한 수준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여전히 실망스럽지만 성공적인 애플파이를 굽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사과 필링을 잘 졸였지만 아무래도 파이 크러스트에 비해 양이 부족해진 것 일수도 있다. 그러면 사과의 양을 늘려 보아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실험해 보고 싶은 부분은 굽는 온도인데, 레시피에 나온 대로 고온에서 시작하여 온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상 온도(180도)로 굽다가 나중에 온도를 올리는 것이다. 초반에 고온으로 강한 열을 가하는 것이  파이지 윗면을 잘 부풀어 오르게 하고 멋진 구음색을 주긴 하지만 뜨거운 열선에 비교적 가까운 파이 위쪽이 다른 곳들보다 빨리 익어 모양이 만들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천천히 익는 필링은 가라앉으며 윗면과 벌어지고 또 바닥면은 미처 익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피자 스톤은 예열을 더 오래 해야 할 것 같고 파이 접시 아래에 베이킹 시트를 깔지 않고 스톤에 직접 접촉이 되도록 구워봐야 할 것 같다. 믿고 싶지 않지만, 한 가지 의심해봐야 할 것 또 한 가지는 파이 접시다. 여태까지 파이는 내열 유리 접시에 구워야 제일 잘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오븐이 바뀐 후에는 그게 아닌 것도 같다. 세라믹 또는 스테인리스 같은 금속 재질로 구워야 바닥면까지 고르게 익는다는 말을 최근 언듯 들은 것 같다. 유리로 굽지 않으면 바닥면의 익힘 정도를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 걱정이지만 다음번에는 세라믹과 스테인리스 소재 파이 접시로 꼭 만들어보려고 한다. 

 평소답지 않게 바쁜 몇 줄을 보내고 겨울이 되어가는 길목에서 다시 한번 애플파이를 만들어 본다. 네 번째가 되니 이제 사과를 몇 개 정도 준비해야 하는지도 알겠고, 필링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 지난 세 번의 완전하지 못한 파이를 통해 사과의 양을 늘리고 파이에 넣기 전에 미리 최대한 졸임으로써 다 구워졌을 때 사과필링이 가라앉는 것을 방지해야겠다고 느꼈다. 많이 졸여지는 만큼 사과도 많이 필요해 1.5배 정도는 준비했다. 

파이지는 이제 계량만 하고 나면 레시피도 보지 않고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레시피에 나와 있는 삼절 접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겹겹이 바삭한 파이지는 좋지만 지나치게 많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삼 절 접기 때문인 것 같아서 그렇다. 그래서 반죽을 만들어 그대로 뭉쳐 냉장고에서 휴지 시킨 후 꺼내서 밀대로 고르게 펴주는 것으로 과정으로 대체했다. 그래도 눈으로 보이는 거친 버터와 밀가루의 조화가 멋지다. 군데군데 뭉쳐진 버터의 흔적이 바삭하게 부서지는 파이지를 보장한다. 이제 남은 것은 굽는 단계인데, 이것만 굽고 사과 파이를 좀 쉬어가야지 하는 생각에 조금은 긴장도 되고, 잘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지난 세 번의 애플파이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이번엔 기필코 멋진 파이를 구워야지. 

 금속 재질에 파이에 밀어 놓은 반죽을 넣고 테두리를 따라 여유분을 남기고 잘라 정리한다. 테두리는 동그랗게 말아 아래로 숨긴다. 파이지에 필링을 담기 전에 파이지 표면에 달걀물을 한 겹 발랐다. 혹시나 필링에 축축하게 설 익는 것을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거기에 미리 졸여 좋은 사과 필링을 산더미처럼 높게 담고 파이지 윗 면을 얹는다. 아래에 깔린 반죽과 윗 반죽을 만나게 하여 눌러주고 물결 모양이 나도록 모양은 내고 나면 파이 요소의 조립은 끝이다. 200도가 아닌 180도로 달궈진 오븐에 파이 접시를 조심스럽게 넣고 타이머를 맞춘다. 

 설거지를 하고 적업대 위를 치우는 동안 가능하면 오븐을 들여다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손 쓸 수 없는 상황에 오븐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도 별 소용이 없다. 자꾸만 보고 싶고 오븐 문을 열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벌써 네 번째 시도하는 애플파이를 더 이상은 보챌 수 없다. 30분 정도 후 확인한 애플파이는 윗면이 노릇하게 구워졌다. 3절 접기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확실히 부풀음 정도가 과하지는 않다. 필링은 익지 않았겠지만 윗변에 어느 정도 색이 올라왔으니 5분만 더 지켜보다가 알루미늄 포일을 한 장 덮어놔야겠다. 이렇게 하면 윗면에 구음색이 더 이 상 생기거나 파이지가 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파이지는 다행히 많이 부풀지 않았고 아래 필링과 적절하게 맞닿아 있다! 바구니 모양으로 짜서 올린 파이지의 열린 틈새로 필링이 느릿하게 끓어오른다. 투둑투둑 천천히 터지며 굽는 단계가 끝나감을 알린다. 한 시간 가까이 구운 파이를 꺼내 식힘망에 올리고 식힌다. 색이 좀 연하지만 필링에서 많이 뜨지 않고 완전히 익은 윗면을 보니 안심이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파이지 아랫부분인데, 금속재질의 불투명한 접시이다 보니 확인할 방도가 없다. 우선 인내심을 가지고 파이를 두 시간 이상 완전히 식히기로 했다. 집 정리를 하고 빨래 한판에 점심을 먹고 나니 파이는 거의 다 식었다. 이번 파이가 시행착오의 종지부가 되었으면 한다. 과연 파이 바닥은 설 익은 부분, 필링에 축축하게 젖은 부분 없이 고르고 단단하게 구워졌을까? 묵직한 파이를 파이 접시에서 조십스럽게 분리한 뒤 과감하게 올려 아래를 확인했다. 바닥면이 고르고 진하게 익었다. 손가락을 긁으면 꺼슬꺼슬 건조한 소리만 나도록 축축함도 없다. 금속 팬의 바닥면 빗살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진 파이 바닥과 그로써 성공한 파이. 필링은 물론 잘 익었고, 되기도 적당하여 잘랐을 때 켜켜이 쌓인 사과들이 무너지지 않고 형태를 지탱하고 있다.  

흥분하지 않고 다시 파이를 접시에 담고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한숨을 내 쉬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딱 좋은 파이. 잘난 척은 못해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 순간이다. 한 번 만든 것을 두 번 이상은 또 만들기는 나에게 너무도 어렵지만 사과 파이는 그렇게 해 봐야 마땅한 파이다. 파이의 왕, 파이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 파이의 정점. 그곳의 내가 가까워졌음을 우리 집 뒷골목의 수다스러운 노인들은 전혀 알 길이 없을 테지. 사과파이를 상기시켜준 후진하는 트럭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팔고 있을까? 거기서 산 재료로 오늘은 어떤 저녁 반찬을 만들고들 있을까? 흥분된 마음에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멋진 사과 파이를 만들어 적어도 3일은 원하는 만큼 사과 파이를 먹을 수 있다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파이를 만들고 얼마 안 가서 황금 사과 철이 막바지가 되었다. 제철 사과보다는 덜 아삭하고, 맛은 조금 싱거워진 사과를 먹으며 그동안 만든 파이에 대해 생각하며, 그래도 네 번 만에 괜찮은 파이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한 숨 돌린다. 다섯 번째까지 해야 했으면 약간은 질리고 아쉬웠을 것 같다. 너무 많은, 더 이상 즐겁지 않을 만큼 파이를 먹어야 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철 지난 사과로 그저 그런 파이를 구워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물에 대한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꼼꼼하게 고쳐나가며 새로운 시도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실은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베이킹에 있어서는 공부하는 자세로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해서인지도 모른다. 뭐든 한 번만 만들어도 지쳐버리기에 연달아 실험해 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날씨도 좋고 마음도 여유로워서인지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연습했던 애플파이. 유난히 금세 지나가서 아쉬운 가을은 네 개의 애플파이와 함께 나를 지나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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