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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Dec 05. 2017

어른들 부르는 '딥(deep)'의 문화

'깊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디-프ディープ'의 세계

일본 문화의 층위는 깊고도 넓다. '뭐 이런 걸 다 하지' 할 정도의 취미들이 곳곳에 널려있는데, 이미 한국에도 알려진 '철도'나 '피규어' 외에도 희한한 게 적지 않다. 


일례로, '폐허 오타쿠' 들이 있다. 폐허 오타쿠의 존재를 알게 된 건 한 방송 때문이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일본 안팎의 폐허를 소개하는 프로를 만나게 됐다. 이름하야 '폐허의 휴일(廃墟の休日)'(TV도쿄). 심령 스폿이나 역사 유산으로서의 폐허가 아니라, 단순히 폐허 자체에 대한 감상을 전하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군함도 등도 등장하니 완전히 역사성을 배제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주된 관점은 폐허의 미학이지 역사성이 아니다. 솔직히 이런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누군가 본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흥미롭다. 심야프로그램이기도 해서 실험적으로 방송하는 측면도 있는 듯싶다. 현재는 종료)



아래는 폐허 정보를 모아놓은 사이트다. 일본 한정이라고 한다.


(나무위키를 보면 한국에도 어느정도는 유입된 듯하다)

방송 얘기가 나온 김에 기이한 프로 하나 더 소개할까 한다. 


이름은 '전력 언덕(全力坂)'. 이 프로의 컨셉은 '젊은 여자가 언덕을 전속력으로 달린다' 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게 끝이다. 방송시간은 무려 '1분안팎'


일본 어딘가의 언덕 이름이 나오고 여자가 뛰기 시작한다. 출연자들은 무명에 가까운 배우거나 그라비아 아이돌(비키니 비디오를 찍거나 사진집을 내는 사람들). 중간에 나레이션으로 언덕이름과 함께 "이 언덕 또한 실로 뛰고 싶어지는 언덕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숨 차하는 여성이 비춰지고 끝.


묘하게 남성 시청자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면이 있어서, 멍하니 보게 된다고 할까. 어떻게든 방송에 나가고픈 여성출연자와 남성 중심의 세계관이 만난 일본다운 희한한 프로그램(어찌보면 변태성에 가까운?)이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문화도 이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다. 이른바 '딥(deep)'의 문화다. 


일본어로는 보통 '디-프ディープ'라고 발음한다. 영어로 '깊다'의 의미이지만 그 이상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화려하고, 비싸고, 깨끗하고'의 대척점에 있는 문화라 생각하면 된다. 즉, 뭔가 어둡고 싸고, 더러운 느낌이랄까. 아저씨 문화와도 비슷하다 하겠지만, 최근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그럭저럭 인기를 끌고 있다.


도쿄에서 대표적으로 '딥'하다고 알려진 게 기타구(北区) '아카바네(赤羽)'다. 


맨위가 아카바네, 그다음이 이케부쿠로, 그다음이 신주쿠다. 출처: 구글지도


신주쿠나 이케부쿠로에서 멀지 않아 교통이 편리한 반면, 체인점보다 자그마한 개인 경영 술집이 유독 눈에 띄는 동네다. 특이한 점은 술집들이 대체로 대낮부터(심한 곳은 아침부터) 영업한다는 점이다. 남녀 비율로 보자면 압도적으로 남자비율이 높다(그러나 최근엔 다소 분위기가 변하고 있는 것도 사실). 


12시 이전에 가면 허름한 술집서 불콰한 얼굴로 경마잡지나 스포츠 신문을 보며 들이키고 있는 아저씨 군상들을 볼 수 있다. 고독한 미식가(孤独のグルメ)에도 등장한 바 있다.



밤의 아카바네 풍경. 간판이 묘하게 낡은 것이 딥의 매력이다. 


아래 블로거는 낮 12시에 지인과 만나 장어구이집에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 뒤에 무려 4곳을 더 돌고 마무리.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서서 마시는 집(立ち飲み屋)이거나, 자리가 비좁은 곳이 대부분이다. 의외로 블로거가 갔던 술집은 성비가 다양했던 듯하다.



아래 블로거는 아카바네의 '딥 스팟' 5곳을 정리해놨다. 딥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곳들로 사진을 몇 장 퍼온다.



아카바네의 뜬금없는 '사우나 호텔' 위 자유의 여신상. 출처: https://sirabee.com/2015/06/21/37071/
'아카바네 공동묘지'라는 섬뜩한 이름을 가진 귀신의집 이자카야. 출처: https://sirabee.com/2015/06/21/37071/


아카바네와 같은 딥한 동네에서 유행하고 있는 게 이른 바 '센베로(千ベロ)'다. 숫자 '1000(센)'과 취한 상태를 가리키는 '베로베로'가 합쳐진 말로, 한군데서 딱 1000엔어치만 마시고 여러군데를 돈다는 뜻이다. 


아래는 30대 여성의 센베로 도전기다. 혼자서 들어가니 주위 남성이 말을 걸었다든가, 500엔대로 마실 수 있었다든가 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혼자서 마실 곳이 적은 한국에선 좀처럼 하기 어려운 문화 체험이라 하겠다.


여대생이 4곳을 돌고 남긴 (광고성) 체험기도 있다.


이런 딥 스폿만을 모아 심도 있게 취재하고 있는 사이트를 하나 소개한다. '도쿄 딥 안내'다. 


취재진들의 필력이 대단하고, 취재한 동네를 '무시하면서도 존경하는' 복잡한 맘이 느껴지는 게 사이트의 묘미다. 이 글들은 실제 잡지로도 발간되고 있다. 진지한 문체속에 '빵 터지는' 필살기가 숨어있다. 번역기로 돌려봐도 어느 정도 의미를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기사는 아래 내용이다. 


사이타마현 카와구치시에 있는 구식 아파트를 취재했는데, 취재진은 이를 '리얼 구룡성채(구룡성채에 관해서는: https://namu.wiki/w/%EA%B5%AC%EB%A3%A1%EC%84%B1%EC%B1%84)'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유인즉슨, 아파트엔 일본인이 거의 살지 않고 완전히 중국인 마을이 됐다. 아파트 내부는 하나하나 중국식으로 개조중. 화장실 안내도 일본어는 없고 오로지 중국어로만 적혀 있다. 1층 식당도 중국음식점. 카와구치는 원래 외국인 비율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데, 슬럼화된 곳마다 외국인 주거지가 형성되고 있다.


취재를 마친 편집부 사람들은 1층에 있는 중국 요리집에서 양고기를 시킨다. 그런데, '그 양과 가격에 감탄해' "아, 이거 교통비 들더라도 또 올 수밖에 없는 걸"하며 훈훈하게 마무리. 대체로 뭔가 지역의 엉망인 분위기를 비꼬는 듯하지만 결론에선 '딥 스폿'에 대한 진한 애정이 묻어나온다. 


아래 사이트도 같은 종류로, 최근엔 업데이트가 안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 다르게 뭔가 심심하단 이미지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이런 소소한 재미가 도처에 있는 곳 또한 일본이다. 딥의 문화는 혼자서 즐겨도, 2-3명이 즐겨도 그 나름의 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객으로 오면 언어의 장벽도 없지 않을텐데, 신주쿠 골든가이(ゴールデン街)같은 곳은 외국인도 많아 초심자에게 적합하지 싶다.  


번화가 한쪽편에 숨어 있는 딥한 골목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일본 생활, 여행의 하나의 묘미다. 개인적으로 딥 문화를 접하고부터는 준 매니아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기회가 되면 연재라도 하고 싶은데 그럴 정도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라 아직은 모르겠다). 종종 전하도록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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