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묘하게 느끼는 취미의 유사성
나는 취미가 별로 없다. 예전에는 미드도 좀 많이 보고 당구도 좀 치곤했지만 이젠 아이가 둘이고 큰 애는 초등학교에 갈때가 되어버리니 어느새 취미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워낙 술도 마시지 않고 커피도 마시지 않으며 담배도 피지 않고 운동신경도 없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 일런지도 모른다. 이제 주기적으로 하는 것은 적당한 운동과 적당한 글쓰기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사람은 누구나 한때를 불태우고 집중했던 그런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나름 미드를 많이 보던시기에는 자발적 재능기부에 해당하는 자막 번역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고 당구를 열심히 치던 시절에는 조금 고가의 큐를 사서 본격적인 취미로 즐기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 모두 그러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 여러모로 재능이 별로 없는 내가 유독 남들보다 조금 잘 하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예를 들어 애니팡은 그런 종류 가운데 하였고 직소퍼즐도 그 가운데 하나 였다.
직소퍼즐은 참 오묘한 작업이다. 투자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은 것에 비하면 정작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냥 레플리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림하나 뿐이다. 사실은 붓질을 해서 그린 것은 아니니 정확히 그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또한 열심히 퍼즐을 맞추고 있는데 누가 실수로 치고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모든건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조각을 맞추었는데 피스 1개가 사라져서 (혹은 애초부터 상자 안에 들어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모든 작업이 허무해져 버리는 경우도 있다. (화가 나서 판매처에 전화를 하였더니 그 피스 1개를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새제품 1개를 보내주었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많은 노동과 그 노동에 필요한 집중력 그리고 적은 보상! 이것은 자본주의의 시대에 걸맞지 않는 비효율적 노동형태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작업을 사랑했다. 마지막 피스의 퍼즐을 내려 놓는 순간의 쾌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작품의 퍼즐을 만들다 보면 주변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기 마련이다. 나는 고흐의 작품은 아주 많이 맞췄고 (한 6~7개는 한듯) 동양화, 마그나카르타 등 너무 많은 퍼즐을 맞췄다. 처음 한 두개까지는 그들이 집의 벽에 걸렸지만 이후에는 구석에 세워졌고 이후에는 수 많은 친구들이 한묶음이 되어 창고 같은 장소에 보관되었다. (말이 보관이지 거의 버려진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맞췄다. 그리고 수북히 쌓여 있는 액자들을 다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나였다.
나는 시간과 싸우기도 했다. 1,000피스의 퍼즐을 몇일만에 맞추는가에 대해서 스스로와 싸움을 한 것이다.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이면 일상생활을 하면서 3일정도로 퍼즐을 완성하곤 하였다.
이런 극도의 노동에 해당하는 취미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 읺다. 절대적인 수는 물론 많겠지만 비중의 측면에서는 비율이 낮다는 뜻이다. 한편 직소 퍼즐을 즐기는 사람은 몇 가지 공통적인 성향이 있다고 본다.
- 완성이라는 즐거움을 위해서 노력을 기하는 점
- 부분을 합쳐서 전체를 만드는 점
- 순간적으로 굉장한 집중력을 발휘하는 점
등이다.
즉 직소퍼즐을 하는 것은 머리가 좋은것과는 상관없다. 이건 단지 끈기의 문제이다. 우리는 직소퍼즐을 하면서 하나의 아리송한 퍼즐을 들고서 이리저리 돌려본다. 이 아이와 저 아이를 맞춰본다. 이런 직소퍼즐을 그림이라는 이유로 예술의 영역이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그건 완성에 대한 열망을 위한 노가다의 영역이다.
그래서 직소퍼즐은 글쓰기 특히 책을 쓰는 행동과 닮아 있다. 책 역시 그렇다.
내가 쓴 원고에 마지막 단어를 입력하는 순간의 만족감과 새로운 책이 나왔을때 그 책을 손에 쥐었을때의 쾌감을 위해서 사람들은 책을 쓴다. 물론 이후 책이 유명해지고 잘알려져 저자가 셀러브리티가 된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잘 벌어지지 않기 때문에 책을 쓰는 사람들은 쉽사리 그런 희망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결국 책 자체를 내는 것에 열광해야 한다. 이 역시 결국 머리가 좋은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문제는 목표의식과 끈기이다.
책을 쓰는 것과 직소퍼즐은 파보면 파볼 수록 닮아 있다.
이 둘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처음 자신있는 부분 부터 시작한다. 책을 쓰는것도 금새 생각나는 내용들을 적어내려가면서 시작하고 직소퍼즐 역시 패턴이 명확해서 금방 연결할 수 있는 부분으로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부분은 금새 동이 나버리고 이내 인내심의 싸움으로 진입한다. 이제 큰 그림을 보고 맥락에 맞는 글을 써야하고 퍼즐 피스를 맞춰야 하는 것이다.
이 둘은 모두 처음 시작할때는 금방 끝날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다 완성하고 나면 뿌듯함은 있지만 다시는 안할꺼라 다짐하고 다시 또 하게 된다. 또한 무엇보다 내 만족감이 중요하다. 꽤 많은 책을 써도 인기를 얻는 책은 거의 없고 많이 퍼즐을 완성해도 벽에 걸리는 아이는 별로 없다.
직소 퍼즐 작업의 완성은 퍼즐면에 유액을 바르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데 이것은 책을 쓰고 나서 탈고 및 교정 교열과 닮아 있다. 내용이 갖춰졌다고 해서 유액을 바르거나 탈고를 하고 교정교열을 하지 않으면 그건 완성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리고 직소 퍼즐을 아무리 많이 맞추어도 그들 중 한 두개만 벽에 걸리듯이 책 역시 아무리 여러 권을 써도 대중에게 인정받거나 내가 완벽히 만족하는 책을 쓰는건 역시 어렵다. 이 중 대중의 기호에 맞는 책을 잘 쓰는것과 집안의 벽에 걸릴 직소퍼즐을 맞추는 것은 역시 수요 공급의 경쟁이기도 하다. 어차피 선택될 대상의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결혼을 하고 나서는 집사람과 직소퍼즐을 몇 개 맞췄다. 집 사람과 맞춘 제품 가운데 하나는 내가 그 동안 쫌생이처럼 비싸지 않은 퍼즐을 구매했던것과는 달리 조금 좋아보이는 퍼즐이었다. 이제는 두 아이로 인해 그 퍼즐을 마지막으로 새로운 퍼즐을 사지도 그리고 맞추지도 못하는 지금 나에게 남은 취미는 글을 쓰고 책을 쓰는 것 뿐인것 같다. 나의 30대의 마지막을 지나며 30대를 가장 크게 수놓았던 두 가지 취미 속에서 나의 성격과 취향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먼 미래에 내가 맞추었던 직소퍼즐의 수 만큼이나 많은 나의 책들이 내 손에 쥐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