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너무도 유명한 알프레도 디 수자의 시 속의 한 구절이다. 이 시를 처음 접한 건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었다.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대체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거지?'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드라마가 방영된 것이 2005년, 당시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 사실 공감을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성인이 되고 굵고 짧았던 여러 연애의 경험이 나를 스쳐간 뒤에야 비로소 이 시 구절이 다르게 다가왔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기는 정말 힘든 것이었다. 헤어짐의 끝에는 새로운 사랑을 두려워하는 내가 남았다. 생채기에 물만 닿아도 쓰라린 것처럼, 또 내 마음이 다칠까 봐, ‘이런 내 모습을 싫어하면 어쩌지’ 마음을 졸이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고 새 살이 돋는 것처럼 이별의 아픔도 훌훌 털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얼마 전, 어떤 남자가 내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브런치에 쓴 글(천생연분은 진짜 있는 걸까)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나는 연애하면서 사랑한다는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연인 사이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쉽게 하던데, 이상하게 나에게는 그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사랑해라고 말을 할수록 내 사랑이 닳을 것 같았다. 그 말을 자주 하면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관계에서 을이 되는 걸까 봐 무서웠다. '좋아해'라는 말은 비교급인데, '사랑해'는 최상급처럼 느껴졌다. 계속 이어지는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 그 말을 내뱉은 순간 거기가 관계의 끝일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이 남자는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비로소 그를 만나고 나서야 나도 차오르는 감정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내뱉는 경험을 했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통화의 끝은 사랑해라는 말로 끝맺는다. 이 남자와의 관계에서는 사랑해라는 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 닳기보다는, 더 깊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변화를 스스로도 신기해하던 차, 얼마 전 읽었던 책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인간은 움직이고 있는 몸을 나타내는 동사를 읽거나 단지 활발하게 움직이는 어떤 도구의 이름을 읽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그러한 행동을 하거나 달리는 것과 같은 마음 상태가 된다.
「카페에서 일하는 할머니」 심혜경
책의 저자는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윤독 모임을 즐겨하는데, 소리 내어 책 읽기의 효용성에 대해 언급했다.
연인 간 사랑의 속삭임은 책 읽기와는 다르지만, 소리 내어 말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사랑한다고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단순 목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신체 기관이 반응하는 작용이며, 즉 정신과 육체의 교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대상에게 '사랑해'라는 말은 아낌없이 할수록 사랑의 크기는 더욱 커질 수 있다. 그러니,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사랑한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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