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J 여자의 입장에서 쓴 주관적인 글
ESTJ 남자와 300일째 연애 중이다. 나는 ENFJ라서 가운데 두 개의 유형(S-N, T-F)이 다른데, 이렇게 크나큰 차이를 만들 줄은 몰랐다.
다른 점이 보완이 되고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현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별거 아닌 일로 싸움으로 번지기도 쉽다. 항상 잔잔한 연애만 해오다가 투닥투닥 거리는 연애는 처음이라 이 묘한 긴장감이 오히려 재밌다. 한 번은 우리의 연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300일 간의 데이터가 쌓였기에 지금이 적당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소위 말하는 MBTI 과몰입러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람의 유형을 16가지로 나눠주니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물론, 나와 다른 유형의 사람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회사에서 왠지 모르게 회의를 같이 하거나 대화를 하면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동료가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랑은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내가 문제인가?' 하면서 괴로웠는데 MBTI를 알게 되고나니 '아 이 사람은 OOOO라서 그렇게 반응하는구나'하고 쿨하게 넘기게 되었다. 물론 맹신하고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좋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기에 면접 같은 자리에서는 절대 물어보지 않는다.
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연애할 때도 MBTI는 도움이 된다. 사소한 상대방의 말, 행동으로 서운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 그때마다 MBTI를 떠올리면 그가 나쁜 의도로 한게 아니라, 내가 타고난 면이 있듯 그에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구나 싶어 서운한 감정은 사르르 녹는다. 이쯤 되면 나는 MBTI를 모르는 단어를 이해할 때 찾아 드는 사전처럼 활용하고 있는 듯 싶다.
다시 남자친구 이야기로 돌아와서 유튜브와 각종 콘텐츠를 통해 찾아본 ESTJ의 연애 특성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듯 하다.
- 데이트 코스를 계획적으로 짠다
- 바빠도 연락 잘 한다
- 세심히 챙긴다
- 맞춰는 주지만 감정적 공감을 어려워한다
-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 내가 먼저 좋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지난 300일 간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ESTJ 남자친구 사전에 아래의 2가지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얼마 전 영화관에서 '애프터썬'이라는 예술성이 짙은 영화를 같이 본 적이 있었다. 20년 전 아빠와 떠났던 튀르키예 여행을 캠코더 속 영상을 통해 어린 주인공의 입장에서 회상하는 스토리였다. 영상미는 아름다웠고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연출은 그닥 친절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낮에는 딸과 잘 놀아주던 친절한 아빠가 갑자기 밤에 바닷가로 뛰어든다(딸을 혼자 남겨두고 자살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또는 아빠가 혼자 남은 방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다. 이 모든 것은 어린 딸의 시선에서 그려지기 때문에 아빠의 이상한 행동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린 딸에게는 말못할 어른의 고민과 가장으로써 짊어지는 책임감의 무게가 무거울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 옆에 앉은 ESTJ 남자는 그렇지 않았나보다. 예상치 못한 전개가 될 때마다 "왜 바닷가에 뛰어든거야?" "왜 우는거야?"라고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불안한 사운드트랙이 나올 때마다 같이 불안해했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T형 남자친구는 특정 이유와 원인에 대한 파악을 기본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2시간 동안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는 장면만 펼쳐지니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이런 예술 영화는 앞으로는 같이 보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것으로 결론 내렸다.
'차 사고 났어' 라는 말을 들으면 '괜찮아? 다친데 없어?' 라는 반응보다 '보험 처리했어?'라는 반응이 먼저 튀어나온다는 T형의 해결 의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연애의 흔한 감정 표현에도 이런 해결 의지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서울에 살고, 그는 경기도 동남부에 산다. 주말에 만나는 것이 디폴트이고, 가끔 시간을 잘 맞추면 평일에도 한 번 정도 데이트를 한다. 한 번 평일에 전화 통화하면서 "보고 싶어"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 ESTJ 남자친구의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1초 고민 후)"이번 주에 내가 근무 스케쥴 보고, 서울 갈 수 있으면 갈게"
음..? 내가 원했던 반응은 "나도 보고 싶어" 라고 공감해주는 말 한 마디였다. '상대방을 보고싶어하는 나의 결핍을 그는 어떻게든 해결해주고 싶어하는구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매사에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사랑스럽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만 해서 가끔 밉지만 세심함과 현실주의적인 면에서 오는 든든한 맛에 ESTJ 남자와 연애를 하는 것 같다. 투닥투닥거려도 서로 다른 점을 보완하며 잘 만나가고 싶다.
P.S
요즘 유행하는 Chat GPT에게 'ENFJ와 ESTJ 남자의 궁합'을 알려달라고 물어봤다. 이 친구는 처음부터 정답을 알고 있었다.
Photo by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