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박 9일 직장인의 가을 방학

[2021.10] 제주도

by 재쇤

작년 10월 현 직장에서의 입사 2주년을 맞이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워낙 역마살을 타고 난지라 과연 어떤 조직에서든 만 2년을 눌러앉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현재 몸 담고 있는 조직과 나의 합이 좋아 계속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2주년이라는 순간이 찾아왔다.


원래 2주년이라는 마일스톤을 달성하면, 발리나 태국의 치앙마이 같은 휴양지로 떠나 충분한 쉼을 가지면서 지난 2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지속되는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은 여전히 불가능한 옵션이었다. 큰 고민 없이 제주도로 향하기로 했다. 일 년에 2-3번 정도 자주 가는 여행지이지만 혼자서 길게 떠나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또 다른 모습의 제주도를 경험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때마침 10월에는 개천절과 한글날 대체 공휴일이 있어 연차를 4일만 썼을 뿐인데 주말 포함하여 총 10일의 징검다리 연휴가 완성되었다. 바쁜 시기 자리를 길게 비우는 것이 약간 눈치도 보였으나, 그래도 만 2년을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니 조금 뻔뻔하게 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월령 포구

10월 초였지만 제주도의 날씨는 아직 여름에 머물러있는 것 같았다. 반팔을 입고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한낮에는 더웠다. 여행을 위해 새로 장만한 가죽 자켓을 캐리어에서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충분한 쉼을 가지는 것이 초기 목적이었지만 욕심 많은 나는 기어코 이런저런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친구 부부, 옛 회사 팀장님 가족을 만날 것, 한라산 등반을 할 것, 가져간 책 2권을 읽을 것, 글 한 편 이상을 쓸 것.


여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던 제주도에서의 일정이 순식간에 빽빽해져 버렸다.


자파리 게스트하우스


친구네 집에서 자는 날을 제외하고 8박 9일의 일정 중에 여섯 밤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기로 했다. 숙박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낮에는 혼자 밖에서 돌아다니더라도, 밤에는 숙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재잘거리며 서로의 여행과 삶에 대해 재잘거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기왕이면 산속에서의 고요함, 바다 경치의 시원함을 두루두루 즐길 수 있는 곳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2개의 게하를 사이좋게 3박씩 나눠서 예약했다.


애월읍 유수암 마을에 위치한 첫 번째 게스트하우스에 늦은 밤 체크인을 했다. 그 다음날 동네를 둘러볼 겸 간단한 아침 산책을 하고, 아직 조식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마당에 있는 빈백에 누워있는데 새 지저귀는 소리, 벌레가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엌에서는 밥 짓는 냄새가 기분 좋게 났다.


여행이 제대로 시작되려는 둘째 날 아침, 조용한 환경 속에서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자니 모든 감각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런 사소한 것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가진 것에 행복함을 느끼는 것, 이것이 진정한 여행의 맛이지.'


잠시 잊고 있던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와하하 게스트하우스

편안한 호텔과 에어비앤비에 익숙해진 몸을 게스트하우스에 맞춰 움직이는 것은 불편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에 비한다면 몸의 불편함쯤은 거뜬히 감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역시나 이번 여행에서도 당당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가진 멋진 어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직장 때문에 제주도에 내려왔지만 퇴사한 뒤 남편과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이곳에서의 삶을 꾸려가시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내 나이뻘의 딸이 있지만 여전히 회사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바쁘게 일하는 모습이 너무 멋졌던 언니. 마주칠 때마다 말 걸어주고, 삶은 문어도 나눠주면서 딸처럼 세심하게 챙겨주셨던 장기 숙박 선생님.


아는 정보는 이름, 나이 정도. 그저 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는 공통점 밖에 없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도 저렇게 살아가야지' 마음을 심어주는 어른을 1명이라도 만났다면 그 여행은 성공한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이 맛에 나는 다음에도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면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두드릴 것 같다.


표선면 해안도로

8박 9일 동안 제주도 구석구석을 드라이브를 한 것도 커다란 행복이었다.


사실 황금연휴 기간 천정부지로 올라버린 렌터카 비용 때문에 뚜벅이 여행을 할까 고민이 많았다. 그래도 워낙 드라이브를 좋아하는지라 기왕 떠나는 여행 제대로 즐기기 위해 거금을 주고 차를 렌트했다. 원래 계획대로 발리를 갔다면 마땅히 지출했을 항공편을 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뭐, 교통비인 건 맞으니까.


그리고 렌터카는 충분히 그 값어치를 했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며 내가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특히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표선면의 바다를 보며 드라이브할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감이 밀려왔다.


신창 풍차 해안도로

떠나기 전만 해도 8박 9일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제주도에서 꽤나 여유롭고 알차게 잘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김포공항으로 돌아오니 그 길었던 시간은 훅 지나가버린 찰나의 순간처럼 압축되었다.


여러모로 이번 여행의 키워드는 '경계'가 아니었나 싶었다.


혼자서 카페에서 책을 읽고, 러닝하고 드라이브하며 시간을 보낼 때는 여기가 제주도가 아니라 서울에서의 일상처럼 느껴지다가도 친구, 동행을 만나 재잘거리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비로소 여행처럼 느껴졌다.


여행 내내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며 주인공 다무라와 함께 현실과 이상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헤맸으며, 날씨는 여름과 가을의 사이 어딘가였다.


아줄레주 카페

서울에 돌아오니 제주도에서 경험한 습한 여름은 아득히 멀어지고 갑자기 가을이 성큼 다가와있었다. 여름옷을 정리하고 선풍기를 청소해서 들여놨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정신이 또렷해지면서 짧으면서도 길었던 가을 방학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카메라: Kodak M35
필름: 코닥 컬러필름 울트라맥스 400-36
현상: 여기현상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