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는 인연 속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
중학교 때 단짝 친구 H가 얼마 전 결혼했다. 1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고, 같은 동네에 살아서 3년 동안 통학을 함께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던 친구였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친구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고, 나는 인문고로 H는 상업고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우리는 멀어지게 되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딱 한 번 만나고 그 이후로 서로 '한 번 만나야지.' 라는 무의미한 카톡만 오고 갔을 뿐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H의 결혼 소식을 들은 것은 결혼식 2주 전 같이 어울렸던 동네 친구 J를 통해서였다. J도 H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아니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H의 카톡 프사를 통해 알고 먼저 연락해서 청첩장을 받았다고 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기보다는, 자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연락해서 청첩장을 주는 것이 혹 우리에게 부담을 줄까봐 신경쓰고 미안해 했을 이 친구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결혼식이 열리던 토요일 아침, 서울에서 결혼식이 열리는 경기도 안산으로 긴 시간 이동하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함께 시간을 보냈던 15년 전의 추억이 이제는 너무 희미했다. 그런데 결혼식장에 도착해서 H가 남편과 다정하게 찍은 웨딩 사진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왔다. 신부 대기실에서 거의 9년 만에 H를 봤을 때도, H가 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하는 순간에도 눈물샘이 고장 난 듯 나는 계속 울었다.
그렇게 눈물을 흘렸던 것이 아직도 의아하다. 내가 모르는 남자 옆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H의 모습이 낯설었던 것일까. 마냥 어리고 철부지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가 앞으로 인생을 함께 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는 것이 뭔가 감격스러웠던 것일까. 내가 기억하는 H는 항상 본인보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가장 어른스러웠던 착한 친구였다. 진심으로 앞으로 이 친구의 삶에 정말 행복한 일만 있기를 바라면서 덩달아 내 마음도 뜨거워졌던 것 같다.
짧았던 예식이 끝나고, 신랑신부의 친구 및 직장 동료들의 사진 타임이 되어 앞으로 나갔다. H의 옆에는 부케를 받는 친구, 직장 동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리를 벌써 잡았다. 나는 신부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의 3번째 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순간 그 친구의 삶에서 나의 자리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 내가 설 자리를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등학교 이후 12년의 세월 동안 내 친구 H의 곁은 이런 친구들이 가득 채워줬구나.'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진 대열을 맞추다가 문득 뒤를 돌았을 때 어떤 키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P였다.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지만 P의 얼굴을 본 순간 이름 석 자가 바로 떠올랐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P는 내가 기억하는 중학교 때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우연한 계기로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이름과 그 사람과 관련된 추억이 생각난다. 그리고 1년이든, 10년이든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내가 기억하는 그 얼굴에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참 신기하다. 한때는 매일 같이 얼굴을 보고, 많은 것을 공유하는 사이였어도 진학, 취업, 이사, 이민, 결혼 등 각자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거치는 동안 지난 인연들은 점점 멀어지며 어느새 존재조차 잊게 된다.
나는 굉장히 현재 지향적 인간이다. 지나간 것에 연연하고, 후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현재의 나에게 주어진 순간, 사람,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3월이 되어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면 한 무리의 친구를 사귀고 몰입하여 시간을 보내다가도, 또다시 1년이 지나 새로운 반 친구들을 만나면 새로 사귄 무리의 친구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대학교 친구들과, 회사 생활을 하면서는 회사 동료들과.
'짧고 굵은 인간관계'를 맺어온 나의 성향 때문에 내 인생에는 유독 더 잊힌 얼굴들이 많은 것 같다. 한때는 소중한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끈질기게 이어가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냥 이런 내 모습을 쿨하게 인정하고, 수많은 가능성이 있는 우주 속에서 내 앞에 나타난 인연들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나는 누군가와 어떤 이유 때문에 멀어지며, 어떤 이유로는 가까워질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잊는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잊혔거나 앞으로 잊혀질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 속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그 기억으로 인해 누군가의 추억팔이에 나도 모르는 사이 소환될 것이며,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편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나를 스친 사람들에게 나는 불편하지 않은, 밝고 편한 그리고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