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밭 Apr 20. 2024

06 남섬의 관문 크라이스트처치(상)

그들의 일상이 내게는 관광이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여름밤은 차다. 싸늘하게 내려간 기온에 새벽잠을 설쳤다. 코니가 말한 대로 전기 히터를 틀고 자는 게 옳았다. 커튼을 젖히니 옛 물건과 기념품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코니의 집안 내력과 취미를 보여주는 물건들이다. 색 바랜 책, 어머니께 받은 의자, 액자에서 자랑스레 빛을 발하는 훈장, 다이얼 전화기…. 어린 시절 다락에 올라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집은 한옥이었다. 구조상 한옥에는 부엌 위에 다락이 있다. 호롱, 먹줄통 같은 옛 물건들, 군에 계셨던 큰아버지가 가져다 놓은 망원경, 칸델라(석유등) 같은 미제 군수품 등 호기심을 자아내는 갖가지 물건들이 다락 곳곳에 숨어있었다. 혼자서 공상을 즐기기 딱 좋은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인구 50만 명 정도로 우리나라 포항시와 비슷한 규모인 크라이스트처치는 남섬의 관문과도 같아서 관광객 입장에서는 스쳐가는 도시다. 남섬을 찾는 관광객은 대부분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차를 빌려 장을 본 후 퀸스타운, 마운트쿡, 레이크테카포, 피요르드랜드의 밀포드사운드 같은 명소를 찾아 떠난다. 나의 뉴질랜드 여행은 사뭇 다르다. 남들 가는 관광 명소가 아닌 친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들의 일상이 내게는 관광이 된다. 곳곳에 공원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크라이스트처치의 가장 대표적인 공원 해글리 공원(Hagley Park) 동편이 City Center 즉 번화가다. Christchurch Art Gallery, Arts Center, Canterbury Museum을 천천히 둘러봐도 좋고 트램을 타고 여행자의 분위기를 내볼 수도 있다.


크라이스트처치 중심가의 고풍스러운 빅토리아풍 건물. 지진으로 파괴된 건물 왼쪽은 복구 중이다.


기억의 다리(Bridge of Remembrance). 제1차 세계대전 때 참전하는 병사들이 이 다리를 건너 역으로 가면서 가족과 친구들의 전송을 받았다고 한다.


차는 주차장에 두고 코니와 시내를 천천히 둘러본다. 다양한 디자인의 건물, 그 옆을 느릿느릿 지나가는 트램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여준다. 2011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어 단기간에 복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건축의 미학을 제쳐두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서울의 롯데타워에 얽힌 해프닝이 생각난다. 롯데는 에펠탑 모양의 초고층건물 건축 계획을 발표했다가 건축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마천루는 도시의 상징인데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 에펠탑을 본뜬 빌딩을 세우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는지... 빈곤한 문화의식의 단면이다. 도시의 미학과 정체성을 결정하는 첫 번째 요소는 건축물이다. 사실 도시란 건축물의 집합체 아닌가. 우리는 건축물에 좀 더 사치를 부려야 한다. 아니 사치를 부리도록 행정당국이 강제해야 한다. 서울은 그나마 예외지만 우리의 지방도시 건물 중 후대에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될 만한 건축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저 기능에만 충실한 우리네 건물이 떠올라 좀 씁쓸했다. 우리가 지금 문화재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한 때의 사치품이었다.


지진으로 파괴되어 복구가 진행 중인 대성당


해글리 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크라이스트처치 아트센터


해글리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안을 휘돌아 흐르는 에이번강에서  뱃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곳곳의 거대한 나무가 우리네 공원과는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여행 중에 내가 쓰는 카메라는 리코 GR3다. 풀프레임 카메라를 쓰다가 무게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도달한 결론이 리코 GR3다. APS-C 이미지센서를 탑재하고도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가 매력이다. 카메라 모니터에서는 허접해 보이는 사진도 원본(Raw file)을 라이트룸에서 살짝 건드려 주면 아래와 같이 윈도우 시작화면에서 나올법한 멋들어진 사진이 만들어진다.


보테니컬 가든(온실) 근처 연못에서


크라이스트처치 아트 갤러리로 - 우리로 치면 시립미술관 - 이동했다.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독특한 외관의 유리로 된 건물이 우리가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나는 미술관이야"라고 뽐내고 있었다.


크라이스트처치 아트 갤러리(위키피디아에서 인용)


전시품을 감상하는 코니


아트갤러리 2층 창가 복도에서 보이는 풍경


아트갤러리 기념품샵을 둘러보다가 사진집을 구입했다. 결과적으로는 지 말걸 그랬다. 여행 내내 무거운 사진집을 들고 다니는 통에 번거로움만 더했다. 덕분에 추억이 깃든 책은 생겼지만.




크라이스트처치에 왔으니 다리도 쉴 겸 트램은 타봐야겠지. 시티센터를 한 바퀴 도는 코스다. 나무로 만들어진 과 내부 인테리어가 옛 정취를 물씬 풍긴다. 우연인지 승객도 모두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다. 차장이 중간중간 계속 설명을 하지만 잘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창밖으로는 한창 복구가 진행 중인 건물도 다수 보였다. 코니는 방치된 노란 빌딩을 가리키며 자신이 결혼식을 올렸던 호텔인데 지진에 파괴된 후 재건을 포기했다고 한다. 크라이스트처치 주민에게 2011년 대지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트램 노선도


트램 요금을 계산하는 코니(중앙)


트램에서 내려 점심을 위해 리버사이드로 향했다. 이후는 7편으로...


작가의 이전글 05 오클랜드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