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만나는 남반구의 여름
아론의 형님 처가에서 뉴질랜드 첫 밤은 시차를 느낄 겨를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피로가 수면제였다. 24시간 가까이 걸린 여정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을 마중 오겠다는 아론에게 내가 미안해하자 그가 건넨 말이다. “덕분에 형님을 일찍 볼 수 있으니까 좋죠.”
2월 하순의 뉴질랜드는 여름의 끝자락으로 우리로 치면 8월 말이다. 오클랜드는 남위 37° 정도 되니까 우리나라 중부지방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6시 30분. 서머타임 기간이라서 아직은 해가 뜨기 전이다. 아직 어둠이 남아있는 집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어젯밤에 도착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전경을 보니 정말 여유롭다. 어림으로 대지 400평에 건평 100평 정도 되는 것 같다.
아론의 형님 처가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아침 식사를 위해 아론과 인근의 브라운스 베이로 향했다. 아름다운 해변을 낀 휴양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카페에서 샌드위치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내가 내겠다고 해도 아론이 계산을 자처한다. 한국의 계산대 앞에 간혹 벌어지는 실랑이를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이야! 해변으로 나서자 이른 아침인데도 햇볕이 정말 강하다. 모자가 뉴질랜드 초등학교 등교 필수품이란 말이 실감 나는 날씨다. 내리쬐는 햇볕, 적당히 촉촉한 습도 그리고 미세먼지 없는 상쾌한 공기로 겨울에 떠난 여행자를 반겨주는 브라운스베이 비치다. 성수기 여름 주말인데도 한적한 해변 풍경이 일품이다.
해변을 걸으며 가영님(아론의 아내)의 다친 무릎 치료에 진전이 있는지 아론에게 물었다. 3주 전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는데 주치의(가정의) 진료만 받은 후 아직 전문의 진료를 받지 못한 채 하염없이 순번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골절은 아니지만 목발에 의지해 간신히 집안에서나 거동할 수 있는 정도라는데...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처럼 공공의료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지만 - 무료 또는 총비용의 10 ~20% 정도를 환자가 부담하는 것 같다 -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럴 경우 우리 같으면 종합병원이 아니더라도 바로 정형외과 전문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을 수 있는데 반해 뉴질랜드는 주치의가 전문의나 상급병원에 의뢰하여 대기자 명단에 오른 후 차례가 오기를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론은 오늘 오후 회사 워크숍에 참석해야 한다. 예약한 크라이스트처치행 항공편이 3시 출발이기 때문에 시간이 좀 남았지만 일찍 공항에 나를 데려다 주기로 했다. 워크숍은 마타마타(Matamata)에 있는 호비튼 무비 셋(Hobbiton Movie Set) - 일명 호빗마을 - 에서 열리는데 입장료만 해도 20만 원에 육박한다면서 나중에 경험담을 전해주겠다고 한다. 아론은 내가 헤맬까 봐 티켓팅하고 짐 부치는 것까지 일일이 챙겨주고 나서야 떠났다. "아론.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다음 주 일요일 타우랑가에 다시 만나요."
크라이스트처치로 가는 국내선은 오히려 국제선 분위기가 난다. 승객 중 동양인은 나를 포함해 둘 뿐이다. 인천에서 출발할 때 오클랜드행 에어뉴질랜드 항공편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열에 아홉은 한국인이었다. 경기(景氣)가 좋지 않다는 말도 여기서는 딴 세상 얘기였다. 생각보다 오육십 대 이상의 여성이 많은 점도 인상적이었다. 비행기가 조금 컸다 뿐이지 제주행 항공편 비슷한 풍경이었다.
잠시 후면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이다. 재작년 코니가 한국에 방문했던 일이 떠오른다. 코니의 한국 여행을 위해 내가 전담 가이드를 약속했지만 상대가 몇 년을 별러서 온 휴가가 보니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한편으로 염려가 되기도 했다. 말은 잘 통할지,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지나 않을지 걱정도 됐고. 당시 쉐인(코니의 남편)과 딸들은 나만 믿고 한국으로 홀로 휴가를 떠난다는 코니를 걱정했던 것 같다. 사실 휴가 중 크고 작은 해프닝이나 사고는 제법 발생한다. 다행히 그녀가 아무런 문제 없이 휴가를 즐기고 돌아갔고 쉐인이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J가 당신 휴가 때 보여줬던 호의를 갚아야 되겠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은 인간관계에도 똑 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 수많은 채팅과 메일을 주고받았지만 - 어느 날 카카오톡 대화 내보내기를 해보니 빽빽한 A4 2천 페이지가 넘었다 - 온라인 대화는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서로 만나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대화, 같이 하는 식사 같은 경험은 추억과 감정의 지층을 켜켜이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반면 온라인 대화로 만들어진 관계는 Del 키를 누르면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오는데 이곳에서는 동양인이 더 눈에 띄었는지 쉐인과 함께 마중을 나온 코니가 먼저 나를 알아봤다. 공항을 나서 코니의 집으로 향한다. 공항은 시(市)의 서쪽 외곽에 위치하고 코니 집은 동북쪽 해변에 있어 시내를 가로질러 가야 한다. 시내라고 하지만 고층빌딩도 없고 조금만 벗어나면 단독주택으로 이루어진 주택가다. 코니가 한국에 왔을 때 고층 빌딩 숙소를 원했던 마음을 알 것 같다. 프레이저 플레이스 호텔 16층 룸에서 쭉 뻗은 서소문고가도로를 내려다보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던 그녀다.
와이마리비치에 위치한 코니의 집에 드디어 도착했다. 구글 거리뷰와 그녀가 카톡으로 보내 준 사진 모습 그대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눈앞에서 본다고 해도 이렇게 감격스러울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같은 그저 피라미드일 뿐이니까. 1층 게스트룸 - 코니는 채팅할 때 your room이라고 했었다 - 에 짐을 풀고 집 안팎을 둘러본 후 거실에서 코니 내외와 얘기를 나누었다. 쉐인이 짓궂게 던진다. "같이 Language exchange를 한다면서 J는 영어를 이렇게 하는데 코니 당신의 한국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면서. 교육과정 속에서 필수과목으로 영어를 배우는 우리와 외국어 학습이 절실하지 않은 그들을 동일 선상에 놓기는 어렵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동료들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관심을 보였다. 혹시 코니의 집에 묵는 동안 그녀의 남편이 불편한 내색을 비치지 않느냐고. 우리 정서에서는 당연한 질문이겠다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우스갯소리를 던져가며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고, 6일간의 웨스트 코우스트 여정에 동행하기 위해 회사에 5일 휴가를 내기까지 했으니까.
뉴질랜드는 축복받은 나라다. 남태평양 서쪽에 외롭게 자리한 뉴질랜드는 가장 가까운 호주와도 우리나라에서 홍콩에 가는 정도 거리로 멀리 떨어져 있다. 주변 국가들과 역사적으로든 지정학적으로든 얽히고설킨 게 별로 없다는 얘기다. 유럽이나 미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불법이민자로부터 자유롭기까지 하다. 영국의 개척 식민지였다가 -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한일관계의 식민지가 아니다. 뉴질랜드 인구의 다수가 영국계 백인이며 이들은 영국에 대해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 1947년에 독립했다. 낙농업, 목축, 와인산업, 임업 등 1차 산업이 경제의 근간이며 관광업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부보조금 없이 농업의 경쟁력이 유지되는 거의 유일한 선진국이라고 한다. 남한의 2.5배가 넘는 국토에 인구는 1/10인 500만 명이다 보니 여유롭고 풍요롭다. 영어가 공용어인 데서 오는 이점도 크다. 뉴질랜드가 가지는 경쟁력의 상당 부분이 영어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남섬과 북섬으로 나뉘어 위아래로 길게 뻗은 지형 덕분에 생각보다 다양한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제주도와 위도가 비슷한 북섬의 북쪽 끝은 연중 온화한 아열대 기후가 특징이다. 제주도보다 겨울이 따뜻하고 여름이 무덥지 않은 기후다.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한 뉴질랜드는 화산 활동이 활발하고 북섬의 중앙에 위치한 로토루아는 온천지대로 유명하다.
스위스, 북유럽과 비슷한 경관인 남섬 끝에는 피오르드 지형으로 유명한 밀포드 사운드가(Sound에는 해협이란 뜻도 있다) 있으며, 최고봉 쿡산(3,724m)을 비롯한 고산에는 빙하지대도 있다.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웨스트 코우스트의 온대우림이다. 열대우림의 그 우림(雨林)이다.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의 태즈만해를 건너오는 동안 잔뜩 습기를 머금은 편서풍은 남섬의 서던알프스 산맥에 부딪쳐 웨스트 코우스트 지역에 연간 3~4천mm 비를 뿌린다. 장마철에 비가 집중된 우리와 달리 매월 200~300mm가 연중 고르게 내린다. 반면 건조한 남섬 동쪽의 캔터베리지역에는 광활한 평원이 펼쳐져 있어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나 양 떼를 흔히 볼 수 있다.
온화한 기후와 온천, 해양스포츠를 즐긴다면 북섬이 좋고 스위스나 북유럽풍의 이국적 풍광에 끌린다면 남섬을 찾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